030화 백성들의 원한을 위로하다.
항복하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자들이 모두 죽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힌 자들만이 살아남았으니, 그들은 자신들이 벌인 일의 결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함성과 포성으로 채워졌었던 계곡이었다.
그곳에 사람의 시신과 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사로잡힌 자들이 말과 사람의 시체를 치웠으니, 그들은 전사로 불렸던 자들이었다.
혹은 야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변발을 한 야인들이 무기 대신 시신들을 들며 움직이고 있었다.
“저쪽 수레에 실어라!”
“시킨대로 안 하지비?! 니들 마음대로 하면 모가지를 따버린다!”
창칼을 든 조선 병사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의 위협과 통제 속에서 야인들이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괜히 오해받아서 화살을 맞거나 창칼을 맞을 수 있었다.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신체 고단함을 견뎌야 했다.
“흣!”
“여기야, 여기…….”
“큿…….”
산에 판 구덩이에 죽은 전사들의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을 일으켰다.
“니탕개 놈 때문이다…….”
“놈이 꼬드길 때, 따라가지 말아야 했는데…….”
“멍청한 칸 때문에 친구들이 모두 죽었어…….”
“놈 때문에 우리까지 여기서 죽을 뻔했다…….”
“망할…….”
니탕개를 욕하고 그와 함께했던 자신들의 추장을 욕했다.
추장의 결정으로 인해 반 수 넘는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걱정이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었다.
추장을 향한 매서운 눈길이 그치지 않았다.
율보리도 부하들처럼 산으로 시신을 옮기고 있었다.
“…….”
따가운 시선에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의 결정으로 부족에 비극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저 겪고 있는 시련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 야인들의 모습을 이연이 고개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백성들이 지켜봤다.
한 백성이 북병사에게 간절한 청을 전하게 됐다.
“놈들이 내 자식을 죽였슴메… 그런데 저놈들을 살려주신다고 하셨슴둥?”
“그래.”
“어떻게 놈들을 살려주실 수가 있슴둥? 저놈들에게 자식들이 죽은 백성들만 수두룩 함메! 그러니 부디 죽여 주시우다! 내가 죽기 전에 저넘들 죽는 것을 봐야 한이 풀릴 거 같슴메! 죽여 주시우다!”
자식을 잃은 노인이 이제신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군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백성들도 바라는 것이었으니, 그들이 아예 엎드려서 울부짖고 있었다.
‘저놈들이 대체 뭐라고 하는 거니……?’
‘설마, 우리를 죽여 달라고 말하는 거는…….’
눈치 빠른 야인들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시신을 모두 매장하고 치웠을 때, 똑같이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던 때였다.
군사들과 함께 시신을 치우던 이순신이 멀리서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안에서 상감이 움직이며 북병사와 백성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이와 류전과 류성룡 등이 함께 움직였다.
곡소리를 듣고 다가온 이연이 이제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뭔데? 왜 이리 울어?”
이연의 물음에 이제신이 목례를 한 번 올리고 대답했다.
“백성들이 야인들에 대한 처형을 요구하고 있사옵니다.”
“처형이라고?”
“예. 전하. 야인들에게 백성들이 처자식을 잃어서…….”
백성들의 요구를 상감에게 알렸다.
북병사로부터 이야기를 듣던 중에 이연이 반문했다.
“후에 죄지은 놈들을 따로 찾아내겠다는 말은 했어?”
“예. 전하.”
“그런데도 죽여 달라고 하는 거야? 야인들 전체를?”
“예.”
“추장을 따라 싸우기만 했던 놈들은 살려준다고 과인이 어명을 내렸는데? 그러면 과인의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특별히 화난 말투로 묻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감의 질문이 매우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백성들이 상감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이 깊어서 그런 것 같사옵니다. 부디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엎드린 백성들이 울며 이번엔 이연에게 청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청을 이연이 무겁게 받아들였다.
백성들의 한이 얼마나 큰지 이연이 알고 있었다.
그때 눈앞에서 후원 창이 떠올랐다.
[ 삼봉쓰님이 5냥을 후원합니다. ]
백성에게 설명하는 것을 게을리하셔선 안 되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설득이 필요하옵니다.
새로운 위인이었다.
채팅 창에서 인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 K신궁_성계 : 삼봉 선생이 오랜만이우다.
— 삼봉쓰 :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전하.
— 킬방원 : 저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숙부님.
— 삼봉쓰 : …….
또 한 사람이 있었다.
— 소생 : 소생 하륜이옵니다. 전하.
두 명의 위인이 등장하면서 다시 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삼봉쓰’라는 대화명을 쓰는 위인이 선왕의 인사를 받고 침묵하게 되었으니, 그가 누구인지 이연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선왕과 어떤 악연으로 엮여 있는지를 알았다.
‘정도전이구나! 이 나라가 세워질 때 선왕을 도와 기틀을 잡았었던 위인이다! 그리고 왕자의 난 때 왕이 되시는 선왕께 목숨을 잃었었어! 설마 아직도 화해하시지 않으신 건가?’
이미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죽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생애 때 겪은 한을 풀지 못하고 인사마저 거부하는 모습이 재밌기도 했다.
계속 보다가는 심각한 분위기에서 웃을 것 같았다.
창을 내리고 백성들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하긴. 백성들은 모르지.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말야. 뭐, 설명해줘도 마음대로 생각하는 게 사람인데 없으면 보나 마나야. 그러니 친히 설명해주지. 그리고 백성들에게 친절한 왕으로 찬양받는 거다!’
여느 왕이나 군주라면 그저 명을 내린 것으로써 끝이었다.
명을 따르지 않는 백성을 처벌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항복한 야인들을 살려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려고 했다.
친히 백성들을 설득하는 군주가 없었으니, 그것으로 말미암아 온 사람들의 찬양을 받고자 했다.
기대 만연한 미소를 확 떠올렸다가 지우면서 백성들 앞에 서려고 했다.
그때 류전이 먼저 나섰다.
그가 상감을 위한 일들을 하려고 했다.
“소신이 백성을 물리겠사옵니다. 하오니…….”
그의 말을 막으면서 말했다.
“물리긴 뭘 물려.”
“예?”
“백성을 달래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과인이 친히 해야 되는 거야. 어서 비켜.”
상감의 말에 류전이 놀라워했다.
이내 자세를 낮추면서 옆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윤두수와 류성룡이 지켜보고 있었다.
“전하께서…….”
“친히 백성들을 달래시려고…….”
놀람이 그치지 않았다.
육진에 온 이래 상감은 언제나 백성을 위한 일들을 직접 벌이고 있었다.
다친 군사들을 친히 살피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보았으니, 이미 백성을 달래기 전에 이연이 만족스러워했다.
‘그래! 그렇게 쳐다봐!’
그리고 엎드린 백성에게 물었다.
“혹시 아직 남아 있는 자식이나 손자가 있어?”
“야……?”
“살아남은 자식이나 손자가 있냐고. 혹시 있어?”
“……?”
상감이 친히 자신에게 물었다.
그에 백성이 당황하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제신이 백성에게 대답하라는 말을 전하게 됐다.
“전하께서 하문하시네. 대답해 드리게. 어서.”
“……!”
정신을 차리고 늙은 백성이 땅에 이마를 박으면서 대답했다.
“이…있슴메……!”
“자식이야?”
“아…아님메……!”
“손자야? 아니면 딸인가?”
“소…손자임메!”
“허면, 손자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어?”
“야?”
“네 자식이 죽었잖아. 저놈들을 죽인다고 해서 살아나는 일인가? 그러면 죽여주겠지만 아니라면 분풀이에 불과하지. 네가 원하는 것이 정녕 분풀이야?”
“…….”
조금 따지듯이 이연이 물었다.
그의 물음에 백성이 멍한 모습을 보였다가 울먹거리게 됐다.
“정말로 원하는 거는 분풀이가 아임메… 하오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인이 죽을 거 같슴메…….”
“네 마음을 알지.”
“상감마마…….”
“하지만 네가 분풀이를 하게 되면, 네 손자는 반드시 죽게 될 거야.”
“야……?”
“곰곰이 생각해 봐. 앞으로 저런 놈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멍청한 놈들이라서 이 땅에 쳐들어왔고 다시 그런 놈들이 나올 수도 있어. 과인이 씨를 말려도 다른 놈들이 올 수도 있어. 그때 과인이 저놈들을 죽였을 때, 놈들이 과연 항복할까?”
“그…그건…….”
“죽기 살기로 싸우려 하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없으니까. 과인의 손에 죽든지 추장 손에 죽든지 하게 될 텐데, 항복하라고 말해도 절대로 듣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저놈들을 살려야 해. 그래야 앞으로의 적이 항복할 수 있어. 과인은 지금 너의 손자를 살려주려는 거야.”
“…….”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현실이었고 이성적인 말이었다.
야인들을 향한 뜨거운 한을 풀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남은 손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란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유일한 손자가 전장에 서 있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 이연이 다른 백성들에게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과인도 저놈들을 죽이고 싶다! 어찌 감히 오랑캐 따위가 과인의 백성을 해친단 말이더냐! 하지만 과인은 다음을 생각해야 하고, 너희들을 지켜야 하며, 너희 자식과 손자 손녀 후손들까지 지킬 것이다!”
“…….”
“적이 빨리 항복한다면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놈들을 죽인다면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된다! 우린 현명한 지혜로 최선을 택해야 한다! 이견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과인에게 고하라!”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그런 기회를 주는 군주도 세상 어디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이와 김우서가 지켜보고 있었고, 멀리서 이순신과 신립과 김시민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연의 말에 백성들이 흐느끼면서 울게 됐다.
“어명을 받들겠슴메…….”
“부디, 소인들의 자녀와 후손들을 지켜주시우다… 전하…….”
“흐흐흑…….”
친히 설득하며 설명해주는 임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머리로는 상감의 논리가 옳고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엎드리며 임금에게 예를 나타냈다.
그 모습을 류전을 비롯한 신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저렇게 한이 많은데…….”
“전하께서 친히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백성들에게 전하께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신하들의 시선을 이연이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지! 가슴에 맺힌 한도 어느 정도 풀어줘야 해!’
좀 더 백성을 위하고자 했다.
주위 시선을 의식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백성을 위할 줄 아는 미래의 지혜를 이연이 알고 있었다.
무릎을 꿇으면서 늙은 백성의 손을 잡았다.
“마…마마……?”
백성에게 이연이 약속했다.
“비문을 세워줄게. 이곳에서 백성을 지키고 이 나라를 지켰었다는 사실을 말야. 언젠가 과인도 죽고 저기 신하들도 죽고, 군사들과 백성들도 죽게 되겠지만, 영웅의 이름만큼은 반드시 기억될 거야. 적어도 이 나라가 존재하는 동안은 말야.”
“……!”
“우린 잊혀도 너의 자식은 사람들이 기억할 거야.”
“크흐흑… 마마…! 상감마마…! 흐흐흑…! 흐흑……!”
임금의 약속을 듣게 된 노인이 오열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눈물을 흘렸고, 그를 이연이 안아주면서 갑옷 안의 곤룡포까지 적셨다.
지켜보던 백성들마저 눈물을 흘렸다.
“흐흐흑… 흐흑…….”
“진이 아배… 흐흑…….”
지켜보던 군사들마저 눈물을 흘렸다.
늙은 백성의 등을 이연이 두드려주다가 일어서게 됐다.
그의 두 눈도 빨개져 있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면서 이연이 류전을 불렀다.
“병판.”
“예. 전하…….”
“비문을 세울 거야. 들었지?”
“들었사옵니다.”
“과인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전사자들의 이름을 비문에 새겨서 북병영에 세울 거야. 그리고 이 나라가 끝날 때까지 반드시 지켜낼 거다.”
상감이 뜻을 보이자 류전이 머릴 숙이면서 찬양의 예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께서 보여주신 인자하심은 천대를 넘어 만대에 이를 것이옵니다! 전하!”
뜨거워진 마음을 감사와 함께 상감에게 전했다.
다른 신하들도 함께 머리를 숙이면서 예를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으니, 한 층 더 상감을 우러러보게 됐다.
이이 또한 백성을 위하는 상감을 보고 있었다.
그때 고갯길을 넘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다가닥! 다가닥!
“흐럇!”
말을 모는 전령의 소리를 듣게 됐다.
함께 소리를 들은 이연이 이제신에게 이야기했다.
“확인해 봐.”
“예. 전하.”
뭔가 급한 소식인 것 같았다.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마음으로 이제신이 움직였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서 군관의 안내를 받은 전령과 마주하게 됐다.
처음에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를 받게 됐다.
때문에 그 내용도 좋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으니, 그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았고, 이내 이제신의 얼굴에서 화색이 도는 것을 보게 됐다.
“휴……!”
“비보는 아닌 것 같네.”
“그러게 말입니다.”
신하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환한 미소와 함께 이제신이 오는 것을 보게 됐다.
이연도 마음을 가볍게 하며 앞으로 온 이제신에게 물었다.
“무슨 소식이야? 기쁜 일이지?”
그의 물음에 이제신이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도망쳤던 야인들이 토벌되었사옵니다!”
“그래? 어디에서 토벌되었어?”
“부령군이옵니다!”
“부령군?”
“부령부사 원균이 야인들을 토벌했사옵니다! 다른 고을에서도 도망친 야인들이 토벌된바, 거의 모든 잔당들이 소탕된 것 같사옵니다! 백성들에 대한 해는 없을 것이옵니다!”
“…….”
보고를 듣고 기뻐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의심부터 들고 있었다.
달리 어떠한 보고도 받지 않았지만 이름에서 주는 불쾌함과 불길함이 분명히 있었다.
부령부사 ‘원균’을 이미 이연이 알고 있었다.
그에게 어떤 미래가 있는지 오직 그 만이 알고 있었다.
미래는 현재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