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공작부인의 참교육
(24/73)
24화. 공작부인의 참교육
(24/73)
24화. 공작부인의 참교육
2022.12.21.
아티아가 오물거리던 걸 멈추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레오는 단 한 알의 딸기라도 아티아의 입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아티아가 저 딸기를 먹고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큰일이니까.
더군다나 제철이 아니라 그런지, 구해 온 양 자체도 무척 적었다.
‘나랑 같은 책을 본 게 틀림없어.’
<세계 최강 지존이 되는 방법>에 나오는, 더욱 강해지고 지존이 되기 위해 먹어야 하는 북부 설향딸기.
땅바닥에 떨어진 재료 중에는 베르갈 열매와 금괴불초도 조금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양이 매우 적어 보였지만.
‘풋, 웃기는군! 어디서 감히 나보다 강해지려는 수작이야?’
훈련장을 밥 먹듯이 드나들던 레오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얼굴과 머리칼이 살짝 젖어 있고, 옷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는 아티아는 훈련장에 갔다 온 게 틀림없었다.
좀 미묘한 게 있다면 은은한 장미향도 함께 풍긴다는 것?
“도둑인가? 남의 걸 훔쳐 먹게.”
레오가 빈정거렸다.
오물오물 야무지게 설향딸기를 먹던 아티아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푸핫! 버린 거 아니었나?”
“아닌데?”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레오는 아티아를 향해 턱짓했다.
“훈련장에 갔다 왔나 봐?”
“오, 어떻게 알았어?”
“척 보면 척이지.”
레오는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랐냐는 듯 거만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아티아는 문득, 자신이 뭘 하러 주방에 왔는지를 깨달았다.
“뭐, 아무튼. 내가 필요한 것만 찾아서 돌아가야겠다.”
“찾는 것이 있으신가요, 마님?”
웰링턴가의 망나니에게 한바탕 시달리고 있을 때 구세주로 나타난 아티아에게 친절한 얼굴로 고용인이 물었다.
“내가 뭘 찾으러 왔더라? 내가 오늘부터 식단 관리를 빡세게 할 거라서.”
‘식단 관리’라는 말에 레오는 또다시 이를 꽉 깨물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나처럼 식단 관리를 하려는 거야.’
아티아가 종이에 적어놓은 재료들을 내밀었다.
“지금 당장 필요해서 급하게 찾아왔는데.”
“잠시만요, 마님.”
고용인들이 종이를 받아 들더니 분주히 움직였다.
그 모습이 심히 거슬렸던 레오가 아티아에게 거만한 말투로 물었다.
“너, 왜 식단 관리를 하려는 거지?”
“너?”
“그래, 너.”
아티아는 근본도 개념도 없는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이렇게 막무가내인 녀석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티아 자신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영악한 이 녀석은 아버지인 하이데거와 웰링턴 공작인 카수스 앞에서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철딱서니 없다지만, 반말은 하면 안 되는데.”
“내가 왜?”
“너랑 나랑 무려 여덟 살 차이야, 알고 있어?”
전생의 강지하에게도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사춘기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착한 동생이었다.
반면, 레오는 2차 성징을 아주 거세게 지나는 중이었다.
아티아는 생각했다.
이 시기를 잘못 보내면 인격 형성에 큰 지장이 생길 거라고.
특히 레오 같은 경우는 더욱.
초장부터 길들이지 않으면 아랫사람뿐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모두 괴로워질 터였다.
아티아는 이번 기회에 녀석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오는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죽였다.
“내가 걷고 앞구르기 뒤구르기 다 했던 나이에 너는 갓 태어난 핏덩이였다고. 알겠어?”
“그게 뭐?”
아티아는 천사 같은 얼굴로 눈을 곱게 접으며 말해주었다.
“꼬맹아.”
‘꼬맹아’라는 말에 레오는 눈썹을 찡그리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티아는 천사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단어들만 내뱉었다.
“이 녀석은 아주 하극상이 아주 습관이야. 군대였으면 총살감일 텐데.”
탕! 탕!
아티아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제 머리에 대고 쏘는 시늉을 했다.
레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건방진 태도로 아티아를 쳐다봤다.
“아, 자꾸 혼자서 뭐라는 거야.”
아티아는 레오가 아주 귓구멍을 막은 채 자기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녀석이란 걸 깨달았다.
“안 되겠네. 당장 따라 나와.”
아티아가 레오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주 영혼까지 완벽하게 탈곡해줄 테니까.”
순간, 주방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반응했지만, 레오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주방에 있는 고용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붙자는 거야?’
얼마 전 아티아에게 패배해서 창피란 창피는 다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레오는 침을 삼켰다.
“지금은 안 돼. 일정이 있어.”
“무슨 일정? 없어 보이는데.”
“그런 게 있어. 오늘 말고 나중에 붙지.”
“그러든가.”
아티아는 꼬리를 내리는 레오를 향해 눈썹을 까딱였다.
* * *
저벅저벅.
레오는 주방에서 황급히 빠져나온 뒤 기사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리핀의 알을 구하려는데.”
“그리핀의…… 알이요?”
“어디로 가야 하지?”
강해지는 식단 관리법 중 하나가 그리핀의 알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희귀 재료인 거야 알지만 구할 수 있으니까 책에 나온 거겠지, 라고 생각하는 레오였다.
* * *
며칠 뒤, 훈련장.
창과 방패 혹은 훈련용 볏짚과 검류.
그렇게 항상 비슷한 기구가 놓여 있었던 훈련장.
그런데 갑자기 끔찍한 혼종들이 등장했다. 거대한 철제봉에 둥근 원판을 차곡차곡 겹쳐 만든 운동 기구 등.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원래 있던 것에서 조금 변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훈련장의 사용 빈도가 낮은 기구들을 사용해 새로운 혼종을 만든 아티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새로운 기구를 만드느라 촉촉한 땀을 흘리며 자신을 보조해준 기사에게 아티아가 물었다.
“3대 몇 쳐?”
“네?”
“3대 몇 치냐고.”
“삼대…… 몇이요?”
“응.”
기사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완성된 기구는 수제라 좀 엉성했지만, 이만하면 다른 기구들보다 훨씬 쓸모 있었다.
“아 여긴 그런 게 없겠네. 또 나만의 세계에 빠져버렸어.”
아티아가 새롭게 만든 기구 앞에 바짝 붙어 서더니 철제 바벨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기사들의 눈에는 딱히 무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하얗고 매끄러운 아티아의 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락부락한 기구였다.
“허으야! 흐야!”
공작부인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매우 이상한 소리였다.
기사들이 놀라 입을 벌렸다. 수통을 들고 물을 마시다 뿜는 기사도 있었다.
“흐아아! 하아압! 가! 자! 가! 자!”
아티아는 있는 힘껏 바벨을 들어 올렸다.
어찌나 힘을 줬던지 새하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녀의 팔과 몸이 덜덜 떨렸다.
‘아니, 이걸 못 드네?’
투툭!
종아리 높이까지 간당간당하게 들었으나, 더는 올라가지 못하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벨이 떨어졌다.
땀에 젖은 아티아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
주변의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야리야리하고 연약한 공작부인이 훈련장에 있는 것도 신기한데, 이상하게 생긴 기구를 만들어 대뜸 들어 올리려 하다니.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저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공작부인이 사탄의 마술에라도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입 벌리고 구경하는 수밖에.
아티아는 땅에 떨어진 바벨을 말없이 바라봤다.
굴욕적이었다.
그리 무거운 것도 아닌데 왜.
전생의 강지하였다면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 무게인데.
아니, 한 손이 뭔가? 발가락으로도 들 수 있을 것을.
아티아는 인체의 한계 앞에 무너지는 굴욕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강지하가 초등학생 때 느꼈던 그 불쾌함을 또다시.
‘이 몸으로는 이 무게조차 아직 무리인가.’
아티아는 미간을 좁히며 문제의 원인을 되짚어 봤다.
그리고 철저히 준비운동을 한 다음, 손과 발을 털었다.
“후! 다시 한번, 가보자고!”
땅에 붙어 있으려는 바벨과, 땅에서 떼어놓으려는 아티아.
바닥에서 고집스레 버티고 있는 바벨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밤하늘의 별을 박은 듯 반짝이던 아티아의 눈이 순식간에 살기등등하게 바뀌었다.
“오냐. 오늘 내가 죽나, 네 녀석이 죽나, 한번 해보자.”
마치 사냥감을 물어뜯기 직전의 맹수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스트랩을 단단히 동여맨 손목이 거칠게 회전했다.
“흐어어어어어!”
때마침 훈련장 근처에 있던 카수스도 연이어 울리는 괴이한 소리를 들었다.
기사들이 내는 평소의 기합 소리와는 많이 다른.
훈련장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빠르게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카수스가 도착해서 본 것은 은발을 질끈 묶어 올린 아티아였다.
언제나 그렇듯 편한 복장과 헤어스타일로.
‘또 저 여잔가.’
카수스는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계속 아티아와 이곳에서 마주치게 된다.
오늘은 일부러 어제와 다른 시간대에 왔거늘.
‘아냐, 오히려 잘됐을지도.’
마침 카수스도 땅 투자 건으로 고민하던 차였다.
아티아의 의견을 한 번 더 듣는 것 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티아는 거칠게 숨을 내몰아쉬며 이상한 무기를 들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면 죽일 것 같은 살기였다.
카수스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우랴앗!”
아티아가 이목구비가 녹아내릴 듯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영혼까지 힘을 끌어 올렸다.
저러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공작부인의 얼굴이 터지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며 기사들도 겁먹은 토끼처럼 오들오들 떨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카수스의 등장마저 잊게 만드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으아아아아아아!”
아티아는 마침내 원하는 높이까지 바벨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한계를 깼다는 시원한 표정으로 바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툭!
약한 흙먼지가 일었다.
어느 날 훈련장에 나타난 독보적인 캐릭터 아티아를 기사들이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았을 무렵.
하나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머, 멋있으십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하셨습니다!”
솔직히 가벼워 보이는 바벨이었지만, 아티아의 표정과 리액션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자 같았으니.
멋진 경기를 본 듯 감격한 표정으로 기사들 모두가 환호했다.
그리고 카수스는 투명인간이 되어 훈련장 기사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가 훈련장에 있는 것조차 아무도 몰랐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저, 저, 전하…….”
“전하를…… 뵙습니다!”
카수스는 서늘한 낯으로 미간을 좁혔다.
“일찍도 알아보는군.”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카수스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때, 아티아가 상쾌한 표정으로 땀을 닦으며 카수스에게 인사했다.
“아, 오셨어요?”
그러고는 수통을 열어 물을 마셨다.
아티아의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카수스의 눈길도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