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분명 뭔가 있는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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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분명 뭔가 있는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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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분명 뭔가 있는 듯한데
2023.01.21.
하이데거는 꽤 오래전인 마지막 12축제를 떠올렸다.
그때 카수스의 나이 열셋, 레오는 아직 어린 아기였다.
하이데거에게 마지막 12축제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아내가 레오를 낳고 고생하다 숨을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기가 하필 12축제와 겹쳐, 하이데거는 그때의 축제를 대폭 축소시켜버렸다.
본래라면 공작이 직접 공작령 곳곳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에게 격려의 인사를 건넸어야 했거늘.
하이데거는 아내를 잃었다는 슬픔을 못 이기고 모두 생략한 것이었다.
12년에 한 번뿐인 12축제에 큰 기대를 가졌던 공작령 백성들은 그 당시, 적지 않게 실망했다.
하이데거는 하이데거대로 슬픔을 떨치기 위해 더욱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또다시 ‘축제’라는 단어를 마주한 지금.
잊고 있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하이데거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 * *
케샤는 아티아의 머리를 빗기며 끊임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어쩜, 우리 마님은 머릿결도 이리 비단결 같으실까?”
아티아의 결 좋은 은발이 엉킴 하나 없이 술술 빗겨 내려갔다.
케샤는 자신의 빗자루 같은 머리칼과 비교하며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칭찬 고마워, 케샤. 너도 예뻐.”
“아니에요, 전 일개 빗자루일 뿐인걸요.”
케샤가 주눅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티아는 눈가를 휘며 장난스레 말했다.
“잘됐네, 빗자루 값 아끼고. 좋지, 뭐.”
“아, 마님!”
아티아의 농담에 케샤가 삐진 척 대답했다.
“하하! 그렇다고 내 머리털 뽑진 마라.”
“아니, 제가 어찌 그럽니까.”
그때 갑자기 케샤가 뭔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맞다! 마님, 그거 아시죠?”
“응?”
“12축제가 한 달도 남지 않았단 거!”
아티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12축제?”
“어머, 모르셨구나.”
소설 속에 워낙 많은 요소가 나왔어야지.
고민하는 아티아의 머릿속에 <전장에 피는 꽃>의 한 대목이 스쳐 지나갔다.
‘축제’라는 단어와 함께.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잠깐 나오긴 했던 거 같네, 축제 그거.
하지만 여기서 아는 척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
아티아는 처음 들어본 척하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응? 모르는데?”
“그러고 보니 마님은 남부 출신이셔서 모르는 게 당연하겠네요. 12년마다 한 번씩 웰링턴 공작령에서만 열리는 축제라서.”
케샤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옛날 일을 떠올렸다.
“제가 엄청 어렸을 때였나. 그때 했던 거 같은데……. 저도 기억이 잘 안 나긴 해요. 근데 저희 어머니 말로는 공작령에서 가장 큰 축제래요.”
“그래?”
“네, 다들 그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어요.”
“축제 때 뭘 하는데?”
아티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음, 제가 알기로는, 폭죽도 터트리고 신나게 춤도 춘다던데요.”
“오호.”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 열렸던 12축제는 별로 즐겁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잉?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저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요, 그때 하필 선대 공작부인께서 돌아가셔서 그랬다고…….”
케샤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케샤가 자신의 입을 툭툭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티아는 스치듯 읽었던 부분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12년 전의 12축제 당시.
선대 공작이었던 하이데거는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 묻혀 있었다.
그래서 공작령의 모든 백성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12축제를 대폭 축소했고, 이 때문에 12년간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백성들에게 큰 원성을 샀다고.
게다가 이 축제는 북부에 위치한 웰링턴 공작령의 풍요와 평화를 기리는 중요한 행사였으므로.
‘음, 원작에서 올해의 12축제가 어떻게 진행됐더라.’
아티아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고심했다.
소설에서는 이번 12축제 때 하이데거는 없었고, 카수스가 혼자 축제를 진행했다.
공작령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삶을 보고 직접 말을 건네는 것 또한 축제의 일부였으니까.
하지만 그 역시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는데.
‘아, 그래! 원작에서는 이쯤에 땅 투자를 잘못해서 재산을 날려먹게 되지.’
가뜩이나 12년 전의 12축제에 불만이 컸던 공작령의 백성들이었다.
재산을 크게 잃은 카수스는 상대적으로 축제에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었고.
눈앞에 닥친 커다란 일에 신경 쓰느라, 카수스는 웰링턴 공작으로서 공작령 백성들의 기대를 또 한 번 무너뜨리게 된다.
결정적으로,
12축제의 실패는 이후 황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카수스의 평판을 보다 쉽게 망가뜨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으니까.
“다 됐어요, 마님.”
케샤가 아티아의 머리 손질을 마치고 화장대 앞의 거울을 가리켰다.
“거울 좀 보세요, 마님. 어떠세요? 오늘은 붉은 리본으로 포인트를 줘봤어요.”
긴 하이포니테일 은발에 앙증맞은 붉은 리본이 장식으로 올라갔다.
아티아는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뭘, 이런 걸……. 움직일 때마다 달랑거릴 거 같은데.”
“에이, 마님도. 그래서 일부러 작은 걸로 했죠.”
케샤는 장신구라고는 일절 하지 않는 아티아를 보며 항상 아쉬워했다.
저렇게나 눈부신 미모를 가졌으면서 어째서 당최 꾸미시질 않는지.
다른 귀족들처럼 고급스러운 드레스에 화려한 장신구를 두른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케샤였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운동 외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꾸미는 건 고사하고 화려한 드레스는 거추장스럽다고 말하기 일쑤였으니.
그래서 이렇게 작은 포인트라도 달아보는 게 케샤의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다.
“너무 깨발랄한데?”
아티아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음, 뭐…… 괜찮은 거 같기도?”
“헤헤, 그렇죠?”
케샤가 활짝 웃음 지었다.
* * *
‘여길 다 사들이겠다고?’
조금 전, 카수스는 황무지 땅에 투자하라고 제안을 받았다.
아버지 하이데거에게서.
살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그 광활한 네이피트 지역을,
그것도 절반도 아니고 아예 모조리 사버리자 하시니.
그렇지만 이제까지 하이데거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다. 거의.
탁.
탁.
탁.
카수스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네이피트 지역마저 다른 이에게 매수권이 넘어갈 터.
사각. 사각.
카수스는 고민을 끝내고 펜을 들어 네이피트 지역 전부를 매수한다는 서류에 사인했다.
털썩.
서류 발송까지 마치고 잠시 쉬기 위해 카우치에 몸을 누였다.
딱딱한 의자와는 다른 푹신한 쿠션감이 느껴졌다.
카수스는 온몸을 감싸는 이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푹신한 소파라도 한계가 있는 법.
뻐근한 등 뒤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누군가 꾹꾹 눌러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더욱 시원할 텐데.
문득, 아티아가 생각났다.
곱게 눈을 접어 미소 지으며 할 말 다 하는 그녀가.
“빌어먹을.”
카수스는 저도 모르게 속된 말을 흘렸다.
초야 이야기를 꺼내자 곧바로 새하얗게 질렸던 아티아.
머리가 아프다며 비틀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픈 줄 모르고 그런 소리나 했다는 게 카수스는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정말 아픈 게 맞을까.
<아티아 보고서>에는 큰 병을 앓고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병이 무엇인지 원인을 알아야 해결할 것 아닌가.
하여, 정밀진단을 받게 했던 것인데.
결과는 ‘아무 이상 없음’이었다.
혹시 몰라서 첫 번째 의원이 떠난 뒤, 또 다른 의원들을 불러 아티아의 방으로 보냈다.
하지만 진단 결과는 모두 같았다.
큰 병도, 별다른 이상도, 안 보인다고.
공작저의 의원들은 펠른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일류였으니 그들 모두가 잘못 판단했을 리도 없다.
‘분명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뭔가가 있을 텐데.’
카수스는 본디 의심이 많아 아무도 믿지 않는 남자.
당연히 수상한 냄새를 맡는 덴 귀신이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것이 없으므로 좀 더 두고 보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우.”
카수스는 복잡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며, 두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혔다.
* * *
펠른제국 황실.
“폐하, 서신이 왔습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황금관을 쓰고 보석으로 치장된 거대한 황좌에 앉아 있는 황제, 델루만.
황좌를 가릴 만큼 커다란 풍채를 자랑하는 델루만 황제는 펠른제국 최고의 권력자였다.
서신을 살피던 황제의 입가가 씰룩였다.
금과 은이 섞인 오묘한 빛을 내는 서신이 그의 손안에서 반짝였다. <웰링턴 공작가 염탐 보고서>가.
이 서신에는 웰링턴 공작가의 최근 행보가 쓰여 있었다.
황금 땅인 바렐 지역을 포기하고 온통 황무지인 네이피트 지역을 통째로 사들였다는 내용이었다.
델루만 황제는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한 놈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판단력이 죽었나.”
황실과 웰링턴 공작가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황실도 웰링턴가도, 물자 확보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황제가 강대국에 공녀 제도를 도입하자 주장한 것 또한 웰링턴가에게 압박을 줄 심산이었으므로.
대외적으론 가장 강력한 대제국 케라시안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척하며, 다른 이득을 취하기 위해.
탁. 탁. 탁.
델루만 황제가 황좌 팔걸이에 손가락을 두들겼다.
“어째, 좀 덥군.”
황좌 양옆에 서서 백조깃털 부채로 부채질을 하던 시종들에게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더욱 강하고 빠르게 팔을 흔들며 부채질을 했다.
“얼음을 가져오겠습니다.”
한 시종의 말에 델루만이 그러라며 손짓했다.
그러고는 발받침대에 발을 올려놓은 채 서신을 계속 읽었다.
“흠.”
델루만의 머릿속엔 웰링턴 공작가를 어찌 몰락시켜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펠른제국은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 중 하나로, 구태여 다른 나라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즉, 최강대국 케라시안를 위해 공녀를 바치자고 주장한 것은, 또 다른 꿍꿍이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웰링턴가의 성향을 잘 알았던 델루만 황제는 이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곧, 놈들이 미끼를 물 것이다.’
어차피 웰링턴 공작 카수스가 공녀 제도를 반대할 것이 극명했기에.
녀석들을 천천히 몰락시키기 위한 술수였다.
“전에 샀던 바렐 지역, 그 근처까지 전부 사들여.”
<웰링턴 공작가 염탐 보고서>를 전달한 신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타국 상인들이 매수에 동의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도해보겠습니다.”
이 상인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땅을 매매하는 타국 사람들이었기에, 아무리 델루만 황제라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델루만이 코를 씰룩이며 말했다.
“두 배, 아니 네 배를 준다고 해.”
“예?”
신하가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델루만이 다시 팔걸이를 탁, 탁, 두드리며 말했다.
“그것도 싫다면 피를 봐야겠지.”
욕심 많은 델루만은 바렐 지역만으로도 모자라, 그 일대까지 싹 다 먹어치울 셈이었다.
가장 약해질 때 공격한다.
멍청한 카수스가 잘못된 판단을 하여 허덕이고 있을 때야 말로 기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