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버님, 궁금해요!
(40/73)
40화. 아버님,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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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아버님, 궁금해요!
2023.02.15.
선대 공작 하이데거는 꿈을 꿨다.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그였지만 그날따라 유독 꿈이 생생했다.
오래전, 잊어버리려 했던 과거가 다시금 눈앞에 떠올랐다.
“흐음…….”
눈이 부실 정도로 쏟아지는 하얀 빛.
그 빛을 따라가 보니 가녀린 외형과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아내였다.
자신의 아내가 꿈에 나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초승달 같은 눈썹.
살짝 처진 눈으로 짓는 환한 눈웃음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이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하이데거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눈앞에 두고서 놀라 입을 벌렸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오래전 사망했던 아내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눈, 코, 입, 머리색 어느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마지막 기억 속에 남았던 모습 그대로.
“레…….”
하이데거가 소리 내어 아내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아내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걸 보는 순간, 목이 메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을 때.
하이데거를 인도한 새하얀 빛이 선대 공작부인의 온몸을 감쌌다.
“헛!”
아내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하이데거는 잠에서 깼다.
하이데거는 뻗었던 손바닥을 펼쳐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아…….”
이렇게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끼익.
창문을 열자 찬 밤공기가 들어왔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달이 보였다.
아직 새벽이었다.
“후.”
하이데거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귀족 중에는 아내를 여럿 두는 자들이 많았다.
특히 높은 직위일수록.
하지만 하이데거는 한평생 오직 단 한 명의 부인만 두었다.
‘레나.’
강인한 신체를 가지고 있던 하이데거와 달리 아내 레나는 무척이나 몸이 약했고 북부의 거센 추위를 힘들어했다.
그리고 레오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녀가 남편을 찾다가 눈을 감았을 때, 하이데거는 전쟁터에 있었다.
그는 임종을 곁에서 지키지도 못한 채 아내를 떠나보냈다.
그 탓에 하이데거는 아내를 비롯한 가족에게 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가족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그랬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내가 죽어가며 남긴 두 아들.
어느새 장성한 첫째 아들, 카수스 그리고 열세 살이 된 둘째 아들, 레오.
아들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탓일까.
보이지 않는 부자간의 벽이 생겼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이길 수 있는 싸움이란 싸움에는 모조리 임했다.
하이데거는 그 혈기를 모조리 피 흘리는 데만 썼던 걸 후회했다.
그러나, 그 덕에 많은 영토와 물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막대한 재산과 권력.
일찍이 아내를 여의고, 자식이라고는 고작 두 명인 그와 혼인을 원하는 가문들이 속출하는 건 당연지사.
거기에 더해 여심을 빨아들이는 미친 외모까지.
제국의 모든 가문이란 가문은 한 번씩 찔러보는 게 관례일 정도로 하이데거의 인기는 대단했다.
황실과 웰링턴가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혼담을 넣는 일은 암암리에 진행됐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부인을 여럿 거느리던 여느 귀족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들과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식사를 함께하는 것조차 어색해진 사이가 되어버렸으니까.
하이데거로서는, 지금이라도 아들들과 관계 회복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뿐.
“후우우…….”
하이데거는 어슴푸레한 창밖의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티아는 레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북부의 거센 추위에 약한 것도 그랬고, 유독 몸이 약한 것도 그랬고.
여러 날을 관찰한 결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직 온전히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처음에는 아티아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 했던 하이데거였다.
그러나 어느새 그녀를 ‘며늘아가’라고 부르며 공작저의 식구로 인정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아티아가 마사지를 해준다며 하이데거의 집무실로 방문했다.
그는 바쁘다며 며느리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했다.
하이데거 자신도 그리 냉정히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건 하이데거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그녀의 진찰을 위해 의원이 다녀갔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는 말이다.
* * *
그날 아침.
아티아는 자신의 희고 가녀린 왼팔 팔뚝을 오른손 엄지와 중지로 감아보았다.
‘여전히 얇다.’
나뭇가지처럼 조금만 힘을 가해도 부러질 듯이.
원체 뼈대가 얇고 근육이 붙지 않는 몸이라 운동할 맛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푸우우…….”
저절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나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군.’
같이 운동했던 케샤도 일자복근이 생긴 마당에, 자신은 복근은커녕 거의 모든 게 제자리였다.
체력이 분명 늘긴 했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 너무 더딘 결과였다.
아무리 불굴의 의지를 지닌 아티아라지만 이런 상태는 좀 심각했다.
‘아오, 원래 운동은 몸이 커지는 재미로 하는 건데.’
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매끈하게 뻗은 여성스러운 곡선.
에스트로겐의 집합체인 아티아의 몸은 어떤 옷이건 모델처럼 소화시키기 좋은 체형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악마와 거래해 평범한 몸을 얻고 싶었다.
멸치부터 시작해도 되고, 뼈를 깎는 고통이 들어도 상관없다.
다만. 운동 효과가 확실히 났으면 좋겠는데.
이대로 가다간 제자리걸음일 터였다.
‘안 돼……. 이대론 안 되겠어.’
아티아는 큰 결심을 한 듯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똑똑똑.
아티아는 곧바로 하이데거 집무실에 방문했다.
한 손엔 마사지오일을, 다른 한 손엔 하이데거가 즐겨 먹는다는 설향딸기차를 들고서.
“아버님, 많이 바쁘신가요?”
문밖에서 들리는 아티아의 목소리.
하이데거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집무실 안쪽을 들여다보는 아티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이데거가 바쁜 정무를 탓하며 또 거절할까 싶어 아티아는 배시시 눈웃음부터 지었다.
그리고 문 틈새로 마사지오일과 설향딸기가 든 티포트를 들어 보였다.
“쨔잔~.”
하이데거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간 잘 지냈느냐.”
낮고 중후한 하이데거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아티아는 침을 삼키며 활짝 웃었다.
“아버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
하이데거는 아티아가 들고 있는 마사지오일과 설향딸기 티포트를 쳐다봤다.
그가 보기에도 아티아는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찾아온 것 같았다.
하이데거는 간밤에 아내의 꿈을 꾼 탓에 마음이 어수선했다.
하지만 시간을 내달라는 며느리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래, 알았다.”
아티아는 하이데거의 마음이 바뀔세라 호다닥 집무실로 들어갔다.
탁.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아티아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아버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아티아는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 톤, 아니 두 톤 더 높여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근처에 보이는 테이블에 티포트와 마사지오일을 올려두었다.
“나야, 뭐 똑같다.”
동시에 하이데거는 벌써부터 고민이 되었다.
그녀가 또 뭔가를 해주려고 한다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그래, 아픈 덴 없고?”
“네, 네, 전 괜찮아요. 건강하니 걱정 마세요.”
아티아가 혈색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티아는 하이데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보기만 해도 웅장한 기운이 마구 솟구친다.’
못 본 새 하이데거의 어깨가 또 넓어진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길래 어깨가 자꾸 자라는 걸까?
어깨 성장 전용 보충제라도 먹나?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야…….’
아티아가 하이데거를 찾은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비법을 고스란히 전수받기 위해서였다.
전에는 겉으로 훑는 정보밖에 얻지 못했지만, 오늘은 본격적으로 그에게 비법을 물어보리라.
“아버님, 혹시 훈련장에 가 보셨어요?”
“훈련장?”
“네.”
하이데거는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다, 따로 시간 내서 가지는 않았는데.”
“예? 그럼 몸 단련은 언제 어떻게 하는 건지요?”
저 몸이 아무것도 안 했을 리가 없어.
타고난 거야 당연하겠지만, 그 뒤로 어떤 훈련이 가해지지 않으면 절대 유지할 수 없는 몸매다.
아티아는 그 비법이 몹시도 궁금했다.
하루빨리 이 종잇장 같은 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감옥보다 이 몸에 갇힌 것이 더욱 한탄스러울 정도였으니까.
아티아는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참으로 궁금합니다.”
하이데거는 아티아가 왜 이런 걸 묻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집무실과 방을 왔다 갔다 하는 것 외엔 딱히 하지 않았던 것 같군.”
“예?”
놀라운 대답이었다.
흥분한 아티아는 물음표 살인마가 되어,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모두 묻기 시작했다.
식단과 따로 보충제 같은 걸 먹지는 않는지, 아니면 자고 있을 때 근육이 유지되는 마법이라도 쓰는 건지.
그러나 하이데거는 별다른 루틴 없이도 저 몸을 유지하는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아티아는 여태 자신이 품어왔던 모든 상식이 깨져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와…….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나는 이렇게 오늘내일하는 몸으로 만들어놓고.
역시 인간은 조물주의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건가.
전생의 강지하는 피나는 노력의 대명사였다.
아티아는 마치 자신의 오랜 노력과 가치관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이데거야말로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조건을 이길 수 없다’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인이었기에.
“며늘아가는 몸 단련에 관심이 많나 보구나.”
하이데거가 넌지시 물었다.
아티아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아버님 몸처럼 되고 싶거든요!”
“음?”
하이데거는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아티아는 진심이었다.
하이데거 역시 처음엔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티아의 눈빛과 수많은 질문은 그녀의 진심을 전해주었다.
진심은 통한다던가.
원체 허약한 몸이다 보니, 오히려 어떻게든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아티아에게 하이데거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나 보군.’
하이데거는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입을 뗐다.
“굳이 따지자면.”
“……?”
“가끔 몸 푸는 동작은 한단다.”
“몸 푸는 동작이라면? 어떤 거 말씀이세요?”
아티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찌나 눈을 빛내는지 하이데거는 동작을 안 보여주면 평생 죄책감을 가질 것만 같았다.
“이런 것도 네가 말하는 몸 단련에 포함되는지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