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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내게 몸으로 병을 옮겨 (70/73)


70화. 내게 몸으로 병을 옮겨
2023.05.31.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가라앉을 듯 낮은 음성.

달빛을 받은 카수스의 얼굴이 너무 심각하게 잘생겨서, 아티아는 황급히 눈알을 돌렸다.

똑같이 마주 보고 있다간 큰 사달이 날 것 같았기에.


‘휴……. 침착하자. 진정해, 심장아.’

뭐가 저래 잘생겼나.

어둡고 남녀 둘만 있는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하기 나름이었다.

원래라면 낯간지러운 감정 따윈 생기지 않을 거라 여겼을 텐데.

하지만 막상 카수스와 동침해보니 그렇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 아티아였다.

첫 키스했던 감각도 절로 떠올라 입술이 홧홧해졌다.

아티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뜨거운 열기가 손끝에 느껴졌다.

눈을 살짝 굴려 옆으로 쳐다봤다.

카수스가 아직 저를 바라보는 듯했다.


“……공작님?”

아티아는 괜히 어색해져서 그를 불렀다.


“왜?”

역시나 낮은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아티아는 헛기침을 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투가 딱딱해졌군.”

“딱, 딱이요? 제 말투가 말입니까?”

“뭐야, 군기가 바짝 든 신입 기사도 아니고.”

“…….”

아티아는 말없이 침을 꼴깍였다.

카수스는 팔로 제 머리를 받친 채 아예 아티아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는 천장을 향해 두 눈을 홉뜨고 있는 아티아의 부드러운 은발을 매만졌다.


“부부가 된 지 꽤 됐지만 이렇게 둘이 자는 건 처음이군.”

“그, 그렇지 말입니다!”

“응?”

카수스가 미간을 좁히며 코웃음을 쳤다.


“왜…… 웃으십니까.”

“이렇게 둘이 누워 있는 게 좋아서.”

“네?”

“이토록 좋은 걸 왜 이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잖아.”

커다란 손으로 아티아의 머릿결을 만지는 손길이 퍽 부드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댈 신경 썼어야 하는데.”

“하하, 그러게요.”

카수스는 미안한 마음에 아티아를 제 품속에 끌어안았다.

작은 체구의 아티아가 그의 품에 쏙 안겼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부족해서 그댈 챙기지 못했어.”

갑자기 카수스가 훅 들어오는 바람에 아티아는 등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하하…….”

웃어야 할지,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티아는 그냥 웃었다.

그러자 카수스는 더욱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아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에 잘 때도…… 애착인형을 끌어안고 자나?’

아티아는 자신이 커다란 곰 인형이 된 것 같았으나, 이 상황이 싫으면서도 좋은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카수스는 아티아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얇은 네글리제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카수스의 손이 움직였다.


“그대의 병을 내게 옮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중저음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애달프게 들렸다.


“……그러지 마요.”

“아프지 말고 조금만 견뎌줄 수 있나.”

카수스의 목소리만 들어도 아티아는 몸에 깃든 흑마술이 살살 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저 인간은 왜 달콤한 말을 지껄이고 난리야? 적응 안 되게.’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쿨럭.”

그 바람에 아티아는 카수스의 품에서 밭은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아파?”

“아, 아뇨. 쿨럭, 전 괜찮아요.”

전생의 강지하는 아무 데서나 자도 괜찮았었다.

하지만 현생의 아티아는 환경이 조금만 달라져도 몸이 말썽이다.


‘각혈할 느낌은 아닌데. 잔기침이 계속 나오는군.’

여기에 미세먼지가 많은 건지는 몰라도 아티아의 기침은 한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에라이, 공기청정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사이, 연달아 기침해대는 아티아를 지켜보는 카수스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디 아픈 거야? 당장 의원을 부르지.”

“아뇨, 잠깐만요. 부르지 마세요. 각혈할 것 같진 않으니까.”

아티아가 말렸다.

카수스와 단둘이 있는 공간에 다른 이를 부르는 게 싫었다.

그리고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냥 여긴 처음이라 잔기침이 나오는 것뿐이에요. 곧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 말대로 잔기침은 곧 멎었다.

하지만 카수스는 금방이라도 아티아가 죽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가 북부에서 여기 수도까지 오는 데는 수없이 많은 현실적 검토가 필요했다.

사실, 오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하지만 아티아의 건강 상태를 보며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판단한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황궁이었다.

어느새인가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는 아내인 아티아의 건강을 우선시하게 된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아티아가 제 인생에 스며들었고.

이를 깨달은 이상 카수스는 결코 아티아를 잃을 수 없었다.

카수스는 아티아의 등을 쓸던 손을 멈추고는, 살짝 걸쳐져 있는 네글리제를 그녀의 어깨까지 끌어내렸다.


“으음?”

아티아는 난감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리 와. 혹시 내게 조금은 옮겨 올지도 모르니.”

“네?”

“흑마술과 관련된 기록들을 죄다 찾아봤어.”

“기록이요?”

“그래, 흑마술에 걸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에 접촉해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어. 기록일 뿐이긴 하지만.”

카수스가 흑마술에 대한 의구심이 든 이후, 관련한 정보를 파악하다 습득한 내용이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목숨을 부지했다는 결과였다.

카수스의 낮게 깔린 음성이 아티아티아의 귀에 내려앉았다.


“나와 몸을 접촉하면 뭔가 달라질지도 몰라.”

“……네?”

카수스는 진심이었다.


‘아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텁.

아티아는 네글리제를 끌어내리고 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두툼한 팔뚝이 아티아의 얇고 흰 손목과 대비됐다.

아티아는 카수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달빛을 받은 그의 잘생긴 얼굴.

짙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청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가만히 보니 색기가 넘치는 눈빛이기도 했다.


‘안 돼.’

이 분위기는 위험했다.

아티아는 고개를 돌렸다.


‘남의 집에서 낯간지러운 짓을 할 순 없어.’

아무리 둘이 같이 자게 되었다한들.

아티아는 카수스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지금 상황에서 눈을 마주치면 또 무슨 사달이 일어날지 몰랐기에.

아티아는 자신이 없었다.

저 훌륭한 테스토스테론을 감당할 자신이.

카수스가 어디서 뭘 듣고 와서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상은 위험했다.


“공작님, 잠시만요.”

“음?”

“저 너무…… 피곤해요, 그만 자고 싶어요…….”

“아.”

 

 
자극하지 말라는 아티아의 말이 카수스의 귀에는 ‘몸이 피곤하니 그만 자고 싶다’로 들렸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이불을 아티아의 목 아래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미안하다, 내가 무슨 짓을.”

“…….”

“잘 자.”

“네, 잘 자요……. 공작님.”

 

* * *



“쿨-.”

부부가 처음으로 함께한 잠자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카수스와 달리 아티아는 어느새 곯아떨어져 있었다.

초야인 셈이지만, 그야말로 잠만 자고 아무 일이 없는 밤이었다.

아티아는 잠결에 뒤척이다 이불을 저 멀리까지 차올렸다.

이불이 저 멀리 떨어졌다.


“아주 고약한 잠버릇이로군.”

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에 카수스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불을 집어 다시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러고 나니 이제 정말 가족이 된 것 같았다.

함께 지내고,

함께 자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카수스는 아티아와 조금 더 오래 함께 지내고 싶었다.

사람의 수명을 인간의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잠든 아티아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가 멀어졌다.

짹짹짹.

어느덧 날이 밝고 창밖으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확실히 북부의 아침과는 달랐다.

새소리도, 공기도.

카수스는 뜬눈으로 밤을 보냈으나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아티아와 함께한 첫 아침은 남다른 감상을 안겨주었고, 몸은 오히려 더 개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밤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카수스는 당분간 깊이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 *



“이번 사냥대회는 모든 이목이 쏠려야 할 거야.”

“그렇습니다. 이번엔 규모를 더욱 키우심이.”

한편 델루만 황제는 오웬과 최측근 대신들과 작당해 북부의 웰링턴 공작을 망신 줄 참이었다.

그렇다면 많은 이의 관심을 모을수록 유리했다.

어차피 승리는 황실의 것이 확실하니까.

오웬은 이번 사냥대회가 더없이 기다려졌다.


“이곳의 지리와 특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지.”

탁상을 두드리며 하는 오웬의 말에, 델루만은 희끗한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을 얹었다.


“더군다나 카수스 웰링턴 공작은 사냥대회에 한 번도 참가한 적 없다 들었다.”

“그래서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깨닫지 못하나 봅니다. 제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맞받아치던 공작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많은 이들이 보고 있었으니 허풍을 떨 수밖에 없었겠지.”

“허세는.”

오웬이 혀를 끌끌 차며 카수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날카로운 청안에 적개심 가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그를.

공작은 결코 좋은 의도에서 황궁을 온 것이 아닐 터였다.

말로는 오랫동안 황궁을 찾지 않아 모습을 내비친 거라 하지만, 축제 때 독화살을 날린 이후 갑자기 방문한 거니까.

황실이 공녀 제도를 강행하는 것,

황태자와 황실이 공작령을 멋대로 침입해 백성들을 언제든 해할 수 있다는 불안감,

아마도 그 두 가지 원인이 웰링턴 공작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돌렸을 것이다.

황궁의 분위기를 살피고, 앞으로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

그게 아니고서야 다른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공작이 공녀 제도를 반대하느라 애쓰고 있다지.”

때마침 오웬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델루만이 말했다.


“공작령 백성들을 정말이지 끔찍하게 아끼는군. 아내를 데려온 것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쓸 용도겠지.”

“아내가 당한 일에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당연하지. 제 부인이 망신당하는 건 자기를 욕 먹이는 일이거든. 누구라도 공작의 입장이 되면 똑같을 거야.”

오웬이 테이블 위에 놓인 초록색 청포도 한 알을 씹어 먹으며 웰링턴 공작부인을 떠올렸다.

황태자로서 평생 수많은 미인을 수도 없이 봐온 오웬이었다.

그러나 공작부인에게서는 이전에 본 적 없는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물론 아름다운 외모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어딘가 눈길을 끄는, 그런 여인이었다.

아직은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 기회를 노려 말을 몇 마디 섞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만큼 오웬은 그녀가 흥미로웠다.

오웬은 청포도에서 손을 거두고 델루만을 바라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가 원하는 걸 절대로 얻지 못하게 할 겁니다. 여기 온 걸 후회하도록 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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