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올해 겨울엔 내가 가야지
(11/65)
11. 올해 겨울엔 내가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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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올해 겨울엔 내가 가야지
2022.12.07.
디딤돌을 올라 선 태석규가 조용한 복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외곽에 동떨어져 있는 작은 규모의 한식당인 리원은 태석규 회장이 밀담을 나눌 일이 생길 때마다 다른 손님은 일절 받지 않았다.
“근처는 전부 비웠겠지.”
“네, 회장님.”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쩡거리지 못하게 해.”
언제 어디서나 태 회장의 곁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조 실장이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오셨어요.”
원목으로 틀이 짜인 창호문을 직접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초조한 낯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김석현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인사를 마친 태석규는 재킷을 벗고 앉아 느긋한 자태로 신선로부터 뒤적였다.
“제가 이 시간까지 점심을 못 먹었습니다. 형님이 앉아 계실 땐 그저 좋은 자리겠거니 했는데, 무슨 업무가 이리 많은지. 김 대표님도 어서 드시죠. 여기 산더덕찜이 아주 일품이에요.”
“딸아이가 태 전무 집에 들렀다가 앓아누웠어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사람을 붙이겠다고 했을 때 뭐라고 하셨어요. 그쪽에서 잘 단도리 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느닷없이 집무실로 달려온 소예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서윤을 봤다는 말을 반복했다.
일을 주도하진 않았다고 해도 어찌 됐든 공범이었으니 심적인 압박을 견디긴 힘든 모양이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죠. 이쪽, 저쪽에서 사람이 붙으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눈치를 채기 마련입니다. 구세준 사장이 알아서 처리할 거예요.”
“그런 무식한 작자가 무슨 일을 한답니까. 저는 회장님을 믿고 도와 드린 겁니다.”
“무식하니까 맡겨야죠. 일단, 그 아이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확인을 했어요.”
“태 전무가 알게 되면요, 감당이 되겠습니까?”
석현의 좁은 가슴팍이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얼굴이 뜨겁고 안달이 나는 것을 보니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연이어 마신 술이 되려 역효과를 낸 듯싶었다.
“처음부터 리스크를 안고 진행한 일입니다. 4년 동안 따님이 태 전무 곁을 차지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말이죠.”
“근본도 모르는 여자애 하나 죽었다고 이렇게까지 무너져 내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때의 선택이 조금 후회가 되었다. 태석규 회장의 제안에 따라 사고를 처리하면 태강현을 오롯이 딸의 짝으로 붙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태강현을 사위로 얻지도 못하고 4년이라는 허송세월을 흘려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억울해 가슴을 치는 상황에서 살얼음판까지 걷게 생겼으니 이성을 또렷이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강현이에겐 가족보다 특별한 아이였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서윤을 죽인 건 구세준이에요. 우린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태석규가 백자기로 빚은 주전자를 잡아 올렸다.
조르르, 얇은 줄기가 김 대표의 잔을 넉넉히 채우고 잦아들었다.
“구세준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카드란 걸 잊지 마세요.”
건배를 하기 위해 부딪힌 사기그릇이 경쾌한 소리를 울리자 뱀처럼 가늘어진 눈이 이채를 품었다.
무슨 일도 해낼 것 같은 독살 맞은 시선을 마주한 김석현이 작은 안도를 섞은 탄식을 토해냈다.
“전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석규가 다시 주전자를 들었다.
조카인 강현이 뒤늦게 사실을 깨닫는다 한들, 회장 자리에서 신임을 받은 지 오래된 저를 이겨먹을 힘은 없었다.
* * *
지안의 의료기록을 꺼내 보려다 보기 좋게 실패한 석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서도 수십 번 고민을 거듭했다.
보고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싶으면서도 나락에 처박힌 상사를 꺼낼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확실히 뭘 숨기는 것 같은데.”
석원은 현관문 앞에서 좌우로 움직이며 쉽사리 도어락을 누르지 못했다.
“어? 실장님.”
“……퇴근하십니까?”
“네, 할 일도 없고 모시는 분께서는 얼굴 좀 치워달라는 속내를 팍팍 드러내셔서 일찍 들어가려구요.”
“그렇군요. 저, 서지안 씨.”
“네?”
“아뇨, 아닙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지안이 겪은 사고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을 본인에게 털어놓기도 힘들었다.
“실장님, 저 혹시 회사로 출근해도 될까요? 전무님도 그러라고 하시고 저도 일은 배워야 하잖아요.”
“네, 그렇죠. 알겠습니다, 전무님께 다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업무를 볼 수 있게 된 지안은 그저 해맑게 복도를 떠났다.
거듭 한숨을 내쉬던 석원도 결국 현관을 넘었다.
“전무님.”
가볍게 침실 문을 두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현이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로.”
“서지안 씨에 관해서 조금 알아봤는데요.”
머뭇거리는 도 실장을 등진 강현은 별다른 반응 없이 냉장고 홈바를 열어 우유를 꺼냈다.
“4년 전에 병원에 있었습니다.”
투명한 잔을 향해 기울었던 손이 잠시 허공에 멈췄지만, 이내 제 할 일을 이어갔다.
“실종 상태에서 발견된 경우여서 경찰 쪽에 남은 짧은 기록이었어요. 자세히 알아본 후에 전달 드리려고 병원 기록부터 받아보려고 했는데 막혔습니다.”
“막히다니.”
“외곽에 있는 개인 병원인데 트랜스퍼 기록도 내어주지 않더라고요.”
“주인 성질이 대쪽 같은가보군. 애초에 합법적인 일은 아니니까.”
“미리 주변까지 훑고 간 겁니다. 환자도 거의 없는 병원인 데다가 가끔 불법 시술도 한다고 하고. 동네 도박장에도 심심치 않게 드나들어서 빚도 꽤 되는 남자였습니다. 보상을 해주면 당연히 털어 놓을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원장이 서지안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입을 싹 닫았어요.”
그런 환자는 모른다고 말을 더듬다가 개인 정보를 보여줄 수 없다며 강경하게 태도를 바꾸는 원장은 확실히 의심스러웠다.
“서지안이 내게 의미를 갖는 건 서윤이의 쌍둥이기 때문이야. 유전자 검사를 해주길 기다리는 중이고 후엔 그 대가를 충분히 보상할 텐데 과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4년 전입니다. 그것도 같은 계절이요.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범인도 잡지 못했잖아요.”
“그런 우연이 생기려면 적어도 서윤이와 서지안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야겠지.”
“알고 있었을 수도…….”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서윤이를 이 집에, 저 침실에 가둬두었는데.”
강현은 자조를 끝으로 석원을 등졌다.
“전무님, 제가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석원아.”
“…….”
“서윤이는 죽었어, 내가 죽였잖아. 이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전무님!”
“생일만 잊지 않았어도, 삼십 분만 일찍 서윤이를 보러 왔어도, 사람을 붙이라는 전화를 걸 시간에 따라 나가기만 했어도, 서윤이가 차가운 흙에 묻히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지?”
강현은 매일 아침 서윤이 습관처럼 마시던 우유를 응시하며 단조롭게 죄를 나열했다.
“추위를 많이 타, 그러니 올해 겨울엔 내가 가야지.”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순 없지만, 서윤 씨는 이런 전무님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벌써 5년이 다 되어가요. 이젠 살아가셔야 한다고요.”
석원이 건조한 눈자위를 문질렀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강현에겐 성립되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삶의 의욕을 지워갔다.
무엇을 붙잡아서라도 그가 산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쌍둥이의 사고조차 별다른 자극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처럼 막막했다. 그를 되돌리려면 서윤이 살아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가.”
석원을 남겨두고 침실로 되돌아온 강현은 오밀조밀 모여 있는 서윤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서원가 사용인들이 찍어준 어릴 적 사진은 제법 있었으나 서윤이 독립을 한 후로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사진을 찍을 일이 없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더니.
증명사진을 확대한 영정만 남고 나서야 강현은 그 말의 의미를 여실히 깨달았다.
한 쪽은 죽고 한 쪽은 실종이라.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었으니 타고난 운명까지 닮은 건가.
멀쩡히 눈앞을 돌아다니는 여자와 같은 얼굴에서 한참 시선을 떼지 못하던 강현은 불안정하게 둥둥거리는 심장이 불쾌해 미간을 좁혔다.
서윤이 떠난 후에도 줄곧 평온해 제 기능을 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는데 뒤늦게 느껴지는 압박감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 * *
주요 계열사와 산업, 연구단지가 모여 있어 서원 복합단지라고 불리우는 엄청난 크기의 부지에 도착한 지안은 헤벌쭉 입을 벌리고 서원건설 정문을 지났다.
“역시 대기업.”
출근 시간에 맞춰 줄지어 게이트를 통과하는 직원들은 지안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강현의 집으로 출근할 땐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본사로 들어오니 정말 번듯한 직장인이 된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사원증 분실하셨나요?”
“아뇨, 전무실 신입인데 아직 사원증을 받지 못했어요.”
“전무실이요?”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지키느라 조금 멍해 있던 데스크 직원은 거의 잊혀져가는 직함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네, 도석원 실장님 찾아왔습니다.”
“어, 잠시만요.”
곧장 인터폰을 들어올린 여자는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고 투명한 출입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북적북적한 엘리베이터에 갇혀 자세를 바로 한 지안은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를 나서 두리번거리다 전무실을 찾아냈다.
“실장님!”
“오셨어요?”
석원이 벌떡 일어나 지안을 맞았다.
텅 빈 비서실에 홀로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는 모습이 약간 외로워보이기도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 뭐부터 하면 될까요?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안 씨, 제가 아직 전무님께…….”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고.
지안에 관련된 대화를 했음에도 정작 지안의 본사 출근 소식을 전하지 못한 석원이 말을 덧붙이려 할 때 요란한 벨이 울렸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편히 받으세요.”
“네네, 감사합니다.”
낯선 번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지안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
-태강현입니다.
“네, 네? 네, 전무님.”
-몇 시에 출근해요.
“예? 저 오늘 본사로 출근했는데요.”
지안의 갈색 눈동자가 석원을 향해 굴렀다.
-왜 그리로 갑니까.
“원하면 가라고 하셨잖아요.”
-아.
아?
지안은 여상히 돌아오는 답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미안해요, 지안 씨. 어제 정신이 없어서.”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울컥 솟는 억울함을 밀어낸 지안이 을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집으로 와요.
“지금요?”
-네.
뚝, 전화가 끊긴 후에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던 지안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소 닭 보듯 할 땐 언제고 하필 오늘 자신을 찾아대는 강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