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기억이 돌아오려나 봐요 (61/65)


#61. 기억이 돌아오려나 봐요
2023.05.31.


강현은 바쁜 일과 속에서 서윤을 등한시하면서도 그녀의 행동반경을 통제하는 데 쓰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강현에게 마음이 상한 서윤이 위치추적이 가능한 휴대폰 전원을 끄고 외박을 했던 다음날엔 말끔한 정장을 입은 두 명의 가드가 집 앞을 지켰다.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밖에 저 사람들 좀 데려가!”

발악하는 서윤을 무심히 일별한 강현이 슈트 재킷을 챙겨 입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한바탕 눈물을 쏟아 촉촉이 젖은 눈동자를 초조하게 굴리던 서윤이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았다.


“오빠, 오빠……. 멀리 가지도 않았어, 그냥 연주 언니네 있었던 거잖아. 한 번만…….”

서윤이 간절하게 슈트 끝자락을 붙잡았다.

사장님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자주 가는 동네 카페, 낯익은 아르바이트생이 웃으며 맞이해주는 가까운 편의점, 날씨 좋은 날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위해 가끔 들리는 서점.

지금까지 굳이 연락하지 않았던 짧은 동선까지 일일이 허락을 맡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먼저 약속을 어긴 건 태강현인데.

잘못을 빌고 있는 제 모습이 비참하긴 했지만, 무엇이든 아쉬운 쪽이 매달리게 되는 법이었다.


“한 달.”

“싫어!”

“한 달이라고 했어, 아무것도 하지 마.”

강현은 울먹이는 서윤의 손을 뿌리쳤다.

그 어느 때보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주변으로 핏발이 도드라졌다.

누군가에겐 고작 24시간일 수 있으나 난생처음 서윤을 잃어버린 강현에겐 24일처럼 긴 하루였다.

자신의 반응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서윤이 연주와 작당까지 하여 연락을 끊어버린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이런 일을 벌인 원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난 어차피 오빠 소유물이잖아. 오빠가 다 가졌잖아. 나한테 꼭,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문고리를 잡은 강현이 몸을 돌려 서윤을 직시했다.

되레 원망이 가득 담긴 시선을 마주한 서윤이 흠칫, 눈꺼풀을 떨었다.


“네가 나를 벼랑 끝에 세웠으니까.”

“겨우 하루였어.”

“그래, 한 시간이 아니고 하루였어. 네가 감쪽같이 사라진 하루 동안 내가 제정신이었을 것 같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밤새도록 나는!”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놀란 서윤의 어깨가 들썩이자 강현이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눈가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잇새를 악물고 잠시 서윤을 노려보던 강현은 쾅, 소리가 울리도록 문을 닫고 집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채로 주저앉은 서윤은 힘겹게 세운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강현의 구둣발에 채인 제 운동화와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가는 어깨를 들썩이며 설움을 털어낸 서윤이 발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침실로 향했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서윤은 그의 만행을 참다못해 식음을 전폐했다.

그렇지 않아도 유약한 몸뚱이는 끼니 몇 번 챙기지 않았다고 아주 정직하게 기절해 병실 침대에서 눈을 뜨게 만들었다.


“윤아, 이러지 마.”

“…….”

“오빠가 실수했어.”

강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시행착오를 인정했다.

외출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경호를 목적으로 운전기사나 가드를 보내고는 했지만, 그날 이후로 강현이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일은 없었다.

이별을 종용하기 위해 찾아오는 태석중 회장의 하수인들이 그에게 들키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긴 기다림과 짧은 만남은 여전했고 서윤은 서서히 말라갔다.

강현은 어느 날 문득, 서윤의 깡마른 팔과 눈에 띄게 두드러진 뼈마디를 인지했다.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별로.”

“하고 싶은 건.”

“없어.”

“가고 싶은 곳은.”

어차피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을 거면서.

서윤은 대충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없어.”

“없으니까.”

강현은 저를 외면하고 눈을 감는 서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조잘거리던 서윤의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번 주 주말에는 동물원에 가고 싶고 다음 주 주말에는 놀이공원에 가고 싶으니 시간을 좀 내라는 요구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선물한 제주도의 집에서 뒹굴면서 낚시를 하는 게 어떻냐고 묻지 않았고 누군가 SNS에 올린 화려한 호텔과 리조트 사진을 보며 부러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어렴풋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 * *

아침에 먼저 눈을 뜬 강현은 자신의 팔에 머리를 얹고 잠든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지안이 제 쪽을 보고 있어서 곤히 잠든 얼굴을 부족함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그녀가 온 집안에 커튼을 열어놓은 탓에 커다란 통창의 유리 너머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침실 곳곳에 얇고 굵은 선을 만들었다.

강현은 지안의 눈가로 손을 뻗어 성가신 햇빛을 가려 주었다.

지안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강현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가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들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이제라도 전부 해주고 싶은데 지안은 외출을 제안하는 족족 거절했다.

성치 않은 자신의 몸뚱이가 문제였다.

당장 트레드밀을 뛰어도 될 만큼 멀쩡하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지안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러그를 깔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자고 했던가.

일단은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지안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잘 잤어?”

지안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벌떡 상체를 세웠다.

강현과 같은 침대를 사용할 작정은 아니었다.

그를 재우고 나서 게스트룸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먼저 잠이 든 것으로 모자라 밤새도록 팔을 혹사시킬 줄이야.

병원에서도 그렇고 간호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전무님은요?”

“잘 잤지.”

지안은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베개가 되었던 강현의 팔을 주물렀다.


“팔……. 괜찮으세요?”

“괜찮아.”

“중간에 빼셨어야죠.”

“환자 취급 그만하고 애인 좀 시켜주지.”

훌쩍 몸을 일으킨 강현이 지안의 어깨를 밀면서 체중을 실었다.

맥없이 뒤로 넘어가 다시 눕게 된 지안은 천장을 가린 강현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뺨을 붉혔다.

강현의 아래에 깔려 있다는 자각을 하기 무섭게 어젯밤 소파에서 맴돌았던 열기가 순식간에 전신을 파고들었다.


“지안아.”

“네?”

“혹시 내가 이럴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왔어?”

그럴 리가.

그는 입원해 있을 때부터 꽤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냈다.

새카만 눈동자에 담기는 불순한 감각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둔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키스에서 그치지 않을 거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몇 가지 고리타분한 걱정을 하면서도 사실 가장 크게 자리잡은 건 기대였다.

완벽히 그의 여자가 되는 순간이 기다려졌다.


“했어요. 그런데 제가……. 기억하는 동안엔 전무님이 처음이라 많이 서툴러요. 어, 어제도 너무 딱딱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강현이 그렇게 멈추고 나서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지나치게 간단히 몸을 무르는 모습을 보며 혹시 그를 실망시킨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알고 왔으면 됐어.”

피식, 웃음소리를 흘린 강현은 헝클어진 지안의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단정히 넘겨주었다.


“예?”

“다른 건 내가 잘해.”

잘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부분은 눈을 감고도 모조리 찾을 수 있었다.

그만큼 서로에게 오롯이 새겨져 있던 사이였다.

예고 없이 고개를 숙인 강현이 헐렁한 잠옷 밖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목에 입술을 묻었다.


“아…….”

따끔한 감각에 미간을 좁힌 지안이 강현의 뒷덜미로 손을 밀어 넣었다.
 

 
생경하면서도 아찔한 입맞춤이 쇄골까지 이어졌다.

보드라운 살결에 더운 숨을 불어넣은 강현은 붉은 자국이 남은 곳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아침 먹자.”

“저 괜찮아요, 더 할 수 있는데…….”

겨우 이 정도에 맥을 못 추면서 하긴 뭘 해.

강현은 널브러진 지안을 번쩍 일으켜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4년을 참은 만큼 쌓인 것이 많았지만, 4년을 참았으니 조금 더 느리게 돌아가도 되었다.


“러그는 어디에 깔고 싶어. 바닥 전부?”

“러, 러그요? 무슨 러그를……. 아.”

이른 아침부터 혼을 쏙 빼앗긴 지안은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렸다.


“음, 현관 복도하고 거실이요. 전무님 방에도 깔면 좋을 것 같기는 해요.”

“그래, 사람 불러서 사이즈 재라고 할게. 트리는 아침 먹고 사러 가자. 또 필요한 건.”

“전무님, 그래도 실밥은 풀고 나서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거의 다 아물었어.”

“보여주시면 믿을게요.”

지안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또박또박 원하는 바를 전했다.


“보기 불편할 텐데.”

“괜찮아요.”

머뭇거리던 강현이 잠옷 끝자락을 잡아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상처 세 개가 아랫배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흉터를 처음 확인한 지안이 금세 눈꼬리를 붉혔다.


“눈물도 많지.”

어릴 적부터 그랬다.

앞에서는 씩씩하게 웃기 바빴고 구석에 숨어서는 꼭 이런 표정을 하고 울먹였다.


“안 울어요.”

강현은 삐죽거리는 입술이 귀여워 미소를 짓다가 지안을 끌어안고 토닥였다.

서윤을 울린 집안 사용인들을 잡아 족칠 시간에 이렇게 안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뒤늦은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그저 입안이 썼다.

* * *

강현의 아침 식사가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가볍게 세안을 마치고 나온 지안이 쌀을 씻어 밥솥에 부었다.

그다음엔 인덕션 아래의 수납장을 열어 깊숙이 숨겨진 편백나무 찜기를 꺼냈다.

위장에 좋다는 양배추와 브로콜리, 애호박과 버섯이 차례로 찜기에 담겼다.

그렇다고 풀만 먹이고 싶진 않아서 지방이 없는 한우 안심까지 얇게 썰어 곁들였다.

만족스러운 구성을 확인하고 찜기 뚜껑을 닫은 지안은 된장찌개 안에 넣을 두부를 찾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한 손에 두부를 들고 문을 닫으려다가 팬트리에 꽂힌 우유팩을 손에 쥐었다.

평소에 우유를 즐겨 먹는 편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입맛이 당겼다.

지안은 반투명한 유리잔에 우유를 담아 전자레인지 안에 넣었다.

전자레인지 내부의 백열전구가 환히 켜지면서 특유의 소음을 일으켰다.

우유가 데워지는 동안 된장찌개에 넣을 두부와 채소를 썰고 편백찜이 잘 되어가는지 확인하며 바쁘게 움직이던 지안은 제법 오래 열이 가해진 유리잔을 생각 없이 손에 쥐었다.


“아!”

손바닥을 누르는 뜨거운 열기에 화들짝 놀란 지안이 우유가 담긴 잔을 놓아버렸다.

퍼억-.

대리석 바닥으로 낙하한 유리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지안은 발치를 엉망으로 적신 우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자잘한 유리 조각을 주웠다.

하얗게 일렁이는 우유로 속을 적시며 바닥을 더듬는 지안의 눈꺼풀이 오르내리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언젠가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동시에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괴리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강현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붕붕 떠 있던 기분이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침잠했다.

깊은 수면 아래에 처박힌 것처럼 아득해진 머릿속에 뿌옇게 흐려진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천박해, 거머리 같은 계집애.

눈도 보이지 않는 여자를 피해 시선을 깔아 내린 지안이 흥건히 젖은 양손을 말아쥐었다.


“말해요, 헤어지겠다고. 어길 시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어린 나이에 상간녀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으면 이 말 꼭 지켜요.”

누구지, 누군데 나한테 이런 말을 해.

벌레가 발끝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서리친 지안의 손끝을 타고 툭툭, 하얀 방울이 흘러내렸다.

손발이 모두 우유 범벅이 되어버렸다.


“내가 치울 테니까 일어나. 왜 이러고 있어.”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욕실을 뛰쳐나온 강현이 지안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안 다쳤어?”

강현은 우유 범벅이 된 지안을 세심히 살피며 욕실로 되돌아갔다.


“전무님.”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던 지안이 세면대의 물을 틀어 온도를 가늠하는 강현을 불렀다.


“저 기억이 돌아오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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