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보상(2)
#043화 보상(2)
결국, 단운의 권유대로 오 표두를 비롯한 은룡당의 표사들과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현대의 펜션이었다면 주인이 인당 얼마씩 해서 추가금을 뜯었겠지만, 이곳은 무림 세계의 객잔.
오히려, 밥 먹을 사람이 늘었다고 싱글벙글하며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밤이 늦은 시각.
나는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여 별채 바깥을 지키고 있었다.
그냥 혼자 튈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쉽지만은 않았다.
만약 먼저 출발했다가 남은 일행이 습격이라도 받게 되면 간자로 몰릴 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휘황찬란 달빛 아래서 처량한 꼴로 밤샘 근무를 서게 되었다.
‘으허, 춥다.’
산 아래라서 그런지 늦가을 찬바람이 시리게 느껴졌다.
모닥불이라도 피웠으면 좋겠지만, 점소이가 청소를 어찌나 열심히 해 놨는지 주위엔 나무는커녕 낙엽 한 장도 찾기 힘들었다.
‘걷기라도 해야지.’
잠시 돌아다니자 표물을 실은 수레가 눈에 띄었다.
무얼 감춰 놨는지 수레는 두꺼운 천으로 덮여 있었다.
‘대체 뭘까······.’
문제가 터지면 이거 때문일 텐데.
잠시 바라보고 있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 자고 뭐 하나?”
은룡당의 오 표두였다.
“잠이 오지 않아 달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한데 표물 근처는 왜 서성이고 있었나?”
아저씨가 의심스러워서요.
“······하하, 그냥 눈에 띄어 잠깐 보고 있었습니다.”
내 대답에 오 표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수레를 덮은 천이 벗겨진 흔적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표물의 내용은 대외비일세. 허니 너무 궁금해하지 말게나.”
“표물에 관한 규칙은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겠네.”
자신들의 위기를 떠넘기면서 이런 뻔뻔함이라니.
‘애들한테 은룡당이랑 놀지 말라 그래야지.’
다음 날.
“출발하지.”
오 표두 일행과 함께 소파산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걸으면 아마 오후쯤 산을 넘겠지 싶다.
문제는.
무림 세계, 사건 사고의 핫 플레이스인 객잔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산을 빙 돌아가자 그럴까 생각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 봤자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단운에게 슬쩍 전음을 보냈다.
[단 형, 습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단운의 눈에 이채가 서리며 알고 있다는 듯한 전음이 날아왔다.
[알고 있다.]
[······알면서 동행을 하자 한 겁니까?]
[구룡성의 식구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도움을 당연히 주어야 하지 않나?]
아니, 오지랖 너무 넓은 거 아니냐고.
[······정말 미친놈입니까?]
꿈틀.
참지 못하고 욕을 던지니 단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울컥한 모양.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른 화에 나도 모르게 캐삭빵을 신청할 뻔했다.
‘휴, 참자.’
싸워 봤자 이길 수도 없는데.
여하튼, 산을 넘는 중에 나와 단운, 은룡당의 표사들은 사방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조심스레 나아갔다.
바위를 오를 때면 기감을 펼쳐 주변을 확인했고.
나무에 둘러싸인 곳을 지날 때면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긴 방패를 들었다.
천하에서 오직 은룡당만이 사용한다는 철목 방패였다.
덕분에 반나절이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소파산을 한나절이 되어서야 겨우 넘을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드는 허탈한 감정.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온 신경을 집중해 산을 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은룡당의 표사들은 절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오랜 표행으로 긴장이 풀어질 때가 기습당하는 타이밍이라는 걸 아는 탓이었다.
그러기를 다시 반 시진.
어느덧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다다랐을 때.
쉬익. 쉬익.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도 힘든 파공음이 들려왔다.
“정방!”
오 표두의 목소리가 퍼지자마자 표사 셋이 방패를 든 채 앞으로 튀어 나갔다.
푹.
그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철시가 철목 방패에 깊게 박혔다.
어느새 말에서 튀어 오른 단운이 소리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암향표였다.
서걱!
벼락같이 날아간 단운이 검을 휘두르니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진을 펼쳐라!”
오 표두의 목소리에 표사들이 방패와 단창을 쥔 채로 수레를 감쌌다.
척.
은룡당의 절정 고수, 웅호창(熊虎槍) 오대산 역시 같은 무장을 갖춘 채로 수레 앞을 지켰다.
누구든지 다가오면 단박에 찔러 죽이겠다는 기세였다.
그때였다. 우측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나타나더니.
쓰엉! 쾅.
어린아이 주먹만 한 추가 날아와 표사 하나의 방패를 깨부쉈다.
‘유성추?’
흔히 볼 수 없는 무기.
게다가, 유성추를 활용하여 저 정도의 위력을 내는 무공을 지닌 곳은 천하에 단 한 곳뿐이다.
‘남천궁이구나!’
바로 남만 무림의 총본산이자 무림의 중견 기업, 남천궁이었다.
쓰엉!
다시 날아오는 유성추가 이번에는 표사의 머리를 노리는 게 보였다.
“흡!”
퉁.
나도 모르게 전왕보를 뻗어 그의 앞에 섰다.
빠악.
유성추를 쳐 낸 손목이 저릿저릿하다.
‘거리를 주면 안 된다.’
다시 전왕보를 전개하여 벼락같이 튀어 나갔다.
툭.
상대의 측면에 다다르자 무인이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흔하디흔한 얼굴.
그러나 그런 얼굴이라도 눈에서 뿜어나오는 살기를 감출 수는 없었다.
“죽엇!”
적이 소름 끼치는 속도로 단도를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터뜨린 박룡십삼투.
파파팟.
손과 손목, 주먹과 단도가 빠른 속도로 부딪쳐 나갔다.
‘지금!’
폭사경 라이트 버전을 적의 단도에 적중시켰다.
쾅!
“크헉!”
단도가 터짐과 동시에 적이 신형을 뒤로 물렸다.
칼날 조각이 박혔는지 눈 한쪽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너무나도 쉽게 가져온 우세.
원딜인 놈과 근딜인 나와의 상성을 생각해 봤을 때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결과였다.
원인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곧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설마?’
상대가 약한 것이 아니다.
내가 강해진 거다.
월동월강, 월전월강(越動越強, 越戰越強).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는 전왕류의 구결이 떠올랐다.
즉, 그간의 전투로 전왕류가 성장한 것이다.
‘나, 혹시 강할지도?’
마음먹고 펼친 전왕보.
확실히 조금이나마 빨라진 게 느껴졌다.
쑤엉!
강맹한 위력을 내뿜으며 날아오는 유성추에 맞서 터뜨린 폭사경이 주위를 휩쓸었다.
“이익!”
목숨의 위험을 느꼈는지 놈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여기까지 와 놓고 그냥 가긴 좀 서운하지 않아?”
전왕보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고.
스거억!
나는 여유롭게 놈의 등짝을 향해 극사경을 쏘아 냈다.
후두둑.
놈의 몸이 반 토막이 나며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그 뒤로 은룡당의 표사들이 스물에 달하는 적들을 상대로 수레를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
3 대 20의 싸움.
심지어 상대 역시 자신들과 같은 일류 수준의 무인.
순식간에 도륙이 날 만한 상황이지만 표사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튼튼한 철목 방패와 귀신같은 창 솜씨로 적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다.
지키기 위한 무공.
그것이 바로 은룡당의 근본이었다.
‘저기는 괜찮아.’
결국, 결판은 고수들끼리 내야 한다.
생각을 마친 나는, 오대산이 상대하고 있는 노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터엉!
오대산의 방패에 막힌 도를 회수하던 노인이 대경하며 몸을 돌려 왔다.
곧장 터져 나가는 폭사경을 막으려 노인이 대도를 가로로 그었다.
콰왕!
기와 경력이 맞부딪히자 허공에 폭발이 일었다.
“흡!”
오대산의 단창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쏘아졌다.
“익!”
노인이 상체를 틀어 창첨을 가까스로 피했다.
나는 곧장 박룡십삼투를 쏟아 냈다.
퍼퍼퍼퍽.
손과 발이 노인의 상, 하체를 가리지 않고 타격했다.
“크흠.”
노인의 침음성에 오대산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치, 이 순간을 노렸다는 느낌이었다.
딱 봐도 필살기가 터질 타이밍.
나는 전왕보를 펼쳐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노인 역시 수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몸을 빼려 했지만.
오대산의 창이 쏘아지는 것이 먼저였다.
은룡당의 전신인 은성표국이 천하제일의 표국 자리에 오르게 해 주었던 강호일절의 창법.
은하창(銀河槍), 유성지파.
창첨에 은빛 기류가 가득 차며 창이 쏘아졌다.
다급해진 노인이 도기를 피워 올리며 창을 세로로 쪼개려 했지만.
부우웅.
공명음이 터지며 창이 도를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털썩.
머리의 절반이 날아간 노인이 눈도 감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때.
쿠릉. 콰와앙.
박격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단운의 검이 아래로 떨어지며 그가 상대하고 있던 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청운적하검이 터진 것이다.
자신들을 이끄는 이가 모두 죽자 몰려왔던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그냥 두고 볼 단운이 아니었다.
서거억!
양 무리에 뛰어든 사자처럼 그의 검이 적들의 몸을 갈랐다.
그러자 오대산과 표사들 역시 적을 전멸시키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는 아니고, 귀찮아서 수레 옆에 기대어 구경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일방적인 학살.
무협지에서 보면 정파 애들은 도망치는 적은 봐주기도 하던데.
여기 애들은 정말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이거, 나만 이상한 무림에 떨어진 거 아니야?’
같은 게임이라도 이지 모드와 하드 모드가 나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기다리던 찰나,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표사가 표물을 두고 적들을 쫓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기감을 폭발적으로 확장했다. 그것도 모자라 내공을 있는 대로 퍼부어 사방으로 퍼뜨렸다.
동시에 느껴지는 수십 개의 물체.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남천궁의 철시 부대는 3km 바깥에서 철시를 명중시킬 수 있어서 백장살(百丈殺)이라고 불린다고.
“······!!”
아니나 다를까.
시익.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거의 들리지 않는 파공음.
하지만, 시야에는 날아오는 철시 수십 발이 보였다.
문제는.
‘이건 못 피한다!’
너무 늦게 발견했다는 데에 있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
모조리 쳐 내는 수밖에.
마음을 먹자마자 양손에 내공을 둘렀다.
따다다다당!
내가 아는 무공 중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삼양수를 펼쳐 철시들을 마구 쳐 냈지만.
다른 철시 뒤에 숨어 있던 마지막 한 발을 놓치고 말았다.
“윽!!”
퍽.
묵직한 충격.
하지만, 철시가 내 몸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대공자에게 받은 용린갑이 내 몸을 보호해 줬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싸구려 템이라고 생각한 물건이 알고보니 레어 템이었다니!
혹시나 해서 시착한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당장이라도 용린갑을 벗어 다시 살펴보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놈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전왕보를 펼치며 달려 나가자 순간적으로 놈들의 철시가 내게 집중되었다.
용린갑의 성능을 몰랐더라면 철시를 쳐내며 힘겹게 전진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따따따땅.
놈들의 철시는 결코 용린갑을 꿰뚫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쿵.
백 장 가까이 달려간 곳에 백장살들이 모여 있었다.
지근거리에 도착하자 놈들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놈이 내 머리를 향해 시위를 놓았다.
쌔앵. 척.
삼양수를 펼쳐 철시를 잡아채며 놈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헬로.”
일방적인 학살의 시작이었다.
* * *
“미안하게 됐네. 진 조장.”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적들을 죽여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은룡당의 표사들과 오 표두가 몰려와 머리를 숙였다.
자신들이 자리를 비움으로써 내가 위험에 처했었기 때문이다.
“하하, 괜찮습니다. 대신 표물이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니 정말 고맙군그래.”
나는 관대하니까.
“그나저나, 표물이 멀쩡하니 정말 다행이지 않습니까?”
“천운이나 다름없는 일이지. 하마터면 큰 경을 칠 뻔했지 뭔가.”
“정말 다행입니다. 표물이라든가 표물이라든가 표물이 멀쩡해서 말입니다.”
“······.”
“표물을 버리셨던 표사님들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나 표물이 멀쩡한데.”
이런 내 겸손한 태도에 오 표두가 감격했는지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크흠, 내 돌아가는 대로 크게 사례를 하지.”
“제가 알기론 은룡당은 표행을 도와준 은인에게 표물이 지닌 값어치의 십분지 일을 사례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과연 얼마가 될지 궁금하군요.”
“흠, 값어치가 있다고 보면 있기도 하고 없다고 보면 아예 없는지라······.”
“하하, 오 표두님께서 농담이 많이 느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어치가 있는 것이 사람 목숨인데 값어치가 없다니요.”
“그, 그걸 어떻게······?”
내 발언에 오 표두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처억.
수레 안에서 작은 남자아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 봐요. 제가 무조건 걸린다고 했죠? 그리고 광혼분의 냄새를 맡으면 이성을 잃는다고 몇 번이나 설명했는데 그걸 또 당하다니······. 아저씨들 정말 은룡당에서 오신 분들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