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결사대(9)
북궁백과 인현진인이 앞으로 튀어 나감과 동시에 일백의 결사대, 아니 이제는 구십도 남지 않은 결사대가 뒤따랐다.
결사대가 쥔 무기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후우웅.
각자 본인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공을 펼쳐 선빵을 때린 것이다.
그리고.
북궁백의 손에서 흑염룡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그가 손을 뻗자 칠흑의 흑염룡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갔다.
강철쯤은 한순간에 녹여 버릴 만한 열기.
적중만 한다면 현산월은 뼛가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게 분명했지만.
화아아악!
어디선가 나타난 붉은색 강기가 흑염룡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우르르르.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폭발이 일어나며 두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그 사이로 나타난 붉은색 장포의 노인.
북궁백이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혈마?”
“큭큭큭큭, 여기서 흑룡수를 보게 되다니! 이런 우연이 있나.”
“세수가 백이십이 넘은 걸로 아는데 아직 정정하군.”
“혈신의 제사장에게는 혈신께서 권능을 내려 주시지.”
그들의 대화를 듣자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세상에, 혈종주라니.
십마련의 삼대 고수이자 천하 십대 고수인 그가 여기엔 왜 나타났단 말인가.
정수리에서 식은땀이 터진 나와 다르게 북궁백은 평온해 보였다.
오히려.
“재밌게 됐군.”
재미있다는 듯이 조소를 지으며 투지를 내뿜을 뿐이었다.
“혈종주를 처리하고 올 때까지 저놈을 맡고 있도록.”
심지어, 나보고 현산월을 맡으라는 어이없는 지시까지 내렸다.
“아니…….”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이미 그는 순식간에 멀어져 버린 뒤였다.
그렇다면.
‘합공뿐이다.’
하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썩 돌아가지 못할까?!”
“감히 점창산을 넘보다니! 겁을 상실했구나!”
손 남은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몇몇은 두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 말인즉슨.
‘망했네.’
초절정의 끝에 서 있다는 살마광귀를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크흠, 험험.”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 했던 말은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게 아니라…….”
촤락. 착.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성명 무기인 좌검 우창을 뽑았다.
누가 살종 출신 아니랄까 봐, 숨 막히는 살기를 내뿜으면서 묵묵히 싸울 준비를 하는 꼴을 보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싸우는 수밖에.
마음을 먹자마자 휘몰아치는 전왕기.
상황을 봐 가며 싸울 상대가 아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곧장 전룡기를 끌어올렸다.
파지지직.
“덤벼. 이 새끼야. 뒤지게 패 줄 테니까.”
* * *
“쿨럭.”
개같이 처맞았다.
십 분도 안 돼서 밑천이 싹 털린 건 물론이고 갈비뼈도 몇 개 나간 듯했다.
만약 용린갑이 없었다면 진즉 저세상으로 넘어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 같은 초절정인데 능력치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니냐고.
“그걸 막아 내다니. 좋은 보신갑을 입고 있군.”
“주면 살려 주냐?”
“죽이고 빼앗으면 될 것을 굳이?”
“하긴 그건 그렇네.”
저벅저벅.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놈이 천천히 걸어왔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전왕기를 있는 대로 전부 털어 쏟아부은 뒤였으니까.
덕분에 지금 몸속엔 전왕기가 딱 한 줌만 겨우 남아 있었다.
‘온 힘을 다한 폭사경을 창으로 찔러 터뜨리다니…….’
내 공격은 놈에게 정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극사경은 놈이 휘두른 도에 그대로 갈라져 버렸고.
경력을 잔뜩 실은 전왕십삼투는 놈의 호신강기에 허무하게 막혔으며.
폭사경은 터뜨릴 때마다 창강에 찍혀 사라졌다.
남은 수는 연환경뿐이었는데.
놈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연환경을 펼칠 내공까지 모두 소진해 버렸다.
그래도.
“미숙함이 너를 죽이는 것이다.”
“지랄.”
희망은 있다.
“죽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시간을 끌 요량이면 통하지 않는다.”
“혹시 초사이어인이라고 들어 봤냐?”
“뭐?”
재빨리 용린갑 안으로 손을 넣어 작은 옥병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알아 두는 게 좋을 거다. 지금부터 네가 겪어야 하는 지옥이거든.”
꿀꺽.
두 옥병의 뚜껑을 전부 따서 한입에 털어 넣었다.
청소소가 폐관 제약으로 만든 설음수액이다.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 써먹으려고 챙겨 왔는데 한꺼번에 두 병이나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영약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부귀영화도 삼처사첩도 살아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것을.
수액에 스며 있던 극음의 기운이 몸에 들어오자 전왕기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얼마나 거셌는지 몸 밖으로 경력이 터져 나갈 정도였다.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 심법을 운용할 필요는 없다.
월동월강, 월전월강(越動越強, 越戰越強).
싸우다 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이놈!”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현산월이 도를 휘둘렀다.
후우웅.
강기가 잔뜩 실린 일격.
허용한다면 저세상으로 갈 만한 위력이었지만.
쿠아아아.
전룡기가 저절로 튀어나오며 도강을 막아 냈다.
그리고.
쿠르릉. 펑.
몸속 깊은 곳에서 터진 연환경의 경력이 거력을 선사했다.
“음?”
자신의 공격이 쉽게 막히자 현산월이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차전이다. 이 새끼야.”
쿠웅.
전왕보와 비천풍을 하나로 합쳐 시전했다.
파앗!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며 현산월의 뒤를 잡았다.
절세의 보신경을 익힌 자만이 허락받는다는 이형환위의 한 걸음.
“……!”
현산월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그가 몸을 돌리기 전에 척추를 노리고 폭사경을 박아 넣었다.
콰아아!
경력의 폭풍이 그의 등판에 작렬했다.
물론.
“아직 멀었어!”
방금의 경험상 이 정도의 공격으론 흠집 하나도 내지 못하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최대한 많은 공격을 때려 넣어야 했다.
재빨리 현산월의 지근거리로 이동했다.
초근접전.
현산월이 대로하며 도를 휘둘렀지만.
이 거리라면 전왕류의 속도를 따라올 수는 없다.
후드득.
도 날에 스친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빠앙!
내가 뻗은 각법의 그의 무릎에 틀어박혔다.
경력이 담긴 오른 주먹이 그의 턱을 후려쳤다.
왼 주먹으론 명존쎄를 시전했다.
“컥.”
효과가 있었는지 놈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죽어! 시불롬아!”
기세를 몰아 펼친 전왕십삼투.
하나이되 하나가 아닌 열세 개의 초식이 그의 전신에 틀어박혔다.
온 힘을 다한 공격에 마침내 그의 중심이 무너져 내렸다.
‘혹시 나 강할지도?’
순식간에 차오르는 무공 뽕에 취해 극사경을 시전하려던 그때.
오싹!
육감이 경고했다.
뒤질 수도 있다고.
아니나 다를까.
스팟!
한 줄기 빛살이 날아오더니.
촤악!
소름 끼치는 도격이 내 목을 노려 왔다.
“……!”
피하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전룡기였다.
쿠아아!
검은색 자기장이 창격과 도격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밀리는 듯 미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 현격히 밀리는 전룡기.
‘빌어먹을.’
다음에 이어질 공격을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지만, 당장 살려면 어쩔 수 없는바.
나는 남아 있는 모든 전왕기를 때려 넣었다.
그러자.
후우웅!
자기장 형태의 전룡기가 길쭉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마치 북궁백의 흑염룡과 비슷한 모습.
“뭐지?”
처음 보는 현상이지만, 지금은 숙고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흡!”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게 우선이니까.
현산월이 창을 찔러 왔다.
위력만 놓고 보면 방금의 도강보다 두어 배 강한 일격.
목숨이 간당간당한 위기 상황에도 자꾸만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씨익.
왠지 모르게 충분히 막아 낼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내 반응에 현산월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 새끼 뭐지? 하는 눈빛.
“실성했구나!”
“실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두껍고 길쭉한 전룡기가 쭉 뻗어나갔다.
그리고는 현산월이 날린 도강을 통째로 먹어 치우더니.
끄아아아.
괴성을 내뿜으며 한층 더 커진 모습으로 창강과 부딪쳤다.
“무슨!”
마치, 제 영역을 지키는 용처럼.
전룡기가 창강까지 먹어 치우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죽어! 이 시불롬아!”
곧바로 내가 손을 뻗어 현산월을 가리키자 검은색 용으로 화한 전룡기가 날아갔고.
콰아아아왕!
박격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해치웠나?”
나도 모르게 터진 금기된 대사.
하지만, 이번엔 자신이 있었다.
내 인생을 갈아 넣은 최고의 일격이었으니까.
재빨리 기감을 펼쳐 현산월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찰나.
펑.
파공음이 들리더니.
푸욱!
빛살과 같이 날아 온 단창이 내 허벅지를 꿰뚫었다.
“큭!”
저벅저벅.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현산월이 구덩이에서 걸어 나왔다.
“대단하군. 그 나이에 이런 성취라니.”
“끄흑!”
불같이 올라오는 격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털썩.
어떻게든 다리에 힘을 주려 했으나 허벅지에 박힌 창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차악.
현산월이 등 뒤에 맨 검을 뽑았다.
“와…….”
저걸 맞고 살아나네…….
그렇게 다가오는 절체절명의 위기.
하지만, 십마련의 마구니에게 벌벌 떠는 모습 따위를 보여서야 쓰겠는가.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헛소리.”
씨익.
내가 조소를 짓자 현산월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실성한 모양이군.”
“아니, 완전 멀쩡한데?”
“아니면 겁을 상실했거나.”
“글쎄?”
나는 내게 남은 모든 전왕기를 끌어올렸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싸워야 하니까.
연환경의 경력은 물론이고 녹이지 못한 설음수액의 진기까지 모두 담아서.
뻐어엉!
현철 못에 담아 날렸다.
파스스.
주변의 땅과 공기를 얼리며 날아간 현철 못.
“뻔하구나.”
현산월은 너무나도 쉽게 피해 냈다.
뭐, 그럴 수 있다.
누가 봐도 뻔하디뻔한 공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노린 건 현산월이 아니라.
콰아아앙!
북궁백과 싸우고 있던 혈종주였다.
어차피 피할 게 뻔한데 뭐 하러 힘을 쓰나.
차라리 북궁백을 이기게 해서 흐름을 우리 쪽으로 끌어오는 것이 백번 옳지.
그리고 그런 내 계획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큭!”
생각지도 않은 기습에 혈종주가 공격을 허용한 것이다.
아마, 북궁백을 상대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던 모양.
덕분에 현철 못은 그의 좌수에 틀어박혀 주변을 꽁꽁 얼렸다.
그리고 북궁백은 이런 기회를 놓칠 인간이 아니었다.
“녹여 주마!”
화르르륵!
초고열의 흑염룡이 혈마의 상반신을 노리고 쏘아졌다.
“헛!”
혈종주가 다급히 오른손을 들어 강기를 펼쳤으나.
콰아아앙!
“끄아악!”
형편없이 밀려 오른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십마련의 최고 전력이 무력화된 상황에 현산월이 크게 당황했다.
대로한 그가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네 이노옴!”
나는 떨어지는 검날을 보고 생각했다.
‘여기까지군.’
백번 재 봐도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무전이의 무림환생기에 도움을 준 모두를 떠올리려던 찰나.
화르륵!
엄청난 고열이 느껴지더니.
“끄아…….”
현산월의 상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랬다.
혈종주를 패퇴시킨 북궁백이 한달음에 달려 온 것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속마음.
“아빠?”
“호적에 올려 주랴?”
목숨을 구명 받은 감동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혈종주는……?”
척.
내 질문에 북궁백이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혈종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를 구하느라 놓치신 겁니까?”
“얼마 살지 못할 늙은이를 죽이는 것보다 널 살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아쉽기 그지없었지만, 어찌 보면 옳은 판단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혈종주를 죽였다면 남은 혈종 놈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을 테니까.
혈종주를 놓아 줬기에 그와 함께 온 혈종 놈들이 대부분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여유가 생겨 결사대의 고수들은 한결 수월하게 적을 상대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달은 십마련 원정대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쿨럭!”
파아아. 파스스.
쌓여 있던 울혈을 토하니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간 피가 얼어붙는 게 보였다.
‘아, 맞다.’
이거 부작용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