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황주상단
가립은 유급 휴가를 달라는 내 요구를 흔쾌히 들어줬다.
“근신이 풀리자마자 휴가를 달라니 양심을 산에다 묻어 놓고 다니나?”
“그냥 안 맡으렵니다. 외당이 망하든 말든 알아서 하시든가요.”
“아니, 이 사람아. 중원 말은 끝까지 들어보라는 속담도 모르나?”
그것도 한 달씩이나.
‘안 그래도 바빴는데, 잘됐군.’
진무관을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잘된 일이다.
사업이란 초반에 기틀을 어떻게 잡아 놓느냐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휴가의 조건은 존재했다.
황주상단의 납품 비리를 해결하는 것.
나는 바로 그걸 위해 적룡당으로 가 적일이삼 형제와 마주했다.
“왔나?”
“낄낄낄.”
“어서 와라.”
“…….”
살귀 세 명이 들어오니 방안에 살기가 가득 찼다.
심지어, 방금까지 뭘 하고 왔는지 이들의 옷에 피가 잔뜩…….
“아, 도축을 하고 왔다. 오해하지 말도록.”
도축을 하고 왔구나……가 아니지.
“도, 도축 말입니까?”
“그래.”
“아니, 천하의 적룡검이 도축을 왜…….”
내 질문에 적이가 대신 답했다.
“살(殺)에 대한 감각을 채우는 거지. 천살소검은 그런 감각을 살려 수련해야 하니까. 낄낄.”
“…….”
무슨 마공이냐고.
조용히 고개를 젓고 있으니 적일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적가의 시조께선 본래 백정 출신이셨다. 어떻게 보면 천살소검의 뼈대는 도축장에서 세워진 셈이지.”
“아니 왜, 외부인에게 가문의 비사까지 말하고 그러우?”
“맞습니다. 형님. 조심하시는 게 옳다고 생각됩니다.”
“무전이 어찌 외부인이란 말이냐. 곧 있으면 한솥밥을 먹게 될 텐데. 안 그러냐?”
“……전혀 안 그런데요?”
“크흠,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군. 하나, 얼른 해야 할 거다. 화란이도 슬슬 시집을 가야 할 나이가 되어 가고 있으니까.”
“…….”
적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적이와 적삼은 살기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니.’
정말 답답할 노릇. 내 의견을 무시할 거면 최소한 자기들끼리라도 통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광경에 이 인간들하고 엮여도 괜찮을지 고민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황주상단의 일을 해결하려면 적룡당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형님들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동시에 품에서 황금색 패를 꺼냈다.
남천궁과의 전쟁에서 받은 것으로 꼭 필요할 때 써먹겠다고 아끼고 아껴 놨던 보은패였다.
“……!”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을 확인한 적일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이거 우리 게 아닌데?”
“……어떻게 안 될까요?”
녹룡당의 보은패라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잠시 후.
보은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적일이삼 형제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자네, 미친 건가?”
“낄낄, 천하는 넓고 미친놈은 넘쳐 난다는 말이 생각나네.”
“……이걸 죽일 수도 없고.”
뭐, 욕은 좀 들어 먹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들은 다른 조건을 제시했는데.
“우리가 남인가? 정 미안하면 나중에 우리 일이나 한번 도와줘라.”
바로 소도 잡아먹는다는 외상이었다.
‘안 받을 이유가 없지.’
언제고 기회를 봐서 떼어먹을 수도 있을 테니까.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내게 적이가 물었다.
“낄낄, 그래, 언제 어디서 누굴 어떻게 해 줄까?”
“크흠, 누굴 어떻게 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조사를 좀 해 줬으면 합니다.”
조사라는 말에 적일이삼 형제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보다 우리 적룡당의 정보력이 한 수 위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군.”
“그런가 보오. 형님. 맨날 하오문의 대머리를 찾아가길래 내심 우리가 무시당하나 싶었소.”
“시전에 돌아다니는 싸구려 정보보다는 고급 정보가 더 중요한 것을 깨달은 거지요.”
끄덕끄덕.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다.
이제 막 다시 상장한 하오문과 달리, 적룡당에는 지난 백 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공고히 구축해 놓은 정보망과 세력권이 있었으니까.
특히, 본거지인 사천성에선 아직까진 하오문보다 적룡당이 위다.
정보료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싸서 그렇지.
“그래, 어떤 걸 알아봐 주면 되겠나?”
“황주상단입니다.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이러쿵…… 저러쿵…… 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나는 황주상단과 군사부, 외당이 얽혀 있는 현 상황을 설명했다.
모두 들은 적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주상단주와 비리를 저지른 군사부 서생 놈들을 죽이면 되겠군.”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 * *
적룡당에 조사 의뢰를 넣고 나는 얼른 진무관으로 복귀했다.
어차피 적룡당의 조사가 끝나려면 사흘은 기다려야 하니, 그동안 관원들에게 흑무창법의 전반부를 가르칠 셈이었다.
“하나!”
쑤엉!
구호에 맞춰 칠백의 관원이 비슷한 동작으로 창대를 찔렀다.
“거기! 힘이 너무 들어갔잖습니까? 슝 하면서 창대가 빠져야 한다고 몇 번 말씀드립니까?!”
“죄, 죄송합니다.”
“두울!”
쑤엉!
“창대 끝이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오전에는 체력과 근력 단련, 오후에는 창법, 그리고 저녁과 새벽은 각자의 장소에서 흑무공을 연마한다.
원래는 희망자만 가르치려 했으나 이 두 무공의 출처가 북궁백이란 말을 해 주자 모두가 배우기를 희망했다.
다행히 상승의 무공과 심법을 익힌 이가 없어 모두가 미련 없이 흑무 시리즈를 선택했다.
‘하긴.’
애초에 상승의 무공을 배웠다면 이렇게 진무관에 다니지도 않았을 테니깐 말이다.
“여덟!”
으얏-!
내 구호에 맞춰 움직이는 관원들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뭇했지만, 한편으론 조금 불안해지기도 했다.
비록 전반부만 풀기로 했으나 흑무창은 나름대로 상승 무공이다.
초식에 담긴 묘리나 무리를 풀어 가르쳐 주기엔 내가 창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줄 거면 권법이나 각법으로 주지.’
싸부는 왜 이런 걸 줘서…….
그래도 형(形)을 익히는 단계까지는 상관없어서 지금은 내가 어찌어찌 가르치고 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거기다 내게 시간이 없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
‘앞으론 진무관에만 잡혀 있을 수가 없다.’
이번 조사가 끝나면 외당에 복귀해야 하는바, 진무관에만 잡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부턴 제가 아닌 특별 강사가 창법을 지도할 예정이니 이 점 참고해 주십시오.”
바로 외부 강사의 영입이다.
누구냐고?
“아이고, 형님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자, 일단 차 한 잔씩 하시고…….”
묵룡당의 형님들이었다.
위지풍을 비롯한 묵룡당의 젊은 무인들은 무관을 운영하느라 바빠서 초빙하진 못했지만, 사십 대 이상의 중년 무인들은 반쯤은 백수 신세다.
그런 이들에게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부른 것이 아니다. 나름 창술의 전문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반절쯤은 되는 사람들을 불러왔다.
무릇, 묵룡당의 전신인 점창파는 도가 문파이면서도 실전적인 무공으로 유명한 무문.
창법과 극법, 심지어 궁법까지도 익히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할 게 무공 수련밖에 없기도 하지.’
가정도 돈도 없으면 무엇이 남겠는가.
오로지 무공뿐이다.
그렇기에 묵룡당은 영약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재정 상황에서도 구룡성 최고의 소수 정예라고 불리는 거고.
그런 곳에서 사십이 넘도록 수련만 하다 보면 걸어 다니는 무공사전이라 불릴 만해지는 거지.
흑무창법의 전반부 정도야 한 번 훑기만 해도 단박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나저나 전달해 드린 흑무창법은 다들 익혀 오셨죠?”
아니나 다를까, 다섯 묵룡당 형님들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과 식은 완벽하게 익혀 왔다. 무리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익을 테고.”
“역시 형님들이십니다. 이렇게 빨리 파악하시다니요.”
“크험,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나저나…….”
대표 격인 형님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요즘 당의 어른들이 곡차를 찾는 빈도가 늘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진무전, 예전의 그 코흘리개가 아닙니다. 어르신들 곡차값이 뭡니까? 애들 당과값도 든든하게 챙겨 가실 겁니다.”
나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보여 줬다.
“하루 두 시진만 지도해 주시면 월에 은 한 냥씩을 보장하겠습니다.”
미친 듯이 후려친 금액.
심지어, 앞에 있는 다섯 중 넷이 절정 고수라는 걸 생각하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월봉이었다.
“……어째 조금 짠 거 같은데?”
하지만, 나는 이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보이지만 자세히 따지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 우리는 하루 두 시진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자 보십시오. 오전에 와서 관원들 봐주고 밥 먹고 돌아가기만 하면…… 남는 시간에는…… 또한, 시간이…….”
물정을 전혀 모르는 도사도 설득하지 못해서야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그리고 이런 내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듣고 보니 무전이의 말이 맞는 것 같구나. 사제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형의 말씀이 천 번 옳습니다.”
“맞습니다. 무전이가 남도 아닌데 우리를 박복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점심도 든든히 준다 하니 묵룡당의 쌀도 축내지 않고 일거양득이 아닙니까?”
현란한 협상 기술에 형님들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그렇게 외부 강사를 고용하고 나니 진무관에서 내가 할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서무는 유소평이, 훈련은 당가삼괴가, 흑무창법은 묵룡당의 형님들이 맡아 줬기 때문이다.
‘좋군. 좋아.’
건물주가 갓물주라 불리는 이유.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벌기 때문이다.
바로 나처럼.
“룰루 룰루 비데.”
절로 콧소리와 흥이 나던 그때.
쎄엥!
어디선가 나를 향해 화살이 쏘아져 왔다.
턱.
위력이 강하진 않아서 손을 뻗어 잡아챌 수 있었다.
화살에 종이가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룡당에서 조사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굳이 이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데 있다.
‘무언가 있군.’
즉, 천하의 적룡당도 긴장시킬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뜻이다.
매달려 있던 종이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백중천?’
이번 장난질의 시작은 백중천이었으니까.
* * *
적룡당에서 조사한 내용은 이러했다.
1, 두 달 전, 외부에서 벌어진 알 수 없는 습격으로 황주상단의 상단주 일가가 전원 사망.
2, 상단의 경영권이 부단주를 맡고 있던 주경륜에게로 넘어감.
3, 주경륜의 아내는 백룡당의 방계 출신.
4, 백룡검이 군사부의 서생들을 불러 모은 것을 확인함.
5, 백룡당의 백검대주가 주경륜과 만남.
6, 적룡당에서 황주상단을 조사하는 것을 백룡당에서 눈치채어 조사를 중지.
‘어쩐지 음흉하게 웃더니만.’
정치질의 화신답게 우리 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판을 짰다.
“어휴, 까불다가 팔 병신이 됐으면 방에 처박혀서 춘화나 뒤적거릴 것이지…….”
확 싸부님에게 일러바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상수가 아닌 하수 중의 하수였기 때문이다.
북궁백의 성격상, 내 하소연을 듣자마자 백룡당 놈들을 모조리 쳐 죽일 게 분명하니까.
그렇게 되면 북궁백은 천하의 살성이 될 테고.
“……어쩔 수 없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직접 들어가서 증거를 찾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