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전왕문(戰王門)(5)
어두운 밤.
구룡성주 암독성왕 당청이 허름한 모옥에 딸린 작은 텃밭을 갈고 있었다.
퍽. 퍽.
먹구름까지 끼어 주위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묵묵히 밭을 갈 뿐이었다.
퍽. 퍽.
나이 든 농사꾼처럼 계속해서, 끊임없이 말이다.
그러기를 반 시진.
휘오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당청은 농기구를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강한 바람이 먹구름을 밀어 내자 구름에 가려져 있던 보름달의 끄트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쏟아지는 달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달을 보고 계셨습니까?”
“월아를 추억할 유일한 방법이니까.”
당청의 말에 문상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만월. 성주의 장손이자, 장래 구룡성주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 확실했던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는 건 암묵적인 금기 사항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것도 성주 그 자신이 정한 규칙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
입을 다문 문상이 성주의 진의를 파악하려 애썼다.
복수를 잊은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당만월의 죽음이 알려진 날, 성주는 구룡성의 전력을 이끌고 신강으로 진격하려 했다.
만약 자신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 계획은 실행됐을 터.
구룡성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찢겨 신강 땅도 밟지 못한 채 전멸당했을 게 분명했다.
성주 역시 그걸 알기에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미뤘을 뿐.
지금도 그의 가슴속엔 십마련을 불태울 복수심의 불꽃이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불리고 있다는 걸 문상은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성주의 입에서 죽은 장손의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건 단 한 가지.
복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성주가 문상의 이런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조소를 지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게나. 정해진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저 나 스스로 그날이 가까워진다고 느낄 뿐이지.”
“……축하……를 드려야 하는 겁니까?”
“축하는 무슨, 뿌려 놓은 씨앗이 이제야 싹을 틔운 것뿐이지. 그나저나 이 밤중엔 어인 일인가.”
문상이 품속에서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배첩을 꺼내 들었다.
“배첩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제 아들놈이 하도 부탁해서 말입니다.”
“배첩이라…… 오랜만에 받아 보는군.”
성주가 배첩을 열어 보지도 않은 채로 물었다.
“전왕문이라 했던가?”
“……예.”
“시간을 비워야겠군.”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북궁세가가 부활하는 순간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북궁백, 그 친구를 데려온 나는 참석해야지.”
문상의 눈이 꿈틀거렸다.
사실, 전왕문의 행보는 구룡성 입장에선 제지해야 옳았다.
개개인의 무위는 대단치 않은 수준이라지만, 무사의 숫자가 무려 칠백. 거기다 군문에서 사용할 법한 갑주 천 벌에 전마 천 마리라면 저 멀리 북쪽에서 횡행하는 군벌 못지않은 전력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그 군벌이 구룡성 바로 앞에 자리 잡았다면 더더욱 문제가 된다.
백룡당과 은룡당이 꼬투리를 잡은 것도 바로 그 점이었고.
하지만, 성주는 그들의 항의를 무시함은 물론, 군사부에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보내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 개파식까지 참석하겠다는 건 성주가 직접 소문을 양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간, 문상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성주님께서 북궁가와 거래를 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성주의 최근 행보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상은 평소처럼 성주를 대할 뿐, 어떠한 속마음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 미리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홀로 갈 테니 그러지 말게나. 괜히 번거롭기만 하네.”
“……알겠습니다.”
문상이 모옥을 나서고 나서야 성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방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던 보름달은 다시 진한 먹구름 뒤로 몸을 숨긴 상태였다.
퍽. 퍽.
밭을 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 * *
개파식 당일.
수많은 사람들이 전왕문에 몰려왔다.
본래 내성 팔 당의 주요 인사들만 초청하려 했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초청해야 한다는 묘향의 주장에 따랐다.
그나마 문 바깥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 망정이지, 만약 전왕문이 성 내부에 있었다면 이만큼 손님을 불러 모을 수는 없었을 거다.
천 명은 족히 될 만한 방문객 숫자.
술과 음식을 마련하는데도 삼, 사 백양은 들었을 게 분명했지만, 묘향은 이조차도 기회로 삼았다.
‘누이는 천잰가?’
전왕문 곳곳에 한중상련 구룡성 지부에 관한 홍보물을 붙였던 것이다.
덕분에 들어간 돈 그 이상의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협찬 광고라니.’
수백 년 후에나 나올 광고 기법에 경외심까지 들었다.
그런 커다란 잔치에 주인공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
나는 하늘을 찌를 듯이 입꼬리를 치켜올린 채 손님들을 맞이했다.
숫자가 많은 만큼 방문한 사람도 각계각층이었다.
“진 조장……. 아니, 내 정신 좀 봐. 문주님이시지! 개파 축하드립니다. 여기 약소하지만, 축하드린다는 의미에서 상인회에서 준비한 선물입니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산해진미는 아니어도 드실 만하실 겁니다.”
시전거리에서 장사하는 상인들부터.
“어라?! 진 노파! 여기까지 오셔 놓고선 식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가시다니요.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저 같은 천것이 어찌 감히…… 그저 문주님의 앞날을 빌어 주러 온 것뿐입니다. 괜히 자리만 더러워집니다요…….”
“어라? 이제 저랑 알은체도 안 하겠다는 겁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아, 음식 식습니다. 빨리요.”
외성의 일반 백성들과 그 가족들.
“개파 축하하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오시지요. 외당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 뒀습니다.”
퇴사한 전 직장인 외당 식구들.
“사형이 데려온 망나니가 일문의 장문인이 되다니……. 세상이 말세로다. 말세야.”
마지막으로 이쪽에서 따로 보냈던 배첩을 받은 내성의 인사들이 시간에 맞춰 등장했다.
특히, 오랜만에 본 태청진인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한껏 웃으며 타박을 해 왔다.
“……거참, 이상한 소리나 하실 거면 들어가서 식사나 잡수시죠.”
“에잉, 예의라곤 개밥에 말아먹은 놈.”
“누이, 여기 태청진인께선 신선 같으신 분이니까 소채 한 접시만 올리면…….”
“개파 축하한다. 이건 내가 직접 쓴 부적으로 정문에 붙여 놓으면 어지간한 잡귀는 접근도 못 할 것이다.”
진즉 그럴 것이지.
“크흠, 전왕문에 잘 오셨습니다. 진인의 방문을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여기 제 누이가 차린 음식과 곡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태청진인이 묘향에게 시선을 옮겼다.
묘향이 한껏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진인을 뵙습니다.”
“허어! 미색이 하늘 위의 선녀와도 같다는 말을 아이들을 통해 들었건만, 소문이 실물을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어멋.”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던 사이 태청진인이 전음을 보내 왔다.
[미간과 진택궁이 넓고 눈동자가 안정되어 있다. 또한, 관상의 균형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전음을 이어 나갔다.
[세상의 금이란 금은 다 끌어안을 관상이다. 저런 금덩이가 어찌 네 곁에 머물고 있을꼬……. 내 지금이라도 문규를 바꿔서 묵룡당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십쇼. 앞날 창창한 처녀에게 여도사는 무슨.]
그나저나 세상의 금이란 금을 다 끌어안을 관상이라니.
실로 재벌이 될 상이란 뜻이 아닌가.
묘향이 오늘따라 묘하게 더 예뻐 보였다.
“어머?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계세요? 꼭 금덩이라도 발견한 사람 같네요.”
“아, 아니야. 내가 무슨…….”
그렇게 마지막 손님일 줄 알았던 묵룡당까지 맞이한 후 들어가려던 찰나,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 등장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배첩도 안 보냈는데 말입니다.”
백룡당주를 비롯한 무사들이었다.
“얼마나 잘해 놨는지 궁금해서 말이지. 반갑지 않다면 돌아가지.”
얄미웠지만, 개파식에 온 손님을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배첩을 ‘안’ 보낸 탓에 자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저기 바깥에 앉아서 먹어도 상관없다.”
그가 백성들이 자리 잡은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라고 하고 싶었지만, 상대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개인적인 감정은 뒤로 접어 둬야 했다.
나중에 무슨 꼬투리가 잡힐지 모르거든.
“……자리를 만들라 할 테니 안쪽에서 기다리시죠. 누이, 부탁 좀 해도 될까?”
“얼마든지요.”
묘향을 따라 백룡당주가 오른팔 소매를 펄럭이며 들어가자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약간은 가라앉는 듯 느껴졌다.
저거 봐, 저거. 내가 저럴 줄 알았어.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기어이 찾아오다니.
정말 넌씨눈 같은 양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진짜 마지막 손님까지 맞이한 나는 미리 마련해 둔 귀빈석으로 향했다.
가장 상석에는 흑사로의 불마왕으로 통하는 북궁 사부가, 그 옆으론 팔당의 당주들이 먼저 온 순서대로 앉아있었다.
그나저나 사제지연을 맺은 후 공식 석상에 함께하는 첫 번째 자리가 개파식이라니.
살짝 뭉클한 감정까지…….
벌컥벌컥. 꿀꺽.
“…….”
아니, 이 좋은 자리에서 왜 병나발을 부냐고.
“크흠, 커험!”
헛기침을 해 모두의 시선을 유도했다.
“이렇게 저희 개파식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게나마 귀빈 여러분께 전왕문의 사상과 철학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전왕문의 사상과 철학이라. 이거 참 흥미롭구먼.”
“그렇구려. 젊은 무인들의 대표 격인 진 문주의 철학이니 필시 배울 게 많을 겁니다.”
“으헛헛헛, 금룡당주의 말이 참으로 옳소이다. 안 그래도 요새 젊은이들의 생각이 들어 보고 싶었다오.”
“저 역시도…….”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든 적룡당주 덕분에 모두가 동조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크흠, 그럼…….”
나는 목을 가다듬고 밤새 준비한 연설문을 꺼내 들었다.
아, 이건 유소평을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준비한 연설문이다.
시키려고 보니까 귀신같이 사라져 있었거든.
“우선, 전왕문의 개파식에 참여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먼저 올리며……. 다가오는 강호의 혼란 속에……. 우리 전왕문은 그러한 철학을 토대로……. 하여 무림의 평화를…….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사자맹이……. 될 수 있는 한 모두에게 협력하며……. 그러기 위해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
장장 일 다경에 걸쳐 열두 페이지가 넘는 연설을 마치자 귀빈석이 마련된 공간 전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해냈군.’
아마, 강호 전체를 바라보는 내 철학에 감탄을 금치 못한 모양.
그런 뿌듯함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던 차.
“지루하다. 헛소리를 뭐 그리 길게 늘어놓는지 이해하지 못하겠군.”
가장 끝에 앉은 백룡당주가 헛소리를 내뱉었다.
‘저 시불롬이?’
순간, 찾아온 손님에게 해를 입히면 안 된다는 무림의 금기를 깨고 달려들 뻔했다.
북궁 사부가 일침을 날려 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백검대가 박살 났는데도 상당히 여유 있어 보이는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나? 둘 중 하나는 불구가 되었을 테니 새로 키워야 할 텐데 말이야.”
자기가 박살 내 놓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북궁 사부의 뻔뻔함에 순간 뇌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날 정도였다.
“…….”
백룡당주가 검을 뽑아 들까 싶어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얼굴만 조금 붉혔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짝!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은룡당주가 손뼉을 치며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허허, 좋은 날에 분위기가 삭막하구려.”
그가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흥취도 올릴 겸, 전왕문의 무사들의 무(武)를 견식해 보는 게 어떻겠소이까? 물론, 진 문주가 허락한다면 말이오.”
“그럼……. 무사들을 준비시켜…….”
“허허, 아예 한판 붙여 보는 게 어떻겠소?”
“…….”
빙빙 돌려 말했지만, 의도는 명확하다.
‘경연 전에 이쪽의 역량을 확인하고 싶다는 말이군.’
은룡당 쪽 방계인 은가장 역시 협력 업체를 뽑는 쇼미더무공에 참가 신청서를 냈으니깐 말이다.
물론, 그런 꿍꿍이속을 알고 있어도 거절할 수는 없다.
무림이란 평판 덕분에 살고 체면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외적인 이미지가 중요한 곳인바.
개파식 첫날부터 꽁무니를 빼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다.
“좋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보죠.”
그럴 바엔 아주 박살을 내 버리는 게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