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충렬공파
쇼미더무공을 찢은 우리는 우승의 목걸이를 쥔 채, 전왕문으로 복귀했다.
당연히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소식을 들은 묘향은 문도들을 위해 술과 고기를 준비했고, 이틀간 쫄쫄 굶은 문도들은 한 무리의 사자 떼로 빙의해서 그것들을 집어삼켰다.
육학을 비롯한 아홉의 간부들 역시 그런 문도들 사이에서 어울렸다.
“쯧쯧…… 저러면 안 되는데…….”
절로 고개를 젓게 되는 모습.
병사들 회식하는 데 중대장과 대대장이 끼어든 꼴이 아닌가.
“뭣들 하나? 문주님의 잔을 채워 드리지 않고!”
“예, 옛!”
나처럼 한쪽 구석에서 즐겨야지.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정말 우리 간부들은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그렇게 잔치를 즐기던 그때.
유소평이 프락치를 통해 몇 가지 소식을 가져왔다.
“이렇게나 빨리?”
백은문의 해체.
즉, 합병이 취소되어 다시 백섬검문과 은가장으로 나뉘었다는 소식이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하루 만에 벌어져서 놀란 거지.
“아무래도 은가장 측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경연에서 떨어졌으니 목적을 상실했으니까요.”
“생각보다 강하게 나왔네?”
“덕분에 백섬검문에서 이를 갈고 있습니다. 은룡당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복귀하자마자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운남 무림에 피바람이 불겠군.”
유소평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은가장주가 문주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우리야 상관없는데, 그쪽은 은룡당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 아냐?”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아마 은룡당의 손을 놓으려는 것 같습니다.”
“방계가 본가와 절연을 한다라……. 아주 힘든 결정을 했군.”
“그쪽 이야기론 은룡당이 은가장을 팔아넘겼다고 하더군요. 백룡당에요.”
“하아…… 정파라고 써 붙이면 뭐 하냐? 하는 짓은 사파 나부랭이와 다를 게 없는데. 안 그래?”
“동감입니다.”
유소평이 앞에 놓인 술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저는 반댑니다.”
“왜?”
“자칫하면 은룡당에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전왕문으로서는 팔 당과 척지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흐음…….”
틀린 말은 아니다.
이제 막 하청 업체로 선정되었는데 원청의 대주주와 척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우리 편이잖아.”
“……거래 관계라고 보는 게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건 모르겠고, 그쪽 덕분에 이번 경연에서 이긴 거 아냐?”
“그건 맞습니다만…….”
“그럼 날짜 잡아. 그깟 시빗거리 좀 생기더라도 우리 편은 챙겨야지.”
“……알겠습니다.”
“잠깐.”
나가려는 유소평을 불러세웠다.
“이왕 만나는 거 아예 다 부르자.”
“예? 누구를…….”
“누구긴 누구야. 오 장문인하고 우 성주지. 아직 성에 남아 있잖아?”
판은 클수록 좋으니까 말이다.
* * *
다음 날.
밤이 늦은 시간에 오량과 우공백, 은진산이 방문했다.
은룡당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은진산을 배려한 탓이다.
덕분에 칠패라 불리는 천하 고수 두 명이 변복까지 하고 찾아오게 되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괜찮소. 여기서 은 장주의 사정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 말이오.”
“오 장문인의 말씀이 옳소. 개의치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소.”
우공백과 오량이 사죄하는 은진산을 만류했다.
특히 오량은 백은문에 좋은 감정이 없을 텐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역시 대인이로군.’
저기 흑사로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는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다.
“일단 앉으시죠.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제 누이가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음식들입니다.”
“……맛있어 보이는구려.”
“그렇소이다. 이 정도의 음식은 산성에서도 본 적이 없소.”
“저도 동감입니다.”
뭐,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맛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이코패스 인증이지.
실제로 묘향의 손맛은 매우 뛰어나기도 했고.
“자자, 후배가 올리는 잔도 받으시죠. 이게 적룡당에서 만든 홍화주라는 건데 맛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홍화주를 맛본 세 사람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어…… 이런 술이 있었다니…….”
“구룡성이 부럽구려……. 귀주에선 술이라곤 찾아보기도 힘든데 말이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렇게 몇 순배를 돌고 나서야 본론을 꺼냈다.
“제가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단순히 친분을 쌓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
오량과 우공백이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진산의 경우, 상황이 상황이어서 그런지 눈빛에 침통함이 감돌았다.
사실, 그가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평생을 본가의 명령을 받들고 살았음에도 버림받았으니까.
“사업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사업?”
“예. 큰돈은 아니지만, 문파 운영에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사업입니다.”
오량과 우공백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두 사람이 이번 입찰에 참여한 이유 자체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거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소?”
오량의 물음에 나는 손뼉을 쳤다.
짝.
문이 열리며 오늘의 발표자가 들어왔다.
“한중상련의 총관, 묘향입니다.”
“여인……?”
“능력만 있으면 성별은 상관없죠.”
그녀가 맑은 눈으로 오량을 바라봤다.
오량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것뿐이지 타박할 생각은 없었소. 여인의 몸으로 총관의 자리까지 갔다고 하니 더욱 믿음이 가는구려.”
오량의 칭찬에 묘향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자, 그럼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문주실에 마련된 PPT용 칠판에 커다란 종이를 걸었다.
대동맥(大動脈).
세 사람이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그 글자를 바라봤다.
“해남에서 출발하여 귀주와 운남, 사천을 지나 한중까지 이어지는 동맥을 만드는 계획이에요.”
그녀가 가장 먼저 오량을 지목했다.
“해남도에서는 말린 해삼과 전복 등 귀한 해산물이 다양하게 나지요?”
“그렇소.”
“잡는 법은 당연히 아실 테고요.”
“해남도의 사람 중 바다와 친하지 않은 자는 없소.”
“그러면 일이 쉽겠네요. 돌아가시는 대로 해산물을 최대한 많이 잡아서 말려 주세요.”
“……그동안 여러 상단을 만나 거래를 해 봤소이다. 그다지 돈이 되는 것 같지는 않던데?”
“당연하죠. 상단들이 판매하는 가격의 십분지일도 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전혀 몰랐군.”
“이제부턴 제값을 받으실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오?”
“간단해요. 물건들을 확보하여 은가장에 운송해 주시면 돼요. 배는 저희 쪽에서 사 드릴 테니 초기 자본금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알았소이다.”
묘향이 우공백과 시선을 마주했다.
“귀주성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렇소.”
“그렇다는 말은 산마다 귀한 약초가 널려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그동안 캐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요.”
기본적으로 좋은 약초는 사람이 없는 지역에서 자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백 년간 사람이 살지 않다시피 했던 귀주의 산들은 자연스럽게 약초 자생지가 됐음이 틀림없었다.
현대 한국만 보더라도 약초꾼들은 인적이 드문 산을 찾아다니지 않는가.
참고로 전생의 친동생은 강원도 고성 GP에서 근무할 당시 산삼을 캐 먹고 10년간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
“맞긴 하오만, 팔기가 어려워…….”
“그거야 귀주성 안에서 팔려고 했으니까 그렇죠.”
묘향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시는 대로 문도들을 시켜 약초를 수집하세요. 전문 약초꾼을 붙여 드릴 테니 다루는 법을 배우시고요.”
“그럼……?”
“파는 건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은가장으로 가져다주세요. 단, 판매대금을 받아야 하니 무사들 수십 명은 은가장에 상주시켜 놔야겠죠? 해남검파도 마찬가지고요.”
그 말을 들은 은가장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슨 뜻인지 인지했음이 틀림없다.
“우리가 할 일은 너무나 명확해 보이는구려.”
“맞아요. 받은 물건들을 한중까지 운송해 주는 거예요. 표국을 운영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렵지는 않으시겠죠?”
“당연하오. 그거야말로 우리가 전문이지.”
사실, 은가장을 끼워 넣은 건 단순히 운송 때문만이 아니다.
태모산성과 해남검파의 무인을 은가장에 머물게 해 은가장과 태모산성, 해남검파와 전왕문이 동업 관계라는 걸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은룡당을 대신할 꽌시를 엮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섬검문이 은가장을 건들지 못하는 건 물론, 그들의 본가인 백룡당 역시 부담을 느낄 게 뻔할 테니까.
그리고 그 꽌시는 우리 신생 전왕문에도 적용되는바.
‘돈도 벌고 외교도 하고.’
일타쌍피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발표를 마친 묘향의 어깨를 두들겼다.
“수고했어. 누이.”
“뭘요.”
살짝 고개를 숙인 묘향이 물러섰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끄덕.
“마음에 들다마다. 이렇게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데 말이오. 아니 그렇소?”
“맞소이다. 해남도에서 올라온 이유가 여기 진 문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까지 드오.”
“마음 같아선 딸이라도 주고 싶은 생각입니다.”
우공백과 오량, 은진산이 차례로 답했다.
“그럼 제안자인 제가 모임의 이름을 지어도 될는지요.”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진 문주가 아니었으면 탄생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묘향을 포함한 모두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런 그들에게 밤새 고민한 모임의 이름을 말했다.
“충렬공파, 충렬공파라는 이름이 어떨까 합니다.”
“……강렬한 이름이군. 뜻이 뭔가?”
“우주의 기운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생의 엄니가 전주 최씨 충렬공파이기도 했고.
“과연! 젊은 문주라 그런지 감각이 남다르군.”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외다.”
“동감입니다.”
으하하하하-!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훗날 중원 남부의 상권을 통합할 충렬공파 조합이 탄생했다.
* * *
쇼미더무공의 최종 우승에 관한 이야기가 구룡성을 강타했다.
시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자네, 전왕문이 그 쟁쟁한 문파들을 꺾었다는 소식 들었나?”
“아무렴! 진 조장……. 아니 진 문주님의 손이 닿은 곳인데 그 정도도 못 할까? 나는 처음부터 전왕문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네.”
“하이고, 지랄은……. 자네가 해남검파에 돈을 건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나?”
“아, 아닛…….”
덕분에 신생 전왕문의 인지도가 빠르게 상승했다.
사실, 이러한 인지도는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사기꾼이 워낙 넘쳐나는 무림의 특성상, 간단한 거래도 상대방의 이름을 보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소문들 덕분에 한중상련과 충렬공파의 인지도 역시 상승했는데.
“결정했네, 오늘부터 한중상련에 물건을 대기로 말이야.”
“얼마 전까지는 시장 상인들의 이권을 지켜야 한다면서. 한중 상인들을 퇴출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소문도 못 들었나? 진 문주께서 해남검파와 태모산성, 은가장과 손을 잡았다네.”
“헉!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니깐 그러네. 경쟁자들도 품을 정도로 마음이 넓으신 분이 우리 상인들에게 해를 끼칠 리가 없지 않지.”
“과연…… 천하의 대인이라 불릴 만하군그래.”
뭐, 이렇게 말이다.
‘푸흐흐, 좋군.’
오랜만에 시전거리 다루에 와서 차를 마시고 있으니 좋은 소리만 들려왔다.
하지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
이럴 때일수록 더욱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한다.
“혹시 진 문주님이 아니십니까?!”
“이런, 이런. 조용히 차만 마시고 가려 했는데 들켜 버렸군……. 맞소. 내가 바로 이번 경연을 찢은 전왕문의 문주, 진무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