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뜻밖의 손님(2)
시체가 눈을 뜬 걸 보자마자 심즉기의 묘리로 전왕기를 끌어올렸다.
파지직. 파직.
경력이 터져 나가며 주위를 감쌌다.
물론, 시체가 되살아나 봤자 기껏해야 강시겠지만, 내가 환생한 이곳은 하드보일드 무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막말로 되살아난 시체가 고스트라이더 같은 지옥의 전사로 되살아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변신 매너를 지키지 않고 시체를 터뜨려 버리기로 결심했는데.
“죽어……! 음?”
현양진인이 나를 막아섰다.
“빈도가 처리하겠습니다.”
“네?”
“빈도가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아……. 네.”
불꽃 카리스마에 나도 모르게 물러섰다.
현양진인이 몸을 돌려 공손적산 의 시체와 눈싸움을 하더니.
“안된다. 망자는 산 사람의 삶에 간섭할 수 없다.”
갑자기 대화를 시도했다.
“…….”
“안 된대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만약 이 사람이 살아 있는 신선이라는 현양진인이 아니었다면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허어! 그래 알았다. 물어봐 주마.”
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마, 대화가 안 풀리는 모양.
“가족들은 어찌했습니까?”
“공손적산의 가족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쫓아냈습니다.”
“……황량한 벌판에 말입니까?”
“네.”
그러자 공손적산 강시 버전의 눈에서 피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양진인은 ‘이 새끼는 뭐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냥 쫓아낸 게 아닙니다! 여비와 식량을 챙겨 줬고 상단은 적절한 값을 주고 인수했습니다.”
그제야 현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체를 타일렀다.
“그것 봐라. 진 문주가 소문은 좀 그래도 잔악무도한 사람은 아니다.”
“…….”
“믿지 않으면? 이미 망자가 된 네가 무얼 할 수 있다는 거냐?”
“…….”
“이제는 이 스승의 말도 믿지 못하는 게냐?”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렇게 도사와 시체가 말싸움을 시작한 지 오 분여.
한참의 설득 끝에 시체가 눈을 감았다.
스르르.
살아 있는 현양진인이 죽은 공손적산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이 걱정되어 이승에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주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았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하마터면 아저씨 귀신에게 가위를 눌릴 뻔했다니.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니다.
“이래서 제게 무덤을 파라고 했던 거군요. 망자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요.”
“아, 그건 빈도의 허리가 좋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영 예전 같지 않더군요.”
“그럼 이 밤중에 둘만 오자고 한 거는…….”
“이 새벽에 다른 사람을 깨우기 미안하지 않습니까. 내일 하기엔 시간이 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
자기도 민망했는지 그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크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빈도가 진 문주께 작은 조언 하나를 해도 되겠습니까?”
“뭐, 그러시죠.”
그가 작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진 문주께서 지신 업은 실로 대단해 보입니다. 무게를 달아 보면 천만 근이 넘을 테고 넓이를 재면 천하를 뒤덮을 수도 있을 정도이지요.”
“도, 돈으로 말입니까?”
그가 정색을 하며 답했다.
“여불위의 사주를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고서야 돈으로 천하를 뒤덮는 게 쉽겠습니까. 피로 뒤덮는다는 뜻입니다.”
“아니.”
그럼 피로 뒤덮는 건 쉽냐고.
곧장 반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무슨 뜻인지 엄청 궁금했거든.
“제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런데……. 피로 천하를 뒤덮는다면 대살성이란 뜻 아닙니까?”
“살성이면 어떻고 활성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를 죽여 열을 구할 수도 있는 게 살성이고 하나를 살려 열을 죽일 수 있는 게 활성인데요.”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고조는 한나라를 세워 전쟁의 굴레 속에서 천하를 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흘린 피가 산천초목을 뒤덮었지요.”
“……대충은 이해가 가는군요.”
대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목숨에 달린 무게를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 보이나 놓치는 것이 없는 법이니까요.”
생명 존중을 기치로 삼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조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허리가 굽혀졌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인.”
“그럼, 빈도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이 밤중에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날이 밝는 대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관뚜껑을 닫으며 답했다.
“썩기 전에 무당산에 묻어 주려 합니다. 저와 십 년을 함께 지낸 곳에요.”
“아…….”
나는 관을 멘 채 훌쩍 날아가는 현양진인을 잡지 못했다.
* * *
“정말요?! 왜 붙잡지 않고요?”
“제자를 묻어 주겠다고 훌쩍 날아가 버리는 사람을 어떻게 잡아. 그냥 보내 줘야지.”
“아이, 그럼 휘호라도 받았어야죠! 그게 장사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묘향의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유명 인사의 친필 사인이 돈이 되는 건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
당대 최고의 종교인으로 꼽히는 현양진인의 사인이라면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빌어먹을…….”
돈을 벌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묘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죠. 그러니까 앞으로 귀한 손님들이 오면 저와 함께 만나요. 꼭이요.”
“고마워. 누이.”
“호호, 뭘 이 정도 가지고요.”
자기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이렇게 신경 써 주다니.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묘향밖에 없다.
“그나저나 인수한 상단은 어때?”
“흐음, 쉽진 않아요. 한마디로……. 엉망진창? 총체적 난국?”
“뭐,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
죽고 못 사는 절친이어도 룸메이트가 되면 삼 개월도 안 되어 원수가 되는 게 사람이다.
평생 사랑할 거라고 결혼을 해 놓고도 죽이네, 살리네 하다 이혼하는 것도 사람이고.
하물며 한꺼번에 상단 네 개를 합쳤으니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온갖 정치질이 난무할 게 당연했다.
“정 힘들면 내가 나서 줄까? 줄 세워서 귀싸대기를 한 방씩…….”
“아뇨. 괜찮아요. 금방 안정시킬 수 있을 거예요. 정 안되면 전부 잘라 버리고 자산만 써먹어도 되고요.”
“…….”
어쩐지 묘향이 점점 악질 경영자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월하루주와는 지낼 만해?”
“아뇨. 그년……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무슨 일 있어?”
“아니, 양령 그년이 글쎄…….”
그렇게 시작된 묘향의 뒷담화는 삼십 분이나 지속되었다.
“응, 그래서. 진짜? 아이고. 그년 진짜 안 되겠네. 잘했어. 그렇지. 누이 잘못이 아니지. 하여간 진짜. 못돼 처먹었구나.”
그 시간 동안 기계적인 대답을 이어 간 끝에 묘향의 산뜻해진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휴우.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이 길어졌네요. 죄송해요.”
“아냐. 답답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정말요?”
“그러엄.”
“호호. 고마워라.”
환한 웃음을 지은 묘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도 졌는데 오늘은 쉬는 게 어때? 요새 매일 늦게까지 일했잖아.”
“아, 일하러 가는 게 아녜요. 친구랑 약속이 있거든요.”
“친구? 화란이? 소소?”
“화란 아씨는 무공을 수련한다고 나갔고 소소는 회천 무슨 대법을 준비한다고 나갔는데요?”
“그럼?”
“누구긴요. 양령이죠. 나이도 비슷하겠다, 말도 통하겠다. 얼마 전부터 친구로 지내기로 했거든요.”
“…….”
“그럼 가 볼게요. 이따 봬요. 호호.”
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자들의 세계다.
여하튼, 그렇게 묘향을 보내고 나니 문제가 생겼다.
‘심심하다!’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곧장 행정실을 찾아갔다.
“소평아. 바쁘냐? 안 바쁘면 술이라도 한잔…….”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술 마실 시간 있으면 와서 좀 도와주십쇼.”
“호평…….”
“저도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이 거절했지만, 이들은 에이스가 아니다.
무릇 호탕한 무인들이 술도 잘 먹는 법.
내게는 아홉이나 되는 술친구가 존재했다.
“다들 오랜만에 술 한잔 어때?”
“특별 강화 훈련 기간이라…….”
“죄송합니다.”
“저도…….”
“다음에 한잔…….”
에라이.
그렇게 개똥벌레 신세가 된 나는 연무장 평상에 앉았다.
달을 벗 삼아 깡백주를 하려 했는데.
곧 생각지도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육 아저……. 어? 어딜 그렇게 꾸미고 가십니까?”
“흠흠, 별거 아니네.”
“아니긴 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 이슈구만.”
“……핫, 뭐?”
“있어, 그런 게. 그나저나 어디 여자라도 만나러 가는 거 같은데?”
“험험, 여자는 무슨, 무도(武道)를 걷기도 바쁜데.”
“무도는 무슨, 매일 술이나 퍼마시면서.”
“뒤지고 싶은 게냐?”
“그러지 말고 나가서 술이나 풉시다. 맛있는 것도 먹고.”
“거참, 약속이 있다는데도.”
그렇게 떠나가 버린 육학.
하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니까.
이미 흥미가 동했고 몸이 달아올랐다.
‘어떤 아줌마를 꼬셨는지 똑똑히 봐야겠어.’
무릇, 문주는 문도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법이니깐 말이다.
‘고백도 방해하고 말이야. 흐흐흐.’
툭.
전 무림을 통틀어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상승의 경공, 비천풍을 펼쳐 대번에 날아올랐다.
마치 한 마리 참새가 된 것처럼 가벼운 몸.
툭툭.
두어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한중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전각에 오를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아재의 특징, 혼잣말을 내뱉으며 잠시간 살핀 결과.
“저기로군.”
하얀색 고급 비단옷을 입은 육학을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된 추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성문 근처에 다다른 육학이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저런 천인공노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이곳은 무림이다.
힘이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육학 역시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에 가깝다.
그는 고수였으니까.
하지만, 환갑에 가까운 그가 스물도 채 안 되는 처자를 만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것도 이쁘고 마음까지 넓은 처자를.
돌아가신 공자님이 봤다면 육학의 멱살을 끌어다 지옥에 내동댕이쳤을 것이다.
‘가만둬선 안 된다!’
질투하는 게 아니다. 이게 다 전왕문을 위해서였다.
무릇 간부의 명성은 문파의 명성.
전왕문에서 희대의 대마두가 탄생하는 꼴을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내 선택은.
“죽어랏! 노망난 영감탱이!”
“지, 진 문주! 여길 어떻게?!”
정의의 철권이었다.
대경한 육학이 재빨리 발을 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파앙!
초속의 십삼타가 그의 전신을 두들긴 것이다.
“큭.”
하지만, 상대는 육학.
당연히 이 정도에 쓰러지지 않았다.
나 역시도 짐작하고 있었고.
“무슨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문답무용!”
그렇게 재차 폭사경을 뻗으려던 찰나.
“호오, 그 나이에 육제를 몰아붙이다니. 과연 투룡이로군.”
중년의 남자가 나와 육학 사이에 나타났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악인을 징벌하는 시간이니 이따가…….”
“반갑네. 나 청추산이라고 하네.”
“처, 청수약왕?”
이 시대의 메디컬 킹이자 청소소의 아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