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격변 구룡(2)
“…….”
“…….”
막상 북궁창을 마주하니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올 때야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흑룡문이 필요하니까 넘기라고 말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뿌리가 뭐였든 간에 북궁창의 입장에선 3대째 물려받은, 자신이 나고 자란 문파였으니깐 말이다.
“큼큼, 어인 일이신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북궁창이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살폈다.
“아, 그게 말이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백번을 생각해도 흑룡문을 인수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기…… 밥은 먹었어?”
“아직 식전입니다. 마침 오늘 첫째의 생일이라 가족끼리 조촐하게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니.”
가는 날이 장날이냐고.
이러면 오늘은 후퇴하는 게 맞겠지.
후계자인 장남의 생일에 문파를 넘기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왕 오신 김에 자리를 같이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들놈도 좋아할 겁니다.”
“아, 아니야. 가족 행사에 남이 참여하는 것도…….”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엔진이 고장 난 에잇 톤 트럭처럼 튀어나온 급발진.
평소 나를 극진히 대하던 그를 생각하면 당혹스러운 반응이었다.
“남이라니요! 저 북궁창! 평생 흑도에 몸을 담고 살았지만, 제 뿌리가 북궁세가인 걸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가 가슴을 두들겼다.
“용체께서는 제게 있어 남이 아닙니다!”
“그, 그러면 뭔데?”
“가족이지요.”
“…….”
“그러니 함께 가시지요.”
“그, 그럼 그럴까?”
그렇게 북궁창을 따라 식당으로 향하자 눈이 튀어나올 만큼 아름다운 세 명의 아내‘들’이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순간 북궁창을 향한 살심이 치밀어 올랐으나 부탁을 하러 온 처지라 간신히 참았다.
그나저나 아내가 셋이나 되는데도 저렇게 사이가 좋다니.
비법을 물어보니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그거야 간단합니다. 사랑을 똑같이 나눠 주면 됩니다.”
무슨 용돈 나눠 주는 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똑같이 주냐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크흠, 그거야 잠자리를 공평하게…….”
“아……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그게 아니라 매일 매일 세 명을……. 크흠, 이것 참 민망합니다. 크흠.”
매일 세 명이라니.
그럼 일 년에 천 번을 넘게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니.’
무슨 물개냐고.
“비, 비법 좀…….”
* * *
식사 자리는 즐거웠다.
세 명의 아내는 공손하면서도 편하게 나를 대했다.
“어머? 천하 영웅이신 문주님께서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으셨다고요? 안 되겠네요. 고향에 있는 제 동생들을 부를 테니 하나 골라서…….”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첫째 부인은 자신과 똑 닮은 동생들을 소개해 준다 했고.
“마음이 넓은 여인이 좋다면…… 제 언니가…….”
섹시미가 넘치는 둘째 부인은 자신의 친언니를.
“호호호, 문주님의 취향을 먼저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보다 예쁜 조카아이가 하나 있답니다. 나이가 올해 열여섯으로…….”
발랄한 느낌의 셋째 부인은 아청법 위반을 계획했다.
그나저나 이쁜 사람들이 이토록 마음도 훌륭하니 참으로 보기 좋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북궁창의 여섯 자녀들 역시 엄마를 닮았는지 다들 외모가 출중했다. 서로 우애도 좋아 보였다.
“용체님! 어떻게 하면 용체님처럼 강해질 수 있나요?”
“앗! 내가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가 책에서 봤는데 영약을 먹으면 세진다고 했어!”
“맞아, 맞아. 나도 본 적이 있어.”
아이들의 순수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우선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하니 하루에 이십 리를 달리고 마보와 웅보를 각각 반 시진씩, 물구나무를 서서 일 리를 거꾸로 서서 걸으면 강해질 수 있지.”
등천각의 기초 커리큘럼으로 실제로 내가 행했던 수련법이다.
“거짓말! 그렇게 해서 언제 강해져요?!”
“맞아요! 밖에 있는 무사님들도 매일 달리고 뛰는데요?”
“뛰어난 무공과 좋은 영약, 훌륭한 스승이 강해지는 지름길이 아닌가요?”
순수는 개뿔.
어디서 뭘 봤길래 저렇게 정확하게 짚어 내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틀린 말도 아니야.’
삼재심법과 검법으로 검강을 뽑을만한 천재가 아니라면 저게 맞긴 하다.
괜히 무림인들이 영약과 무공에 목숨을 거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최선을 다해 순화해서 설명했다.
“크흠, 그것도 기초가 탄탄해야…….”
약 삼십 분에 걸쳐서 겨우겨우.
그렇게 즐거운 식사 자리를 마치고 북궁창의 요청에 응해 후원을 걸었다.
“용체께서 십마련주와 싸우시는 모습을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가족들은 피신시켰다고 하지 않았어?”
“아, 부인들만 피신시키고 아이들은 수비대 쪽에 참여시켰습니다. 무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감당해야 할 부분이지요.”
“…….”
현대였다면 아동 학대로 뉴스와 신문에 대서특필될 만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북궁창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걷고 있으니 앞서 걷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뭐가?”
“흑룡문 말입니다. 용체께서 흑룡이란 이름을 내려 주신 뒤로 무사들의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진일보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 흑룡문의 전경을 둘러봤다.
널찍한 연무장에서 수많은 무인들이 수련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얼굴에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는 거다.
아무래도 뒷골목 흑도로 살 때보다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좋아 보이네. 한 명 한 명 기세도 살아 있어. 잘만 가르치면 고수가 될 이들도 많아 보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하북 곳곳을 돌아보며 인재를 끌어모았습니다. 덕분에 하북성 지리는 빠삭하게 외웠지요.”
비인부전을 부르짖으며 성품과 무재를 확인해 제자를 뽑는 명문 대파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고생했겠군.”
“북궁세가를 위한 일이니, 고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세가의 이름에 깜짝 놀라 쳐다보자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부복을 했다.
“찾아오신 이유를 짐작하고 있습니다.”
“……강요할 생각은 없어.”
“흑룡대로 돌아갈 기회가 찾아왔는데 거절하다니요.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면 그거야말로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흑룡문이 분리되어 나간 지 백 년이나 지났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기엔 너무 긴 시간이지 않아?”
“흑도에 기생하는 수치를 겪으면서도 그 과거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영광스러운 과거가 없었다면 진즉 포기하고 낙향했을 거라고 조부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나를 따라온다 해도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다. 북궁가를 재건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고.”
북궁가를 재건하는 것 자체는 쉽다.
그냥 전왕문의 깃발 옆에 <북궁세가>라고 쓰면 끝이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단순한 부활이 아닌, 과거 서파무라 불리며 천하를 오시했던 영광을 되찾는 거다.
남궁세가가 환골탈태한 사자맹과 비벼 볼 만한 힘을 갖춰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를 알고 있음에도 북궁창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대신 지금보다 가능성은 열 배 이상 높아지겠지요. 그리고 저는 용체께서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빛 속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그만 일어나지 그래? 문도들의 시선도 있는데…….”
“허락해 주실 때까지 절대 일어서지 않을 겁니다.”
“나 그냥 간다?”
“아마 내일 다시 오셔도 이 자세로 있을 겁니다. 모레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의 목소리를 듣고 확신했다. 이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고.
어쩔 수 없이 그의 양어깨를 붙잡고 강제로 일으켰다.
“앞으로 잘 부탁해. 흑룡대주.”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전왕문이 흑룡문을 흡수하는 순간이었다.
* * *
흑룡문, 아니 흑룡대의 합류로 전왕문은 전쟁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전력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솔직히 걱정되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서열 다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철혈구로야 전왕문의 시작부터 함께했으니 창업 멤버라고 할 수 있지만, 흑룡대의 이력도 절대 그에 꿀리지 않았다. 북궁세가에서부터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친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번 전쟁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북궁창의 모습을 보았던 로주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흑룡대의 간부들 역시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는 것으로 내부 정리가 끝나 버렸다.
‘역시.’
명문 정파 전왕문의 멤버들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큰 마찰은 없었다지만, 그래도 훗날을 생각하면 조직을 새로 개편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흑룡문이 합류하면서 무상의 자리에 오른 육학은 그대로 두라는 조언을 했다.
아, 참고로 철혈구로의 총주 자리는 육학과 사제지연을 맺고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고 있는 종극린이 차지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삼 년 안으로 초절정에 오를 게 확실하다나 뭐라나.
“흑룡대는 흑룡대대로, 철혈구로는 철혈구로대로 강해지게 두면 되지.”
“그랬다가는 전력의 불균형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거는 그거대로 좋지 않겠나. 칼이라고 명검만 쓰라는 법이 있을까.”
“흠…….”
“그리고 북궁창 그 친구를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더군. 흑룡대에 절정고수들도 몇 있는 것 같고. 가만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할 걸세.”
“육 아저씨가 인정한다면야 그렇겠지만…….”
“잔말 말고 한번 믿어 봐라. 이래 봬도 무인을 보는 눈 하나만큼은 명불허전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명불허전이라는 눈은 상태가 왜 그런 겁니까?”
“아, 아니 이건……. 별거 아니네.”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됐는데……. 꼭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그렇게 몇 번에 걸친 질문 끝에 육학이 힘겨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크흠. 자네가 전왕께 문도들의 무공을 봐 달라고 했다면서?”
“아니, 그러기야 했는데, 왜 영감님이 맞았냐고요.”
“나도……. 나도 모르겠네. 갑자기 허약해 보인다며 마구 팼네…….”
“…….”
우리 사조님의 교육 철학이 뭔가…… 내 생각과는 굉장히 다른가 보다.
그래도 뭐……. 다 우리 잘되라고 하는 일이니까, 모두가 그의 진심을 알아 주는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싶다.
* * *
청해성 사녕.
사천의 마도는 십마련의 마지막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지나오는 모든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며 천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식량과 돈을 빼앗고 어린아이와 노인은 죽였으며 성인 남녀는 노예로 부릴 목적으로 끌고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도의 부활.
그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십, 몇백 년 동안 천산에 틀어박혀 무공을 수련해야 하는바, 그동안 식량을 수급할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도의 잔당들은 한중으로 진격할 때보다 더욱 많은 피를 뿌리고 다녔다.
그리고.
척.
그런 그들 앞에 각각 암녹색 장포와 검은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하지만 마도의 잔당들은 사천이 넘는 머릿수를 믿었다.
저 둘이 절대고수라 한들 이 숫자를 전부 상대할 방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착각이었다.
“마도의 끝을 보러 왔다.”
검은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손을 흔들자 고열의 불덩이가 튀어나와 바닥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이상하리만큼 순식간에 퍼지는 불길.
필시 바닥에 기름을 먹여 두었던 게 틀림없었다.
“이익! 놈들을 죽여!”
그제야 마도들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공격을 하러 달려 나갔지만.
치이익.
“우웩!”
“크헉!”
이번에는 불길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문제였다.
암녹색의 연기를 들이마시자마자 다들 목을 붙잡고 쓰러졌던 것이다.
그리고.
“구룡성은 마도의 잔당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전부 목을 베어라!”
후방을 기습한 구룡성의 정예들이 마도의 명맥을 끊기 위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