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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영국 의사-11화 (11/249)

11화 선배 부자네 [2]

선배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저택의 또 다른 구역이었다.

구역이라는 말이 집에 쓰기에 적당한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보다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넓다.

더럽게.

똑똑.

하여간 선배를 따라 걷다 보니, 문이 나왔다.

집사가 거대한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란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길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식탁이었다.

과장 좀 하면, 끝에 앉으면 저쪽 끝하고는 대화가 안 될 것 같았다.

“어, 아들 친구 놈들이라고?”

하여간 안으로 들어서니, 분명 정장을 입긴 했는데 정장이 아니라 무슨 가죽 갑옷을 걸친 것 같은 인상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로버트 리스턴 박사님이 오시면 ‘형제여’라고 외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덩치가 그리 큰 것도 아닌데 저런 느낌이라니.

대관절 무슨 삶을 살아오면 저렇게 되나 싶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업턴에서 온 조지프 리스터라고 합니다.”

“저도 업턴에서 온 태평 김이라 합니다. 평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조지프, 평. 그래, 반갑네.”

소개를 했더니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자초지종을 다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대강은 들은 모양이었다.

전사의 눈이 나와 선배 사이를 방황하는가 싶더니 말이 이어졌다.

“그래, 조선에서 왔다고?”

“아, 네.”

“조선이라. 아직 한 번도 가 보진 못했지만 들어 본 적이 있지.”

“아…….”

“아무튼…… 앉게. 아들이 다친 걸 치료해 줬다고?”

“네.”

조선을 아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영국에 건너온 이래 그리 많은 사람을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여기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난다 해도 이 사실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당시 조선은 몇몇 선교사들 외에는 가 본 적 없는, 그야말로 세계의 변방이었으니까.

‘21세기에는 마…… 우리가 오징어 게임도 만들고 어이? BTS도 있고…… 어이?’

지금 이런 소리를 해 봐야 미쳤단 소리 외에 뭘 듣겠나.

해서 난 잠자코 묻는 말에나 답하고 있었다.

“그래, 고맙구만. 나도 의과 대학생 중에…… 죽어 나가는 이가 많다는 걸 들은 적이 있네. 그게 그런 연결고리가 있을 수도 있겠구만. 앨프리드, 우선 이 친구의 말에 따라라.”

아, 그러고 보니 선배 이름도 몰랐다.

앨프리드.

뭔가 조수 같은 이름이었구만.

“음식은 어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선배 아버지가 음식에 대해 물어 왔다.

뭐라 해야 할까.

이게 참…….

‘X같네요.’

그래도 성의 있게 음식을 굽고 한 것 같은데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21세기에도 평판이 그닥이었던 영국 음식이 설마하니 19세기에 더 훌륭할 리가 있겠나?

진짜 개판이었다.

내가 비록 음식에 조예가 있는 편이 아니라지만.

이 재료 주고 시간만 충분히 주면 더 맛있게 만들어 낼 자신도 있었다.

“네, 정말 훌륭합니다.”

물론 난 생존 스킬을 거의 만렙으로 찍어 두었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부렁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기왕이면 부모님이 신부님 따라 프랑스로 갔다면 어땠을까 싶었지만.

뭐 어쩌겠나.

영국에 왔는데.

“저도…… 이렇게 훌륭한 음식은 처음 먹어 봅니다.”

반면 조지프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하긴, 이 불쌍한 놈은 내가 업턴에서 개발새발 떠 준 회 먹고도 기절할 뻔했지.

템스강이 지금보다 쥐 털만큼만 더 깨끗했어도 낚시를 시도해 봤을 텐데.

지금 낚싯대를 드리웠다간 코즈믹 호러에 해당하는 생물체를 낚을 게 분명했다.

“그래, 다행이구만. 시간이 더 있으면 얘기를 나눌 텐데, 나도 런던에 온 게 오랜만이라……. 파티에 가야 해서, 대신이라기엔 뭐해도 아들놈이랑 시간 보내고 있게.”

“네, 감사합니다.”

선배의 아버지는 되게 잘나가는 사람 같았다.

이런 집에 살려면야 당연한 얘기겠지만, 찾는 사람도 많은 듯했다.

그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 밖으로 향했다.

선배, 아니 앨프리드는 엄지로 그쪽을 가리키곤 말했다.

“벌여 놓은 일이 많으셔서. 투자도 많이 받고…… 오실 때마다 여기저기 보고할 데가 많으셔.”

“근데 형님들은 다 어디 계세요?”

아버지도 꽤 열린 사람이긴 했지만, 이상하게 백인 아저씨만 보면 마음이 좀 불편해지는 나였기에 그가 나가고 나서야 말문이 제대로 트였다.

덕분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이제야 물을 수 있었다.

“아, 형님들? 바다에 있거나 외국에 있겠지. 무역업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

“아…….”

다 외국에 있구나.

그렇다면, 평소에 이 집안의 막대한 돈을 움직이는 사람이 선배라는 소린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아닐 것 같긴 했다.

일단 해부하면서 손이 베이는 것부터가 영 어벙한 놈이란 뜻 아니겠나.

장갑을 안 꼈으니 위험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칼에 손잡이가 멀쩡히 있는데 베였어?

그러고 보니까 얼굴도 좀 어벙하게 생겼다.

“아, 방 안내를 아직 안 했구나. 따라와.”

“아, 네.”

앨프리드는 나와 조지프를 데리고 저택의 또 다른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게스트룸이 있었는데, 말이 게스트룸이지 그냥 호텔이었다.

가구부터 해서 후진 게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살면 좋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안내를 마치고 나서려는 앨프리드를 불렀다.

“저…….”

“응? 왜.”

“아까 고무 말이에요. 그거 제가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을까요?”

“고무? 아, 그거. 음…… 뭐 별문제 없을 거 같은데?”

“그럼 가져다주실 수 있어요?”

“어…… 네가 가져오지 왜.”

“집이 너무 커서, 다녀오다가 길 잃을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선배는 선배인데 너무 막 부리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실제로 지금 밖에 나가면 길 잃을 게 뻔했다.

선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그러곤 얼마 안 지나서 고무를 들고 왔다.

아까 내가 집어 들었던 것과는 다른 고무였다.

“많더라, 집에. 이게 사실 엄청 쌀 거야.”

“싸요? 왜요?”

“별로…… 뭐, 어디 쓸 데가 없잖아.”

“어…… 그런가요?”

“응. 그걸 어디다 쓰겠어.”

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21세기의 고무 산업을 떠올렸다.

일회용 장갑만 해도 엄청 많이 쓰지 않나.

그리고 또 어디에 많이 쓰더라.

엄청 쓸 것 같은데…….

막상 보니까 또 생각나는 게 없었다.

‘장갑으로만 쓰나?’

그럼 저 어벙한 선배의 말이 맞았다.

선배는 고무를 들고 서 있는 나를 보면서 말했다.

“가져가도 돼.”

“아, 네 감사합니다.”

“아니, 뭐…….”

나도 좀 어벙해 보였는지, 선배는 어쩐지 불쌍하게 바라보다가 방으로 갔다.

그렇게 나는 고무와 단둘이서만 남게 되었다.

‘생각보다 되게…… 딱딱하네.’

나는 고무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매만져 보았다.

평소 내가 보던 고무, 그러니까 장갑에 비하면 이건 그냥…….

뭐랄까…….

‘갑옷 만들어도 되겠는데?’

가죽보다는 아니겠지만 하여간 엄청 빳빳하고 튼튼했다.

가죽과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방수력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을 부어 봤더니 그냥 주르륵 흘렀다.

이걸 좀 더 얇게만 만들면 장갑이 되긴 할 터였다.

대단한 발견은 아니었다.

원래 장갑은 고무로 만드니까.

‘근데 대체 어떻게 얇게 만들지?’

방법?

알 수가 있나.

의사라고 하면 되게 과학자 같겠지만.

또 우리 스스로도 과학자라고 여기지만, 이런 공학적인 건 하나도 모른단 말이지.

연구 미팅 때도 대개 공대 교수님들이 오시면 우리는 꿈을 떠들지 않나.

너무 열변을 토하니까 앞에서는 가만히 계시는데, 다 끝나면 그건 못 만든다고 했던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공돌이를 갈아 넣으면 되지 않을까…….’

나는 잠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유리가 생각보다 투명해서 밤임에도 불구하고 밖이 잘 보였다.

물론 21세기 도시처럼 밝지는 않아서 그냥 뭐가 보인다는 느낌일 뿐이었지만.

하여간 머릿속을 정리하기에는 딱 알맞은 조도였다.

해서, 나는 그 앞을 서성이며 좀 더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래 봐야 나오는 건 별로 없었다.

결론은 공돌이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고 나한테 고용할 돈이라도 있나?

조지프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 텐데.

‘흐음…….’

돈도 없어, 지식도 없어.

역시 할 수 있는 건 입 터는 것뿐이었다.

의사 주제에 고작 그거냐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사는 생각보다 입 털 일이 꽤 있었다.

특히 연구비 따내려면, 그중에서도 국가 연구비를 따내려면 무엇보다 말을 잘해야 했다.

“뭐라고 털어?”

내가 비록 아는 것도 없고 돈도 없지만, 네 인생을 갈아서 이 고무를 얇게 만들게 만들고 싶다.

와.

나 같아도 총 쏜다.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은 해 봐야 했다.

무엇보다 나는 장갑이 너무 필요하다고.

막연히 외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장갑도 없이 실습과 수술을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수술 장갑이 돈이 될까?’

사실 인식만 바뀌면 돈이 되기는 할 것 같았다.

무조건 껴야 된다!

이러면…….

아니지.

아냐.

‘수술을 하루에 하나 하면 많이 하는 건데…… 뭔 돈이 되겠냐.’

실습까지 다 쳐도, 하루 동안 이 넓은 런던에서도 100개나 쓰려나?

공장을 돌린다고 치면, 공장 만드는 데 들어간 돈을 뽑아내는 데만 수십 년이 걸릴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인식이 바뀔지도 의문이었다.

피로 떡진 칼을 연륜이랍시고 들고 다니는데 손에 장갑을 끼라고 하면…….

‘장갑 말고 다른 거…… 고무 얇게 쓰는 거…… 뭐 없나?’

뭐가 되었건 고무를 얇게, 부드럽게만 만들어 주면 되지 않나.

장갑이야 따로 주문해서 나나 조지프…….

그래, 선심 썼다, 선배까지 셋만 쓰면 되고.

제품은 딴 걸 만들어서 파는 거지.

그 기술이 필요한 제품.

뭐가 있을까.

‘으음…….’

고민을 이어 나가다 보니, 어느새 바깥에 많지도 않았던 불이 주르륵 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운 건물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이었다.

누가 아파서 내는 신음은 아니었다.

“으음.”

전생까지 다 하면 50이 넘는 나이지만.

전생에도 나이를 많이 먹고 죽은 건 아니지 않나?

지금은 한창 호르몬이 들끓을 때고.

정신을 차려 보니까 글쎄, 창문을 열고 열과 성을 다해 듣고 있었다.

나란 새끼…….

못난 새끼…….

“으음?”

너무 못난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니까 고개를 쳐든 다른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이 머리는 위에 머리.

하여간…….

‘어…… 얇은 고무?’

부드럽고 얇은 고무……?

콘돔……?

‘이거…… 이건 대박 나는 거 아닐까?’

아니, 이미 콘돔이 있나?

있으면 그것대로 다행이었다.

그 기술력을 그대로 써서 장갑을 만들면 되잖아.

절대로 찢어지면 안 되는 물건이니만큼 품질이야 보장되겠지.

나란 새끼…….

혹시 천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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