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너네는 뭐 했냐? [2]
정말 교수가 그랬을까?
공기 운운하는 소리를 했을까?
‘했을 거 같다…….’
분명 어제까지는 의심이 들었다.
에이, 설마 그러려구?
응?
교수잖아.
벌써 19세기라고.
산소의 존재도 알고 있는 시기라고.
‘했을 거야. 백퍼…… 시발놈들.’
허나 강의를 듣다 보니 확신이 들었다.
방금 정말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강의실을 빠져나간 교수 놈의 강의를 되새김질해 보았다.
‘병의 원인으로 아직도 체액을 운운하고 있네…….’
4체액설.
이거 들어 본 사람이 있을 터였다.
의사 말고 그냥 일반인도 그랬을 거다.
왜냐고?
히포크라테스가 주장했던 말이거든.
기원전 5세기에!
이 시발놈들아.
‘2000년도 더 된 얘기를…… 아직도 뒤집지를 못했어?’
피가 많아져서 생기는 통증이 있으니까 그걸 빼야 한다고?
오래된 피는 빼 줘야 한다고……?
비장은 그럼 왜 있냐!
조혈 작용은 왜 하고!
우리 몸이 알아서 오래된 피는…… 혈구는 파괴하고 내버린다고…….
“왜 또 씨근덕대고 있어? 실습 가야지.”
“그래, 빨리 가자고. 선배 기다리게 하고 그러면 안 돼.”
지금도 화가 나서 뒈지겠는데 또 실습이라니…….
후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른 실습이라고 하면 또 모르겠는데, 또 산부인과 아닌가.
오늘은 또 어떤 끔찍한 일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아냐. 내가 선택한 의과 대학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해.’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알아야 나중에 예방시켜 줄 수 있지 않겠나.
총체적 난국인 시대이니만큼, 일단 부딪치기로 했다.
동시에 통계도 좀 내 보고.
이 인간들이 뭐가 되었건 어쨌든 과학자 흉내는 내 보겠다며 애쓰고 있지 않나.
그저 시늉에 그친다는 게 문제지만, 어떻게든 이용은 해야만 했다.
‘음.’
그렇게 각오를 하고 온 병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쉽지만은 못했다.
일단…… 사람이 너무 많았다.
병실을 늘려야 했다.
한 병실에 3, 40명은 너무 많잖아.
위로 건물을 더 올리건 어떻게 하건 해야지, 이거…….
“자, 내진 한번 해 볼 사람?”
그뿐만 아니라, 교수도 학생도 여전히 손을 닦지 않았다.
세상에 의료진들이 손 안 닦는 걸 당연시 하는 시대가 있었을 줄이야.
심지어 항생제도 없는 주제에…….
전에도 놀랐는데 오늘 봐도 또 새롭게 놀라웠다.
한 가지 나아진 점이 있다면, 기절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속으론 여전히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잘 참고 있었다.
‘음.’
아니, 취소.
역시나 더 보고 있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빠져나온 다음, 간호사들에게 물었다.
“혹시 저번 달에 이 병동에서 발생한 산욕열 환자 수도 아시나요?”
“음…….”
오, 이걸 고민하네.
놀라운 일이지만, 사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간호사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안 받았으니까.
의사도 그렇지 않나?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교육은 ‘교육’이라고 하기엔 너무 개판이었다.
그마저도 못 받은 이에게 통계를 기대하는 건 너무 무리한 일…….
“제가 알아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어린아이였다.
그렇게 생겼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어린애였다.
나보다도 어릴 것 같았다.
“넌 뭘 안다고.”
“블런델 교수님이 시켜서 다 정리했어요.”
“아…… 블런델 교수님…….”
대화하기 전에 당장은 행색부터 눈에 들어왔다.
난 사실 어마어마하게 운이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조선인인데 이 시기 영국에서 귀족처럼 살고 있지 않나.
진짜 귀족 신분이라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배를 곯아 본 적도 없었다.
잠자리가 크게 불편해 본 적도 없었고.
‘와…….’
그에 비해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는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간호사복이라고 해 봐야 그냥 하얀, 아니 하얬던 앞치마나 걸치는 게 고작인 시절이니 차치하고 넘어간다손 치더라도.
거친 머릿결 하며 부어오른 입술과 부르튼 손 등, 온몸으로 고생을 말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런던에서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겠지…….’
뒷골목에 제대로 들어가 본 건 아니었지만.
간혹 해부학 실습실로 드나드는 이들 중에서는 그쪽에 적을 둔 이들이 많았다.
행색이나 하는 대화를 보면 진짜…… 엉망이었다.
“여기. 여기 있어요.”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어린 간호사는 종이 쪼가리를 보여 주었다.
거기엔 나름 전체 환자와 사망한 환자 수가 적혀 있었다.
“원인 진단명은…… 없나요?”
“네? 아…… 무엇으로 죽었는지요?”
“네. 그런 건 안 적혀 있는 것 같아서요.”
“네. 그건 따로 지시 사항이 없었어요.”
음.
도움은 되겠지만,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원인을 따지지 않고 그냥 사망한 사람은 다 퉁쳐서 적어 놓은 거니까.
“음……?”
아니.
아니었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사망률이 너무 높았다.
“지금 이게…… 열 명 중 한둘씩은 죽어 나간다는 뜻인가요?”
“아, 네. 적다 보니 그렇더라고요. 사실 적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그러지 않았을까요?”
병동 사망률이 15%가 훌쩍 넘어갔다.
이곳이 중환자실이라면 그래 뭐…… 납득할 수 있는 수치였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니지 않나.
산부인과 병동이었다.
산전 검사에서 이상이 있던 환자들을 모아 놓은 곳도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산모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병동.
‘근데 그걸 이렇게 해맑게 얘기를 한다고……?’
끔찍한 수준이라고 봐야 했다.
단편으로나마 훑어봤을 때도 병원이 아니라 살인 공장처럼 느껴지긴 했는데.
이렇게 숫자로 명명백백히 밝혀 놓고 보니 정말로 살인 공장이었다.
“퇴원해서 사망한 환자도 포함한 거죠?”
“네? 아, 아뇨. 그렇게까지 여유가 있진 않아서요. 왕진을 부를 수 있는 분이면 애초에 여길 안 오시죠.”
“아.”
그래도 이게 최대치라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질문을 이어 보았는데, 곧바로 답이 아니, 절망이 돌아왔다.
집으로 보내는 데 어떤 기준이 있을까.
별로 없었을 터였다.
어떻게 아냐고?
다리 자르고도 그냥 막 보내잖아, 이 새끼들.
“으음…… 혹시 이 병동에 조산사분들도 오시나요?”
“네? 아, 네. 아무래도 그렇죠. 모든 사람을 교수님을 비롯한 의사분들이 볼 수는 없으니까요.”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하지 마…….
조산사들이 훨씬 나을 것 같으니까.
간신히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물었다.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네? 조산사를요?”
“네.”
“음…….”
“왜요?”
“아니, 이런 걸 요청하는 의사분은 처음이라.”
의사 아니라 의대생인데…….
이런 말은 별로 소용도 없을 터였다.
딱히 구분이 없는 시대거든.
권위나 계층 같은 건 칼같이 나누는데, 환자 입장에서는 이게 의산지 의대생인지 뭔지 알 수가 없달까?
“실례되는 일은 아니겠죠?”
“아, 네. 물론이죠. 제가 찾아 드릴게요.”
하여간 간호사의 말은 충격이었다.
내가 조산사라는 직업의 역사를 잘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산부인과의 역사보다는 오래되지 않았겠나.
그 말은 곧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선배라는 얘기인데…… 가서 한 번도 배움을 청하지 않았단 의미이기도 했다.
‘21세기야…… 산부인과에 이미 모든 지식이 이관된 지 오래였으니 그렇다 쳐도……. 니들 하는 거 보면…….’
21세기의 산부인과는 사실상 모성 사망률을 제로로 끌어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에서야 뭔가 문제가 계속 있다고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 느낌이잖아.
“아…… 어떤 일로.”
“의대생분인데,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요.”
“나를?”
“네.”
“으음…….”
하여간 나는 간호사 뒤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간호사는 붙임성이 좋은 건지 뭔지,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조산사에게도 말을 잘 붙였다.
정작 조산사는 좀 떨떠름해 보였다.
나 때문인지 간호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의대생이라고……?”
아, 나 때문인 모양이었다.
대놓고 노려보고 있었다.
‘조지프…….’
소환술이라도 익혀야 하나 싶었다.
“아, 여기 닥터 평은…… 조선의 귀족으로서 영국의 문물을 익히러 유학 온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이고요. 하하.”
응?
익혔었나?
다시 태어나면서 패시브 스킬이 생겼나?
“넌 왜 갑자기 혼자 도망가냐?”
“난 또 데이트라도 하는 줄 알았네.”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앨프리드는 간호사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미친놈.
내가 어려 보여도 인마 전생에 서른도 넘었었다고.
그렇다고 연애를 안 하겠다, 뭐 이런 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애랑은 안 한다.
쟤는 애잖아.
노동 착취의 현장이라고.
“하여간……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귀한 사람이에요.”
앨프리드는 간호사에게 향했던 시선을 조산사에게로 돌렸다.
나를 가리키면서였는데, 손에는 어제 내가 꿰맸던 실이 보였다.
다행히 살짝 붓기만 했을 뿐 감염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살렸다, 너는.’
그 보답이라고 할까?
하여간 되게 열심히 나를 변호해 주었다.
효과는 대단했다!
“아…… 도련님이 하시는 말이면 뭐.”
내가 너무 병신처럼 생각하고 있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여기서 끗발 날리는 사람이지 않나.
어찌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이 날 이렇게 대해 준다는 게 일종의 영광일 수도 있었다.
“자, 말해. 후배.”
“네,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우리 사이에.”
나는 감사를 표한 후, 조산사에게 물었다.
“가정 방문도 하시죠? 그…… 왕진 말입니다.”
“네? 아, 네. 하죠.”
“지난달에 몇 번이나 가셨어요?”
“한 열 명?”
“그중에 죽은 사람은?”
“재수 없게 그런 걸…….”
“중요한 문제라서 그래요. 말해 주세요.”
“하나도 없어요. 제가 이 일을 한 지도 꽤 됐는데.”
그녀는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답했다.
그럴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수가 좀 적긴 하지만…….
하여간 다 살았다잖아?
“지지난달에는요?”
“다 기억나지는 않는데, 하여간 죽은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매달 반복되는 수치였다.
그 말은 곧, 확연한 통계적 차이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럼 여기 계신 분들…… 지난달에 왕진 가셨던 숫자랑 죽은 환자분들 수 좀 적어 주실 수 있어요?”
“아니, 뭐 하려고요.”
허나 보다 확실하게 가려면 자료가 필요했다.
늘 그렇듯 자료를 만드는 데는 품이 들었다.
내 품 아니면 남들 품이.
당연히 부정적인 반응이 흘러나왔다.
내가 진짜 십 대 애송이면 당황했을 테지만, 전생엔 교수였단 말이지.
그 말은 곧 사람 부리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는 얘기였다.
“선배. 돈 있어요?”
“응?”
“돈 있으면 좀 까 봐요. 수고금 조로 드리게.”
“아니, 나는 왜…….”
“의학 발전에 이바지 좀 합시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던가.
어딘가에 있다고는 하는데, 나는 아직 못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