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이걸론…… [1]
나는 마차에 올랐다.
처음 올라탈 때만 해도 비행기를 처음 타는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는데 이제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냥 타는갑다 하는 기분이랄까?
가격이라도 알게 되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랬다.
“자, 그럼 갑니다.”
하여간 다 타고 나니, 마부가 익숙한 얼굴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드르르르.
쿠션 따위 없는 바퀴가 굴러갔다.
이것도 고무로 어떻게 하면 좋을 텐데.
그건 또 다른 영역에 있을 것 같았다.
뭐 돈 벌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난 일단 안전하고 깨끗하게 의사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우선은 그걸로 만족이었다.
‘돈, 명예는…….’
21세기 대한민국이야 실력 하나만으로는 뭐가 안 될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여기라면 다르지 않겠나.
사회 구조가 유리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실력이 나머지 의사들에 비해 넘사여서 그랬다.
아니, 넘사도 아니다.
그냥 내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게 뻔했다.
‘풍경 봐라…….’
아쉽게도 난 21세기에 영국을 가 본 적이 없었다.
학생 때 배낭여행이 유행이었음에도 그랬다.
덕분에 전해 들은 건 말뿐이었는데.
지금 내 망막에 비치는 풍경은 내가 아는 배낭여행러들을 죄다 구라쟁이로 만들고 있었다.
여기가 200년 후에는 확 좋아진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어우.”
“쿨럭.”
“콜록콜록.”
풍경만 개판인 것이 아니라, 공기도 그랬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침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해서 주변을 다시 보니 사방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불이라도 났나 싶을 정도로 격렬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공장 지대일 뿐이었다.
그 옆으로는 도시 노동자들이 사는, 판잣집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 마차는 그 건물이라고 해도 될지 모를 것들 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빨리 들어가십쇼. 괜히 딴 데 기웃거리진 마시고요.”
마부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품 안에 총기류가 있음을 드러내면서였다.
우리보고 겁먹으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살짝 겁에 질렸다.
“네네.”
하여간 우리는 공장 안으로 들어갔고, 활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저씨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 아저씨가 들고 있는 건…….
저게 뭘까.
개불인가?
“아, 이리 와 봐라.”
“네네.”
뭔가 하는데 부르길래 일단 달려갔다.
돈 대주는 사람이지 않나.
나중엔 병원 이사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미리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말이었다.
“이거 봐라.”
아저씨는 그렇게 부리나케 달려간 내게 검은색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양새였다.
‘기분 나쁘게 생겼는데…….’
일단 새카맸다.
매끈하지도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걸?
“자세히도 보네. 그렇게 좋으냐?”
솔직히 말하자면 연기 중이었다.
병원에 있다 보면 개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기술을 마스터하게 되거든.
의사라고 해서 환자가 입원하자마자 막 플랜이 짜이고 그런 건 아니지 않나.
맨날 하는 수술이라면야 그래야겠지만.
어려운 환자는 알 수가 없었다.
허나 환자 앞에서 그런 티를 너무 내면 불안해서 어디 치료나 받겠나?
검사받다가 이거 대체 왜 받는 거냐고 소리나 안 지르면 다행이었다.
“어…… 네, 네. 근데 이게…….”
“콘돔이다.”
“아…….”
좋든 싫든 연기력이 팍팍 늘었는데, 그런 내게도 지금은 쉽지 않았다.
이게 콘돔이라고?
콘돔이라는 말을 들으니 비로소 아까까지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부분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왜 이렇게 커.’
코끼리냐?
팔뚝도 들어가겠어.
그런 생각만 하려고 그랬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손을 넣고 있었다.
주먹 정도는 넉넉히 들어갔다.
“이야. 우리 평이가…… 적극적이네.”
아저씨는 그런 날 보며 허허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처음이라 크게 만들었는데…… 이거보다 당연히 좀 줄일 생각이야.”
“그것만 개선해서 될까요?”
나는 여전히 손을 넣은 채였다.
말을 콘돔이라고 들어서 그렇지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내게는 이것저것 실험해야 할 것이 좀 있어서 그랬다.
그 실험이 남들 볼 때도 실험으로 보였을까.
그건 아닌 듯했다.
“근데 일단 좀 빼고 말하면 안 되나? 아니, 만지지 말라고. 내 팔…… 그거 끼고 만지지 말게…….”
아저씨는 질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난 좀 아쉬웠다.
해서 조지프를 만졌다.
“아…… 하지 말라고…….”
조지프도 빠져서 앨프리드를 만졌다.
“아, 하지 마.”
이놈은 말만 이렇게 하고 가만히 있어서 내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럴 이유는 없었는데, 하여간에 그랬다.
물론 대부분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감각이 안 느껴져. 이래서는…….’
딱 봐도 두꺼워 보이긴 했다.
나름 손을 집어넣고 보니 고무 느낌이 나긴 했지만, 겉을 매만져 봤을 때도 의외로 꺼끌꺼끌한 느낌이 일지는 않았지만.
안에 들어간 손에 전해지는 감각은 둔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할 수도 있을 터였다.
막말로 콘돔으로 쓸 게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그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양반들이 하는 소리지.’
수술이 얼마나 예민한 작업이겠나.
살아 있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칼을 대는 작업인데, 그걸 소홀히 할 수 있나?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은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무언가를 박리할 때(벗겨낼 때), 전해지는 느낌이 없으면 사고 치기 딱 좋았다.
두껍고 어쩌고를 떠나 아직은 무리였다.
“안에선 감각이 안 느껴지네요.”
“이야, 날카롭네. 밤새 콘돔만 연구하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으니 아저씨가 이상한 소리를 해 댔다.
아니라고 반박도 했는데 별 소용은 없는 듯했다.
안 듣고 있었다.
아니, 지 할 말만 하셨다.
“확실히 콘돔은…… 이거보다 얇아야 할 것 같아.”
이제 보니 시제품이 이거 하나만은 아니었다.
여러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저씨 손에 들려 있었다.
나머지는 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대충 봐도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불어서 만드나 싶었다.
“느낌이 전혀 안 오잖아. 그래도…… 자네 말처럼 부드러워지긴 했어.”
아저씨는 이제 손에 들고 있던 콘돔인지 뭔지 모를 고무 덩어리를 이리저리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용했을 리 없는 물건임에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조지프와 앨프리드도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함께 뒷걸음질을 쳤다.
“부드러워졌을 뿐입니까. 여전히 방수입니다. 그리고 아주 질기죠. 제가 장담하는데 이거…… 더 얇게 만들어도 어지간해서는 찢기지 않을 겁니다.”
그 사이에서 몸을 숙이고 있던, 키 작은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하얀데 볼은 둥그렇고 발개서 살짝 귀엽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 이 양반이 그…… 화학자로구만.’
이름?
들었는데 기억은 안 난다.
그런 걸 보면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뭐 아주 유식한 편은 아니더라도 굵직한 사람 이름은 안단 말이지.
‘내 덕에 아주 유명해지겠어?’
사상 최초로 고무 콘돔을 아니, 고무장갑을 만든 사람이 될 테니까.
달리 말하면 수없이 많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될 거란 얘기였다.
직접 살리는 건 나지만.
후후.
“다행이군요. 전 또 제 망상으로 끝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아뇨, 아뇨. 고무가…… 이게 아주 재미난 특성이 있더군요. 확실히 이걸로 콘돔을 만들면 대히트할 겁니다. 사장님은 더 부자가 되실 거고, 우리도 부자가 되겠죠.”
“우리……요?”
망상을 더 돌리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그랬다간 이상한 눈으로 볼 게 뻔해서 대강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랬더니 부자 소리가 나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저씨 아니, 사장님을 바라보았다.
사장님은 허허 웃었다.
“내가 뭐 홀랑 먹고 말 줄 알았나. 자본과 사람을 찾는 건 내가 다 했으니 당연히 일부만 주겠지만…… 입 싹 닦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거라.”
사람 좋은 미소였다.
그래서 그런가, 계약서를 들이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보통 이런 걸 사기라고 합니다, 아저씨.’
사기 쳐도 괜찮았다.
난 장갑만 주면 되니까.
“네네.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전 돈은 괜찮고…… 이걸로 장갑을 만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사장님이잖아.
나중에 병원장이 될 수도 있다고?
어차피 줘 봐야 많이 주지도 않을 것 같은데 괜히 뻗댈 필요 있겠나.
해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장갑을 스리슬쩍 요구했다.
“장갑……?”
“네. 장갑이요. 얼마 전에 선배가 손을 크게 다쳤던 거 기억하시죠?”
이 얘기는 처음 듣는 거라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분 욕심이 없다는 걸 말해서 그런지 사장님, 그러니까 아저씨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어, 기억나지. 꽤 다쳤지.”
“네. 근데 시신 해부하다가 그런 식으로 다치면…… 들으셨죠? 간혹 의대생 중에 죽는 사람 있다는 거.”
“그거야 알지. 미아즈마 때문 아니겠나. 병원이라는 곳이 워낙에 공기가 나쁘니.”
아저씨는 내 말에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기는 여기가 훨씬 안 좋은데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근데 그…….”
하여간 나는 우리 무식한 이들에게 뭐라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눈높이 교육에 나섰다.
교수들에게도 이렇게 했는데, 아저씨가 뭐라고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겠나.
“시신에 있는 미아즈마가 손에 있는 상처로 들어오면 훨씬 위험할 수 있어요. 조선에도 그런 속설이 있었는데, 제가 여기 와서 공부하다 보니 확실해졌습니다.”
“아…… 그 미아즈마가 그냥 공기가 아닐 수도 있다, 이건가?”
“네, 어떤 입자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버트 리스턴 박사님도 이에 동의해 주셨고요.”
정확히 말하면 입자라는 얘기에 동의한 적은 없었지만, 알 게 뭐야.
어차피 아저씨가 리스턴 박사님을 만날 일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했고,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렇군. 그럼?”
“이 소재로 장갑을 만들면 보호가 될 겁니다. 근데 아직은 너무 두꺼워요. 해부하는 데 이런 걸 끼면 정확한 해부를 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렇군. 그래. 흐음…… 어떤가?”
아저씨는 흰 얼굴에 붉을 볼을 지닌 화학자를 돌아보았다.
화학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콘돔처럼 얇을 필요는 없을 거고…… 표면이 매끄러울 필요도 없을 테니…… 그건 일주일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렇다는군. 어떤가?”
“좋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이건 그냥 덤이라고 생각하게, 덤. 만약 사업이 성공하면 자네도 돈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니게 해 줄 테니까.”
하하, 그저 아저씨 집에 끝까지 얹혀살게만 해 주십쇼.
나는 간신히 이 말을 참은 채, 밖으로 나왔다.
일주일.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내 뒤만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조지프, 앨프리드에게 해부의 신세계를 보여 줄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