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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영국 의사-32화 (32/249)

32화 웃음 가스 파티 [5]

생각보다 학생들은 생니 뽑기에 열광했다.

친우 조지프, 앨프리드 외에 다른 이들 또한 열띤 얼굴로 손을 들고 있었다.

로버트 리스턴 박사는 그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 발짝 아니, 심리적으로는 진짜 은하수보다 더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내게는 그저 끔찍한 광경이었다.

세상에…….

생니 뽑기를 자원하라는 교수와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친 요구에 열광하는 학생들이라니.

‘확실히 여긴…… 이세계 같아……. 하긴, 그게 더 자연스러운 발상이지.’

진짜 내가 더 힘이 생기고 돈도 생기면 적극적으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지구 10298번 정도 되는 것 같다.

내가 살던 지구의 19세기가 이럴 리 없다고…….

“좋아, 그럼 다 나와 보게나. 남자답게 승부로 정하지.”

내 고민과는 별개로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벌써 열 명도 넘는 학생들이 나와서 우글거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 와중에 리스턴 박사님은 남자다운 승부로 레슬링을 내걸었다.

“어떤가. 치고받는 것도 아니니 크게 다칠 염려도 없고.”

교수님…….

그건 교수님이라서 크게 안 다친 거 아닙니까?

상대편 말도 들어봐야 할 거 같은데…….

‘레슬링…… 딱 봐도 그냥 다칠 거 같잖아?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올림픽에서 본 레슬링은 순수하게 힘과 기술을 겨루는 스포츠 같기는 했다.

“자 그럼, 하게.”

물론 그 생각은 잠시 뒤에 죄다 사라졌다.

“억.”

“으어억.”

미친놈이…… 발로 까네.

레슬링인데…… 어?

다리를 막 공격해?

내가 암만 스포츠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레슬링이 저런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는데.

‘반칙 아닙니까?’ 하는 얼굴로 로버트 리스턴을 봤으나, 이 인간은 꽤 흥미롭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암만 봐도 레슬링과 동네 개싸움을 분간 못 하는 듯했다.

“으아아아! 내가 이겼다!”

허나 그게 급한 게 아니었다.

조지프.

내 친우이자 키가 무려 176도 넘는 친구.

나름 업턴에서는 싸움꾼이었던 친구.

방금 한 명을 이긴 그가 포효하고 있었다.

그 끝에 생니 뽑히는 일이 있다는 건 잊은 걸까?

“야야.”

해서, 나는 다른 놈들이 승부하는 동안 찾아가서 말했다.

“응? 왜?”

전투 흥분에 휩싸인 녀석은 벌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친구인데 살짝 무서웠다.

그럴 만도 했다.

난 그냥 평균 키라고.

게다가 이 녀석 싸우는 것도 꽤 봤고.

아마 중세 시대에 태어났다면 로버트 리스턴 경 밑에서 한자리쯤 꿰찰 수 있었을 테지.

“이 뽑히는 게 뭐 그리 영광이라고 이렇게까지 해.”

“의학의 진보에 기여하는 거잖아.”

기여는…….

기여를 꼭 몸 다치면서 해야겠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에는 오복이라는 말이 있어.”

조상님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아니, 앞으로의 일을 장담할 수 없으니 제가 좀 많이 팔겠습니다.

나쁜 뜻이 있는 건 아니니 괜찮겠죠?

“오복?”

“그래. 거기에 이가 들어가 있어.”

정확히 말하면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양반들은 그런 걸 별로 신경 안 썼던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이게 중요하겠나.

“음…… 오복이 좋은 거지?”

“그럼. 인생에 다섯 가지 복인데. 하여간 그러니까…… 이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야.”

“그건 조선에서 그렇게 보는 거 아니야?”

아니다, 이놈아.

이가 얼마나 중요한데.

19세기 영국이 비록 100세 시대는 아닐지언정, 조지프 정도로 잘 사는 놈이면 60은 족히 살지 않겠나.

아니, 나와 함께라면 솔직히 훨씬 더 오래 살 수도 있었다.

왜냐?

암 정도만 아니라면 감염병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시대거든.

그러면 이가 얼마나 중요하겠나.

“그렇지만…… 너도 알잖아. 우리 조선에서 괜히 있는 말은 없어. 손 닦는 것도 차용했는데 봐라. 사망자 수도 확 줄었잖아.”

“그건 그렇지. 흠…….”

“게다가 웃음 가스를 이용해서 수술할 수 있게 된다손 쳐도…… 솔직히 리스턴 박사님이나 유명해지지, 이 뽑힌 놈이 뭐가 유명해지겠어.”

임상 시험 대상자가 유명해지는 실험이 어딨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가…….”

“그렇다니까? 아, 그래. 앨프리드 선배는 탈락했네.”

이놈은 슬슬 넘어오는 것 같아서 이제 앨프리드를 설득해야 하나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나한테 어제 얻어맞고 뻗었던 콜린이 뒤늦게 오더니 분노에 찬 조르기로 무려 1년 선배를 제쳐서 그랬다.

그러곤 나를 노려보는데, 뭐 이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저놈이야 노려보기만 할 뿐이지만, 나는 어제 진짜 많이 때렸거든.

나까지 가스에 취한 덕에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 것까지 치면, 진짜 거의 100대는 까지 않았을까?

그 증거로 녀석의 얼굴과 머리는 상처로 그득했다.

“그럼…… 하지 말까.”

“그래. 하지 마. 그냥 봐. 뭘 이런 거에 목숨을 걸어. 앞으로도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들어야지.”

좋아.

조지프는 포기했다.

로버트 리스턴 박사님은 아쉬움을 표했지만, 어차피 남은 놈들이 많아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으아아아! 내가 이겼다!”

승리를 거머쥔 것은, 그러니까 이 뽑힐 벌칙에 당첨된 건 의외로 콜린이었다.

몸집은 나랑 비슷한데 악바리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다들 은연중에, 이 뽑히는 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거나.

“아…… 아쉽다.”

“분하다!”

그건 아닌 것 같긴 했다.

병신들이 엄청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우승을 차지한 콜린은 강의실 단상 위에 누웠다.

리스턴 박사님은 어디선가 얻어 온 펜치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도 그렇고 도구 모양도 그렇고…….

‘이거…… 고문하는 건가?’

대사만 치면 술술 불 것 같았다.

불어!

말해!

모르는 비밀도 막 나오지 않을까?

삼엄한 분위기라는 얘기였는데, 나한테만 그런 건지 나머지는 축제라도 벌이듯 박수까지 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와아! 콜린!”

“가스 빨아라!”

“빨리 열어 주십쇼!”

누워 있던 콜린 또한 목에 시뻘건 핏대까지 세워 가며 외쳤다.

그 외침에, 마치 콜로세움의 전사와 같은 몰골의 리스턴 박사님이 비장한 얼굴로 가스통을 열었다.

그러곤 콜린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스읍…… 하.”

콜린 또한 진중한 얼굴로 가스를 흡입했다.

그렇게 몇 번인가 반복하자, 그러니까 파티 때보다 좀 더 흡입하자 콜린의 얼굴이 점차 맛이 가기 시작했다.

흐리멍덩해진 눈과 질질 새는 침.

어제 본 그 얼굴이었다.

후려 까도 모를 터였다.

“아- 해 봐. 어, 가만히 있어!”

그러다 갑자기 콜린이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깔깔 대면서 웃기 시작했다.

‘4단계…… 중 2단계. 망상이 저건가? 발작이라고 해도 좋겠네.’

다른 놈들이야 별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아는 게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로버트 리스턴 박사님도 그랬다.

딱히 무슨 약을 썼을 때 그 반응을 관찰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는 시대라서 그럴 터였다.

허나 나만은 현대 의학의 세례를 잔뜩 받은 몸이었기에, 그렇게 무식한 얼굴로 있을 수는 없었다.

‘자, 이제 다음이 마취…… 그다음은 호흡 정지.’

험프리 데이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렇지 않나?

이게 저명한 학회지에 실린 거라면 딱 믿을 텐데.

지금은 19세기였다.

내가 봐야 확실해지는 시기란 얘기였다.

해서 긴장한 얼굴로 관찰하고 있었다.

미운 놈이지만 호흡 정지로 죽으면 안 될 일 아니겠나.

‘이게 마취가 되어야 앞으로 수술에 쓸 수 있어. 죽으면 안 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명색이 의사다 보니,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이게 나가리 되기라도 하면, 앞으로 마취 역시 나가리 되는 것 아니겠나.

‘하아…….’

여차하면 목에 꽂아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여긴 플라스틱 관이 없었다.

그렇다면…… 째야 했다.

기관 절개술을 해야 한다면, 자신이 없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가만히 있어, 인마!”

그때 로버트 리스턴 박사님이 망상 단계, 그러니까 아산화질소의 2번째 단계에 있던 콜린을 후려쳤다.

“윽.”

“오, 됐다.”

그러자 콜린이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얌전해졌다.

저렇게 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때려서 기절한 걸로…….

“기절한 건 아니야. 눈을 뜨고 있네.”

“오.”

걱정되는 마음에 가까이 가 보니 과연 눈을 뜨고 있었다.

숨도 쌕쌕 쉬고 있었고.

확실히 기절은 아니었다.

‘때려서 다음 단계로 넘기다니…….’

나는 새삼 두려움과 존경심이 샘솟아서 로버트 리스턴을 바라보았다.

리스턴은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잘 보게. 자네 아이디어가 실현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순간이니.”

“네네. 제가 입 벌려 드리겠습니다.”

“좋지.”

난 그 눈이 무섭기도 하고 기구도 무서워서, 콜린의 입속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최대한 넓게 벌려 주었다.

이 인간 특성상, 잘 안 보인다 싶으면 그냥 눈앞의 앞니를 냅다 뽑을 것 같아서 그랬다.

우연한 기회로 앞니 빠진 의사를 본 적 있는데, 거의 은퇴각이 잡힐 정도로 멍청해 보였단 말이지.

이놈이 좋은 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 나가리 칠 정도는 아니란 생각에 인정을 베푼 셈이었다.

“좀 더 벌려 보게. 앞니를 뽑을 수는 없지 않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기우였다.

제자 생니를 뽑겠다고 하는 미친놈이지만 또 앞니는 안 뽑는 인격자였다.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려는 찰나, 기구가 입 안으로 훅- 들어갔다.

나는 그래도 개중에 흔들리는 이를 뽑을 줄 알았는데 진짜 어금니를 잡았다.

기긱.

어찌나 힘이 센지, 기구에 잡힌 어금니가 빠지기 전에 먼저 부서지는 것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뿌욱.

그러다 힘을 훅 하고 한 번 더 주니까 이가 빠져나왔다.

붉은 피가 왈칵 나왔다.

이건 생니였다.

진짜 생니.

앞으로 수십 년은 족히 쓸 수 있었던.

“안 아파?”

“응?”

“오.”

그런 비극을 초래해 놓고선 로버트 리스턴은 웃었다.

진짜로 콜린이 안 아파해서 그랬다.

아니, 아파하기는커녕 그냥 멀뚱히 있었다.

이건 기적이었다.

“오!”

그 순간, 로버트 리스턴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였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기구와 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와장창하는 와중에 리스턴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환자들이 고통에서 해방되었나이다.”

그 광경만 보면 절대로…… 절대로 아름다운 느낌은 아니었다.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콜린, 그리고 옆에서 나뒹굴고 있는 기구와 피 묻은 이.

누가 봐도 백정처럼 보이는 로버트 리스턴.

허나 나는 어쩐지 신성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인간이…… 확실히 명의는 명의구나.’

몰라서 그랬던 거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었던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환자를 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밑에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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