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수혈한다 [4]
공권력이라는 게 참 무섭구나 싶었다.
경찰이, 그것도 경찰서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자마자 많은 것들이 해결되었다.
일단 매혈, 그러니까 피 파는 문제부터 그랬다.
“몰려드는 사람들 내치는 것이 힘들 지경이네.”
“아니, 피가 났을 때 오라니까 왜들 이렇게.”
“뭐…… 굶어 죽게 생겼으니 그렇겠지.”
“그런 사람한테 피를 어떻게 뽑아다 씁니까…….”
블런델의 말마따나 피 팔겠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뒤로 물러나!”
“다 죽고 싶나!”
아마 경찰들이 나와 있지 않았다면 저 인파에 휩쓸려 우리가 수혈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수도 있을 거다.
그만큼 피 팔러 오는 인원들이 많았다.
놀라운 것은 이게 나름 질서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거리에 따라서 요일을 할당했고, 지금 온 사람들은 월요일에 맞는 사람들뿐이라는 말이다.
‘피 가격도…… 존나 후려쳤던데…….’
다들 알겠지만 나는 정말 선한 사람이다.
21세기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굳이 의사를 하고 많고 많은 과 중에서도 중증외상센터에 들어갔을 정도로.
해서 우리 불쌍한 런던의 노동자 계층을 위해 피는 좀 비싸게 사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돈이 많잖아.
어쩌다 보니 자꾸 귀족들과 얽히게 되면서 이렇게 됐으니 좀 베풀 생각도 있었다, 이 말이다.
-응? 피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방금 하지 않았소?
그랬는데, 경찰이 나서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하하, 피영아. 피 한번 팔고 한 달을 놀고먹을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한 이틀 쉬면 된다고 했지? 그럼 이틀 값으로 퉁치면 될 거다.
우리…….
앨프리드의 아버지도 나섰다.
뭐, 사업화하게 되면 내가 다른 사람을 줄 수 있겠나?
당연히 앨프리드 아버지에게 줘야 하는 게 맞는데, 저런 소리를 하셨다.
-맞군. 역시 자네야. 콘돔의 아버지……라서 그런가, 아주 어? 사업 수완이 좋군.
제이미 경이 맞장구를 치고 경찰도 좋다고 하고.
심지어 리스턴 형도 그럼 되겠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할까.
뭐…….
그래도 이틀 치 임금이라도 주겠다는 게 어딘가 싶긴 했다.
런던에서는 일하고 돈 못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그래서 그런가.
그 정도 조건에도 이렇게 대성황이다.
“다 가라고!”
“히익.”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길래 돌아봤더니 리스턴이다.
주먹으로 벽을 쳤는데 주먹이 아니라 벽이 터지는 묘기를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그 무서운 경찰들이 지랄을 해도 꿈쩍도 안 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역시 리스턴.
소드 마스터…….
“아무튼.”
그는 그렇게 벽을 부수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다.
자기 자리는 아니고 블런델 말고 다른 산부인과 교수의 자리였다.
여기 셋이 있어서 자리가 셋인데 하나는 나, 다른 하나는 블런델 그리고 이제 마지막은 리스턴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산부인과 병동에 왜 네가 자연스레 앉냐는 말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잠깐 쳐다봤다가 혹시 눈이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리스턴은 말을 이었다.
“이걸 군에서도 도입한다고 하는군. 맞는 피라…… 하하 참으로 대단한 발상이야.”
“그렇군요. 거참…….”
“근데 자네는 괜찮나? 뭐 앨프리드의 아버지가 섭섭지 않게 쳐주긴 하겠지만, 이 사업권이 이거 보통 커다란 것이 아닌 거 같은데.”
“뭐…….”
글쎄 그렇게 클까?
제대로 된 설비를, 그러니까 혈액을 보관할 냉장고가 개발이 된 이후의 수혈 사업권이라면 어마어마한 이권이 되긴 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뭐 환자가 낼 금액이 상당히 크긴 하겠지만, 그렇다 해서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피? 다른 사람의 피를 받으라고? 이, 이단이다!
일단 모든 환자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저리 떠들고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거부하는 이들도 있는 데다가 기술적으로도 많은 양의 피를 수혈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런 일에 젬병이다.
사업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앨프리드 선배가 잘해 주겠죠.”
“자기 사람한테는 따뜻하구만, 역시.”
“그게 아니라 전 다른 사람에게도 따뜻합니다.”
“하하하하하!”
리스턴은 뭐 대단한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럴 만했다.
나도 왜 저러는지 알 거 같거든.
아까…… 제이미 경이 뭔가 말했는데 꽤 심각한 일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사실 이게 또 이렇게 된 게 어찌 보면 제이미 경 덕분 아닌가? 물론…… 그럼에도 하수구 문제는 진척이 영 느리긴 한데…… 수혈 이거. 나는 기대가 크네. 이거 제대로 정착되면 어쩌면, 수술로 인해 환자가 죽는 일은 없어질지도 몰라!”
아, 그건 아니다.
수혈이 진짜 혁신이긴 하다.
출혈로 인한 사망을 최대한 늦추거나 반전시킬 수 있는 인류 최고의 무기니까.
하지만 혈액팩을 때려 붓는 수준으로 쓰는 21세기에서도 무조건 살릴 수는 없었더랬다.
지금 이 수준에서?
말도 안 되지.
하지만 나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블런델마저 말은 안 해도 기뻐하는 이 순간에 뭐라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제이미 경이 소변이 또 불편하다고 했죠?”
“그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우리끼리 얘기지만 소변 때문에 불알까지 자른 양반일세. 근데…… 소문에 의하면 해리의 무덤이라도 파서 태울 기세라고 하더군.”
그럴 만하다.
불알도 잘랐는데 소변이 또 이상해?
사람이 자기가 원해서 한 수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거, 또 소변이 불편해졌다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거…… 안 될 일이긴 하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간다.
정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가 나겠지.
‘근데 이상하네.’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재발했다는 거 자체다.
사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만, 전립선 비대증에 있어 완치를 꾀할 수 있는 수술을 받은 거 아닌가?
거세야말로 많은 병을 해결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치료다.
근데 재발을 했어?
‘뭐지……?’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진다.
만약 전립선이 다시 자라났다면…….
해리는 억울하게 죽은 거다.
놈이 제거한 것이 고환이 아닌 다른 무언가란 뜻이니까.
남성 호르몬이 여전히 어디선가 나오고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내가 최근에 본 제이미 경의 모습은…… 남성 호르몬이 없어진 사람 그 자체다.
본의 아니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기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동안 꾸준히 수염이 빠지고 근육도 빠졌어.
심지어 목소리도 좀 얇아졌다.
근데 전립선만 다시 커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또 무슨 좋지 못한 생각을 그리하고 있나.”
“네? 아니, 아닌데. 그냥 환자 걱정이죠.”
“근데 왜 웃어.”
“그게.”
좀 웃기긴 하잖아.
불알을 스스로 자른 사나이라니.
그것도 공작님이.
“공작 각하 앞에서는 웃지 말게. 요새 유독 예민하다고.”
“아, 당연하죠. 제가 환자 앞에서 웃은 적이 있습니까?”
“시신 들고서도 음흉하게 웃지 않나…….”
“제가요?”
“의식해서 웃은 것도 아닌 모양이군. 난 또 남들 겁주려고 그런 줄 알았는데.”
리스턴은 살짝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점점 더 억울해지려는 찰나 제이미 경이 병원에 왔다.
사실 이만큼 지체 높은 사람이 병원에 오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왕진으로 처리하는 게 보통인 세상이니까.
실제로 그래도 됐다.
이 시대 병원에는 뭐…….
딱히 특별한 기기나 설비, 인력이 없잖아.
하지만 나는 점점 수술 기구도 그렇고 수혈 기구도 그렇고 많아지고 있는 참이었다.
이젠 왕진을 가려면, 그것도 사전 정보가 하나도 없이 가려면 이삿짐센터라도 차려야 할 판이 되었다.
“음, 여기들 모여 있었군.”
제이미 경은 다행히 그러한 내 사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둘이 오길래 뭔가 했더니 대미언 경도 함께였다.
“듣고 보니 내 아들도 비슷한 증상 같아서 말일세.”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말을 해 주었다.
과연 지체 높은 사람들은 뭔가 달라도 다른 법이었다.
어쩌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해리 같은 놈하고 이런 분하고 같은 인간이라는 게…….
일단 프랑스 놈들은 열등한 게 맞잖아.
“어떤 증상인지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가운데, 나는 애써 환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소변이 자꾸 마렵네.”
답을 한 것은 제이미 경이었다.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당연하다.
쓸데없이 불알을 잘랐다면…….
그것도 억울한데 소문이라도 번지게 된다면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간신히 녹색 옷을 자랑하면 사교계에 데뷔했는데…….
아, 그 녹색, 비소…….
‘시발놈들이 아직도 입는다고 했지?’
정작 사람 죽어 나가는 꼴을 직접 본 제이미 경은 단념했지만 다른 이들은 포기를 못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더 죽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아무튼, 소문이 절대로 새어 나가선 안 되는지 밖에 보초 선 이들이 적지 않았다.
“소변의 양은 어떤가요?”
나도 부디 전립선 비대증 재발은 아니길 바라며 물었다.
그랬더니 제이미 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게 이상하다네. 많아. 전에는 이렇지 않았거든.”
“많아요?”
“어. 많이 나온다네.”
그렇게 답하는 제이미 경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제이미 경은 나이가 많다.
남성 호르몬은 사라졌고.
먹는 건 잘 먹는다.
그럼 질환 중 하나가 잘 생길 수 있다.
“혹시 목이 자주 마르십니까?”
“많이 싸니까 마르긴 하지.”
놀랍게도 이 사람들, 물 마시는 것과 소변의 양과의 연관성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심지어 지금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다.
병이 없는 정상 성인에서는 많이 마시니까 마려운 것이 맞는데, 당뇨가 있으면 아니다.
소변에 당이 있어서 물을 많이 당기니까 자주 마려운 것이고, 그렇게 소변으로 물이 빠져나가니까 목이 마려운 거다.
“의심되는 질환이 하나 있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전립선 크기를 재어 볼까요.”
“아.”
제이미 경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싫긴 할 거다.
아무리 싫어도 나만큼 싫겠냐마는.
아무튼, 나는 손가락으로 직장수지검사를 시행했다.
‘작군…… 확실히 거세를 하면 좋아지는구나. 나도 재발하면 설명 충분히 하고 거세를 할까?’
진짜 효과는 좋다.
21세기 약들이나 치료법이 울고 갈 만큼 대단해.
하여간, 소변 문제에서 전립선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당뇨일 텐데.
‘당뇨는 어떻게 진단을 하나?’
혈당 수치…….
그거 그냥 바늘로 푹 찌르면 바로 나오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피만 나오고 말 거다.
‘당뇨…… 소변에 당이 있다, 이거지.’
그렇다면 단맛이 나지 않을까?
‘내가 먹어 봐?’
아니지.
나는 나도 모르게 앨프리드 선배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