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미쳤군.
(12/12)
12화. 미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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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미쳤군.
2023.06.11.
듀스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로스는 듀이를 불렀다.
주인의 부름에 하던 일도 제쳐두고 한걸음에 달려온 듀이가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조만간 비둘기들이 이곳에 방문할 거다.”
비둘기는 사제를 부르는 속된 표현이었다.
평화의 상징이면서 길거리를 더럽히고 온갖 병을 퍼뜨리는 비둘기처럼 사제들도 앞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뒤로는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신전 측에서 축성이나 제례, 빈민 구제 등 온갖 핑계를 대고 에스페르 영지에 사제를 보내는 건 왕왕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예전에는 에스페르 영지에 신전을 짓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여서 칼로스가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당연히 신전 측 사제들이 에스페르 영지에 방문하려는 것도 전부 거절했었다.
그런데 사제들이 에스페르 영지에 방문한다고? 듀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방문을 허락해주신 겁니까?”
칼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듀이는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전 측에서 어떻게 이곳에 온다는 거죠?”
신전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영주의 허락 없이 영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론 교황의 뜻이라며 마구잡이로 밀어붙인다면 가능했지만, 에스페르 가문에는 통하지 않았다.
듀이가 의아해하며 묻자, 칼로스가 더욱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네?”
역시 모르는구나. 하긴 듀이가 그 소식을 알고 있었다면, 먼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칼로스에게 의견을 물었을 것이다.
“조금 전에 듀스가 신전에서 낸 신문을 가져왔다.”
“듀스……가요?”
“그래. 그 신문에는 나랑 아이레네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더군. 헤드라인은 [북부의 패자, 마녀에게 홀리다.]였어.”
헤드라인만 듣고 기사 내용을 바로 유추한 듀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신전 측에서 어떻게든 에스페르 영지에 들어오려고 상당히 머리를 썼군요. 그러다가 거짓인 게 밝혀지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그럼 꼬리 자르기를 시전하겠지. 그 기사를 낸 건 대신전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곳에 오는 사제들은 대신전 소속이겠죠. 정확히는 방계 신전 소속인 척하는 교황의 개일 겁니다.”
칼로스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놈들이 기를 쓰고 에스페르 영지에 오려는 진짜 이유는 모르겠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아이레네 아가씨가 마녀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일 텐데……이런.”
순간 끔찍한 상상을 한 듀이가 인상을 팍 쓰며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해야 합니다. 비둘기 놈들이 에스페르 영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그래서 아가씨와 만나는 걸 막으셔야 합니다, 주인님.”
“막으려고 한다면 막을 수는 있지만, 후폭풍이 클 거다.”
안 그래도 에스페르 대공은 살육을 즐겨한다던가, 마물의 피를 이었다던가 등등 온갖 흉흉한 소문이 제국 내에 돌고 있었다.
그런데 칼로스가 마녀 의혹을 해결하지 않고 묻으려고 한다면, 신전 측에선 이때다 싶어 제국민들을 선동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황실도 더 이상 중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나서게 될 테고, 그들과 맹약을 맺은 칼로스는 황실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작은 불씨라고 무시했다가 불길이 커져서 집을 전부 태울 수도 있으니, 초기에 진압하도록 하지.”
“그거야 그렇지만……저들이 아가씨에게 무례한 짓을 할까봐 걱정되는군요. 아가씨에게 주인님은 무서운 분이니 도망치라는 둥, 이상한 세뇌를 시킬 수도 있고요.”
“그러지 못하도록 막아야지.”
무덤덤한 대답과 달리 칼로스의 손가락은 불안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일단 비둘기들을 환대할 준비를 하도록. 늦어도 2주 안에는 나타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듀스에게도 경비를 철저하게 하라고 전하도록.”
“…….”
덧붙인 명령에 듀이가 멈칫하자, 칼로스가 혀를 찼다.
“언제쯤 화해할 거지? 100년이면 충분히 화해하고도 남을 시간인 것 같은데.”
듀이가 길게 늘어진 모노클의 은색 체인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이만 화해하고 싶은데, 그 녀석이 좀처럼 받아주지 않네요. 뭐,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살인자니까 그러는 게 당연한 거겠지만…….”
“네가 죽이려고 한 게 아닐 텐데.”
“하지만 저 때문에 죽을 뻔 했죠. 실제로 죽기도 했고요.”
문득 오래 전의 일을 떠올린 듀이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러니 송구하지만, 그 녀석에게 말을 전하는 일은 다른 이를 시켜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네가 하도록.”
칼로스는 의견을 고집했다.
“네 말대로 자주 만나야 빨리 친해질 테니까.”
듀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도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이 없을 때 이야기지요. 이런 상황에선 자주 만나는 게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거, 주인님도 경험해보셔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정곡이 찔린 칼로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듀이가 재차 부탁하고 떠나는 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듀이가 나간 뒤에도 칼로스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너 때문이다.”
오래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너 때문에 그 아이가……!”
탕-!
이내 책상을 가볍게 내려치고 일어선 칼로스는 창문 앞에 섰다. 어느덧 하늘에는 검은 장막이 드리웠다.
구름이 잔뜩 낀 건지 달무리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로스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
그러자 제시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아이레네가 보였다. 저녁 식사 후에는 꼭 산책한다고 하더니, 그 말대로였다.
칼로스는 창틀에 걸터 앉아 아이레네가 산책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아이레네는 느긋하게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성벽 아래 쭈그려 앉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제시를 향해 웃었다.
“…….”
그 모습을 보니 식당에서 책을 끌어안고 환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다른 책을 안겨주면 그때처럼 또 환하게 웃겠지.
“……미쳤군.”
그녀가 웃는 모습을 봐서 뭐 하려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져 칼로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제시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레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느덧 구름 밖으로 고개를 내민 달빛이 그녀의 머리 위로 찬란하게 부서졌다.
*
“책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레네가 칼로스에게 받은 예절 책을 돌려준 건, 책을 받은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식사 예절 부분만 읽은 건가?”
“아니요. 전부 다 읽었습니다.”
“벌써 다 읽었다고?”
칼로스가 아이레네에게 준 책에는 식사 예절뿐만 아니라 사교계 예절 등등 귀족들이 갖춰야 할 예절에 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는 터라 굉장히 두꺼웠다.
그런데 이틀 만에 다 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되묻자, 아이레네가 머쓱하게 웃었다.
“네. 시간이 많다 보니, 금방 읽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아이레네가 칼로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른 책을 읽어도 될까요?”
도대체 나를 얼마나 무서워하면, 저런 걸 묻는데도 내 눈치를 보는 거지.
칼로스는 새삼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떤 책을 읽고 싶지?”
아이레네가 대답하기도 전에 칼로스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다. 그냥 도서관 열쇠를 줄 테니, 직접 가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도록 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이레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되나요?”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레네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발그스레 상기된 두 뺨이 잘 익은 복숭아를 연상시킨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책을 좋아하나 보네.
칼로스는 굳게 닫혀 있던 아이레네의 마음을 조금은 연 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거슬려서 콧잔등을 찌푸렸다.
뭐가 거슬린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
에스페르 성에 온 뒤로 아이레네의 일과는 지극히 단순했었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산책하고 점심을 먹고, 또 산책하다가 저녁을 먹었다.
처음에는 성의 지리를 익히고, 몰래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자주 산책한 거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철옹성과 다름없는 에스페르 성을 몰래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한데도 계속 산책을 한 건, 딱히 할 게 없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집에 갇혀 있는 것보다 더욱 심심했었다.
그래서 아이레네는 칼로스가 책을 줬을 때 무척 기뻤다. 드디어 할 일이 생겼으니까.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할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조금 슬펐는데, 설마 도서관 열쇠를 받게 될 줄이야.
아이레네는 도서관 열쇠가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서랍 안쪽에 고이 넣어두었다.
자기 전에 몇 번이고 열쇠가 서랍에 잘 있는지 확인했고, 일어나서도 가장 먼저 도서관 열쇠가 있는 서랍을 열어봤다.
“…….”
열쇠를 본 눈꼬리가 휘었다.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도서관 열쇠를 받은 게 그리도 좋으세요?”
아이레네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제시가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도서관 열쇠를 받고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은 아가씨밖에 없을 거예요.”
“이상한가요?”
“이상하지는 않지만, 특이하긴 하죠.”
제시는 패들 브러쉬로 아이레네의 긴 머리를 빗었다.
“애초에 주인님에게 도서관 열쇠를 달라고 하신 분도 아가씨가 처음이에요. 보통은 주인님께서 뭘 원하냐고 물어보시면 돈이나 보석 같은 걸 달라고 하니까요.”
“뭘 원하냐고 물어보신 건 아니었어요.”
칼로스는 그냥 책을 좋아하냐고 물었고, 다른 책을 읽게 해주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다음엔 원하는 만큼 책을 읽으라고 도서관 열쇠를 주었지.
“그럼 주인님이 뭘 원하냐고 물어보시면 돈이나 보석을 달라고 하실 건가요?”
“…….”
그건 또 아닌지라 아이레네는 입을 다물었다. 제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곱게 빗은 머리를 땋았다.
“이제 점점 날씨가 추워질 테니, 주인님에게 새 옷을 맞추고 싶다고 말해보세요.”
“아니에요. 지금 받은 것만으로도 과해요.”
아이레네의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에는 옷과 장신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제시가 이 모든 게 제 것이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레네는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했다.
그런데 칼로스에게 새 옷을 맞춰달라고 부탁하는 염치없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드레스 룸에 있는 것들은 봄가을 옷이라 겨울에 입기에는 얇을 텐데요.”
“겹쳐 입으면 따뜻해요.”
하루 벌어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평민에게 두툼한 솜옷이나 털옷은 사치인지라, 아이레네는 지금까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으며 추운 겨울을 보냈다.
“그렇긴 하지만 꼴이 우스꽝스러울걸요.”
“그런가요.”
“그럼요. 그러니 꼭 주인님에게 부탁해보세요.”
물론 아이레네의 겨울옷을 맞추는데, 칼로스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정확히는 이미 허락을 받아둔 거였다.
한데 제시가 이런 말을 한 건, 이렇게 해야 아이레네가 칼로스와 친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른 친해져서 마음을 열어야 꽃이 필 테고, 그다음엔…….
곱게 땋은 머리끝에 리본을 묶던 야무진 손이 멈췄다. 입술 끝자락이 내려가면서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가 약간 떨린다.
“제시?”
화장대 거울로 제시의 이상 행동을 본 아이레네가 의아해하며 그녀를 불렀다.
“아,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요.”
제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깔끔하게 리본을 묶고, 작은 어깨에 캐시미어 숄을 둘러주었다.
“준비가 끝났으니, 이만 도서관으로 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