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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발터의 충고 (19/38)


19화. 발터의 충고
2023.04.06.


평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평온에는 금이 갔고, 명확한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유추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던 까닭이다.


-루이, 대부인께서 아이 소식은 아직이냐고 하시는데요.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후계에 대한 압박.


-저번에도 투자금 회수를 못 했다면서요. 그런데 또 거액을 쓸 수 있도록 대부인을 설득해 달라고요? 난 못 해요.

난항을 겪는 사업.


-이런 말까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당신 요즘 너무해요. 제발 집에 좀 들어오면 안 돼요? 대부인께서 당신 찾으러 저택에 오실 때마다 없다고 대답해야 하는 내 심정도 좀 알아줘요.

그로써 바깥 생활을 전전하느라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루이의 태도까지.

모든 것이 균열을 부추기고 있었다.


-오데트, 제발 별것도 아닌 일에 짜증 내지 마. 나라고 당신에게 불만 하나 없는 줄 알아? 지난번에 모피 사다 줬을 때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잖아.

-고맙지 않은데 어떻게 고맙다고 말해요. 내가 언제 그런 것 사다 달랬어요? 내가 언제 모피가 필요하댔느냐고요. 그런 것 사 올 시간 있으면, 저번에 내가 부탁한 부부 동반 모임이나 같이 가 주지…….

오데트는 걸핏하면 울었다. 걸핏하면 짜증을 냈고, 더는 웃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루이가 좋은 것을 사다 주어도 그녀는 싫다고 했다.


-원치도 않은 물건으로 날 달래려고 하지 말아요. 조금도 고맙지 않아요.

기껏 신경을 써 주었는데 그런 태도를 보이니 루이라고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는 자연스럽게 점점 가정에 소홀해졌고, 마침내는 그 환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당신하고 결혼한 걸 후회해요. 내 인생 최악의 선택이었어요…….

정말이지 지독한 저주였다.

이 빌어먹을 환각에 시달리면서도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서, 그래서 오데트가 정말로 우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 특히 그러했다.

문제는 하도 환각을 봤더니 이제는 현실의 오데트를 볼 때조차 그런 감정이 든다는 것이었다.

오늘만 해도, 오데트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만났을 때 실수를 할 뻔했으니까.


-미안해요, 클로비스 백작. 많이 기다렸죠?

-……정말 그리웠습니다.

-……네?

-아, 아니…… 실수했군요. 잊어주십시오. 오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혹시 이 저주가 매혹의 저주인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모르고 미소 짓는 오데트가 왜 저렇게 예뻐 보인단 말인가.


‘며칠간 제정신 아닌 것처럼 살았으니 어쩌면 일리가 있겠어.’

오데트의 환각에 눈이 멀어 도무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아니,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를 찾는 친구들이 투자 건으로 찾아올 때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루이! 자네 안에 있는 것 다 아네. 정말 만나주지 않을 텐가?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 자네 입지가 약해질 걸세! 그간 투자한 걸 날리고 싶은 겐가, 정말!

그의 친구들은 투자를 핑계로 몰려다니며 술에 여자나 찾는 이들이었으나, 어쨌든 루이는 그들을 훌륭한 인맥으로 써먹고 있었다.

그 덕분에 바람둥이 이미지를 얻게 되었지만 그쯤이야 별 상관은 없었으니까.

술을 좋아하는 이들 주변에는 필히 사람이 많기 마련이었고, 루이는 그걸 적절히 이용해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성으로는 그들에게 또 웃으며 어울려 주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또 그들과 어울리러 가는 거예요? 한 번쯤은 불참할 수도 있잖아요.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간 발품 판 게 전부 허사가 돼. 오래 있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마.

-…….

환각 속 오데트의 우울한 얼굴이 발목을 붙잡았다.

생각해 보면 저들이 ‘꼭 가야 한다’고 운운해서 참석한 모임 중 정말로 영양가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알면서도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그걸 놓을 수가 없었을 뿐.


‘빌어먹을 사업.’

그건 분명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었으나, 그것 때문에 환각 속의 오데트가 몇 번을 울었는지 생각하니 지긋지긋해졌다.

이것이 자꾸 우울해하는 환각 속의 오데트에 대한 짜증인지, 아니면 그녀를 그렇게 울게 만든 자신에 대한 짜증인지조차도 모호했다.


‘대체 왜 이런 환각이 자꾸 보이는 거지.’

제국 내 마법학 최고 권위자조차 해결법을 알 수 없는 저주라니.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나마 현실의 오데트를 만날 때만 날 선 짜증이 수그러들 뿐.


‘정말로 4황녀와 결혼이라도 해야 하나?’

라는 생각까지 들던 찰나.

발터가 저 얘기를 꺼낸 것이다.

기억 속에 없는 허무맹랑한 일이 떠오르는 것에 대해서.


“그런 환각이라니, 정말 신기한 일이지. 백작도 혹 짚이는 게 있나?”

“……없군요.”

“다행이군. 상당히 악질인 저주라서, 내가 아는 경우는 자살까지 했거든.”

“……!”

자살이라니.

루이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발터는 눈치채지 못한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죽을 정도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저주라는데…… 백작에게는 해당이 없다니 다행이지.”

“그…… 그 저주에 대해 혹시 더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짚이는 게 없다더니?”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불쑥 튀어나온 것은 루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퍽 구차한 변명이었다.

발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가, 느리게 돌아왔다.


“……어려울 이유는 없지. 다만 나도 아는 게 많진 않군. 말해 줄 수 있는 건…… 환각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인물이 원흉이라는 것 정도? 그 사람과 얽힐수록 저주가 가속화되는 모양이더군.”

“확실한 겁니까?”

“그래. 아는 이의 경험담이라.”

“그럼 그분께서는……?”

“자살했다.”

그 말을 한 순간, 기묘하게 발터의 눈빛이 차가워진 것 같았다.

어쩌면 루이가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미소가 한계에 다다른 까닭에 든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이 인파 틈에서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클로비스 백작.”

앞서 다가오는 엘로디와, 그 뒤로 루이를 보며 화사하게 미소 짓는 오데트.

은발을 늘어뜨린 채, 금빛 눈동자를 반가움으로 빛내며 우아하게 걸어오는 오데트의 모습은 오늘 그녀와 처음 재회한 순간의 감상과 다를 바 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발터의 목소리가 귀를 관통했다.


“그러니 저주에 걸리거든 되도록 피해 가길 권장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혼란 속에 차게 가라앉은 루이를 남겨둔 채로.


 

* * *



‘클로비스 백작……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오데트는 루이와 발터를 번갈아 보며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엘로디와 휴게실에 다녀온 사이 두 사람의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언제나 미소 짓는 것은 루이였고, 인상을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표정한 건 발터였는데.


‘이제는 에르트만 공작이 미소를 짓고 있네.’

반대로 루이는 미소를 잃고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그렇다고 둘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르거나, 말다툼을 한 것처럼 살벌해 보이지는 않았으니 더욱 의아했다.

오데트는 조심스럽게 루이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클로비스 백작, 혹시 어디 불편한가요?”

“……아닙니다. 그런 것보다는.”

그리고 거기서 말이 멈추었다. 루이와 오데트의 눈이 마주친 까닭이었다.

루이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가, 오데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처음 이 연회장에 올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

그제야 오데트는 바뀐 루이의 태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를,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이런 건 떨떠름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까?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닌데,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잠깐.’

문득 오데트의 머릿속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에 루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할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


‘에르트만 공작!’

하필 엘로디에게 발터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온 직후였던 터라, 이 깨달음은 더욱 그럴싸해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진실에 근접하기도 했다.

발터가 한 말 때문에 루이가 오데트를 껄끄럽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설마하니 발터가 루이와 자신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 줄은 몰랐던 터라, 오데트는 사뭇 배신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런 지저분한 수를 쓰다니……!’

생각해 보면 발터는 오데트에게 클로비스 백작은 안 된다는 등의 말을 하며 이간질을 시도했었다.

그러니 루이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걸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만 간과하고 만 것이다.

오데트는 배신감과 분노를 담아 발터를 노려보았다.

물론 발터는 여유롭게 그런 오데트에게 미소를 지었을 뿐이지만.

그 모습에 발끈하기도 했지만, 오데트는 우선순위를 빠르게 정리했다.


‘에르트만 공작은 일단 두고, 더 곤란해지기 전에 얼른 해명하자.’

좋든 싫든 오늘 연회에서는 루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결혼 계획까지도 고려하면 루이를 최우선순위로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오데트가 루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챠라랑.

연회장에 맑은 소리가 울렸다.

곧 연회장의 첫 춤곡이 시작되니, 춤출 파트너를 정하라는 알림용 차임벨 소리였다.


‘마침 잘됐다.’

춤을 신청하고 자연스럽게 오해를 풀자.

오데트가 반색하며 루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한발 먼저 걸음을 뗀 사람이 있었다.


“클로비스 백작님.”

“……!”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엘로디가 보였다.

그리고 엘로디가 다가가 댄스 카드를 내민 것은 클로비스 백작, 루이.


“저에게 첫 춤을 함께할 영광을 나누어 주지 않으시겠어요?”

 

* * *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무도회의 첫 춤은 응당 쿼드릴로 시작하는 법.

반주자의 쿼드릴 연주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무도회장의 홀에서 스텝을 밟으며, 오데트는 멍하니 생각했다.

연주가 벌써 중반부에 접어드는 와중에도 오데트의 집 나간 영혼은 도무지 돌아올 낌새가 없어 보였다.

이유는 조금만 눈을 돌려도 찾을 수 있었다.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는 엘로디와 루이.


‘……잘 어울리네.’

그렇게 한눈을 팔기가 무섭게, 오데트의 발끝이 함께 춤추던 상대의 발 위로 안착했다.


“어딜 보시는 겁니까.”

그리고 익숙하다면 익숙한 저음이 경고처럼 흘러나왔다.


“……실수였어요.”

“눈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 발이 쉴 수밖에.”

“그것도 실수예요. 한눈을 팔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 정도도 용납하지 못하다니 정말 속이 좁으시군요, 에르트만의 수장께서는.”

그 말에 오데트를 안고 춤추던 상대, 발터에게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내 공주님께서는 눈치가 없으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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