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공생 (5/99)


5화. 공생
2022.07.17.



 
붉은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지안이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섰다.

겨울 햇빛이 길게 늘어진 창가. 뱅갈 고무나무 옆 중년 남자를 본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아빠.”

아빠를 부르는 순간 참았던 그리움이 차올랐다.

의자에서 일어선 재윤은 덥석 안긴 지안의 등을 토닥거렸다.


“잘 있었어?”

“아빠. 아빠!”

“우리 딸, 잘 지냈어? 마감은 끝난 거야?”

“어? 어. 마감 끝났어. 아! 그래서…….”

그래서 아빠는 내 전화를 기다리고만 계셨구나. 지안은 이제야 전화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빠, 어떻게 지냈어? 들어온 지 한참 됐던데.”

“제니스 인터뷰 스케줄도 있었고. 몇 달 만에 들어왔으니 이것저것 처리할 것도 많았지.”

그녀는 맞은 편이 아니라 재윤과 나란히 앉았다.

지난봄 제니스의 순회공연을 위해 영국으로 출국한 지 8개월 만에 만나는 아빠였다.

연달아 소설 두 개를 번역하는 바람에 여름휴가를 반납한 까닭이었다.


“아빠, 우리 뭐 할까?”

“손 잡고 좋은 데 다녀야지. 아빠는 그게 하고 싶은데?”

재윤은 배시시 웃는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지안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 그는 연구직으로 근무했던 회사에서 퇴직을 권고 받았다. 그 후 정해진 순서처럼 제니스의 로드 매니저가 되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지안을 혼자 두는 것이 마음 쓰였지만 아내의 고집은 막무가내였다.


“아빠랑 가려고 내가 맛집 되게 많이 뚫었어. 진짜 맛있는 곳만. 기대해!”

테이블 위 쇼핑백을 지안에게 밀어주며 재윤이 말했다.


“그전에 이거부터 봐.”

“아빠!”

“올해 유럽 쪽 공연이 많아서 열심히 고르긴 했는데.”

지안은 목 폴라 위 펜던트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것도. 아빠가 사준 건데. 선물 받는 나는 좋지만 아빠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아니야?”

“일단 보시죠. 따님.”

“향수? 아빠 센스는 역시.”

“하준이는 잘 지내지? 남자 향수는 하준이 거니까 잘 전하고.”

“하준이는…… 잘 지내.”

“엄마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많이 힘들어해. 몇 년만 더 고생하면 그때는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재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20년 동안 지안이 옆에 있었으니, 이젠 제니스 옆에서 아빠 노릇 좀 해.’


‘그동안 지안이 옆엔 엄마가 없었어.’

아내 은지의 모진 말과 따져 묻지 못했던 말.

스무 살 봄에 덩그러니 한국에 혼자 남겨진 지안은 그에겐 여전히 아픈 생채기였다.


“그런데 아빠,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제니스 공연이 작년보다 많아서 조금 힘들었어. 쉬면 나을 거야.”

투명 유리병의 펌프를 눌러 분사된 핑크빛 액체를 손목에 비비며 지안이 다시 물었다.


“작년에 건강 검진 빼먹었지? 매니지먼트 실장님도 계시는데 일을 좀 줄여. 제니스는 어때? 여전해? 우아하고, 고상하시고.”

“몸에 배서 그런 거야. 언니가 그렇게 싫어?”

“몰라.”

 
Rrrrr. Rrrrr.

벨 소리가 울린 핸드폰은 재윤의 것이었다. 핸드폰과 지안을 번갈아 보던 그는 말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입술을 당겨 씹은 지안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엄마야?”

“너 만난다고 했더니. ……일어나. 아빠랑 데이트해야지.”

지안은 애써 밝은 티를 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왜 안 받아?’라고 묻는 대신 활짝 웃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속상해서 혼자 울 걸 알아서였다.

그녀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아빠와 딸은 그래도 되는 사이니까.

재윤이 지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점부터 갈까?”

“서점?”

“우리 딸이 여름에 출간한 책 사야지.”

“그거 내 책 아니라니까.”

못 이기는 척 서점으로 들어선 지안은 서가를 돌아 장르 소설 코너로 향했다.

지난여름 그녀가 번역한 [백야의 기억].

재윤은 원작자 이름 아래 적힌 지안의 이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표지에 인쇄된 딸의 이름을 보는 것은 언제나 경이로웠다.


“우리 딸 이름이 참 예쁘네. 예뻐. 멋있어.”

울컥, 명치를 통과한 대견함이 얄팍해진 재윤의 가슴을 때렸다.

재윤에게 지안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딸이었고, 짠한 존재였다.


“네가 메일로 보내준 구절은 이번에도 빠진 거야?”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책을 읽는 사람에게 원작자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도 번역하는 사람의 자세니까. ……사심은 될 수 있으면 배제해야지.”

“그래도 사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아빠는 이 글을 옮긴 사람의 팬이니까.”

“그럼. 그 정도는 뭐, 당연하지.”

감정을 배제하는 것은 지안의 몸에 배어 있는 습관이었다.

돌아오는 거절은 항상 두려웠고 제니스의 동생으로 살면서 노력이 헛된 짓이란 것도 알았다.

엄마는 늘 넌 안 돼. 라고 했으니까.

시간이 지났지만 지안은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이젠 김치찌개 먹으러 갈까? 우리 딸이 뚫었다는 기가 막히게 맛있는 식당으로.”

걸음을 내디딘 순간 그녀의 시선이 재윤의 구두로 향했다. 작년에도 신었고, 재작년에도 신었던 구두는 앞코가 낡아 있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당연한 것은 없었다. 아빠가 구두 수선집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재윤에게 팔짱을 끼우며 지안이 말했다.


“아빠, 우리 커플 운동화 신어.”

“운동화?”

“아빠랑 커플로 신으려고 봐 둔 게 있거든. 여기까지 온 김에 같이 사. 여기 2층에 가면 매장 있어.”

신발 가게를 나선 재윤은 딸과 나란히 신은 운동화에 세월을 실감했다. 분홍 구두만 고집했던 딸이 이토록 자랐음을.

***

해피 오피스텔 902호.

거실로 들어선 지안은 쇼핑백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혼자가 된 공간. 적요한 침묵 속 실타래처럼 엉킨 복잡한 마음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좀 내버려 두지.”

황금빛을 쏟아내던 하늘이 어두워지자 지안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발신인은 엄마인 은지였다.

아빠와의 시간은 겨우 반나절이었다.

그 이상을 기다려 줄 마음은 애초에 없었겠지. 엄마의 시간은 언니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아빠와 자신이 언니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엄마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베란다의 민들레 화분 앞에 쪼그려 앉은 지안은 화분을 툭툭 두드렸다.

흘러나오는 말엔 기운이 없었고 위축되어 있었다.


“혹시 여기가 싫어? 볕 잘 드는 들판이 더 좋아?”

홀씨를 활짝 피운 민들레를 꺾은 그녀가 창을 열었다.


“난 그냥 너를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어. 흔하게 볼 수 있다고 귀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밖으로 내민 손을 세차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노랗게 꽃을 피운 민들레도, 하얀 홀씨를 피운 민들레도 사람을 행복하게 하니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창밖을 보며 지안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언제쯤이면 외롭지 않을까에 대해 고민하면서.

모퉁이를 돌아오는 흰색 중형차가 보이자 그제야 거실로 향했다.

남자 향수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현관문을 밀자 복도의 미등 아래로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하준아! 나, 오늘 아빠 만났다. 부럽쥐이?”

복도로 나선 지안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고 뒷걸음질 치면서 하준의 앞을 얼쩡거렸다.

그녀를 못 본 것처럼 하준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다.


“윤하준! 나, 안 보여?”

퍽.


“에?”

하준이 지안의 가슴을 때릴 기세로 내민 것은 분홍색 쿠션이었다. 그녀의 니트 원피스 배 부분을 불룩하게 부풀렸던.


“아! 이거. 내가 두고 왔구나. 아이고. 우리 윤 변호사 고마워라. 이게 없으니까 소파에 누울 때 상당히 불편하더라고.”

입을 다물고 자신을 외면하는 하준을 마주보기 위해 그녀가 발끝을 세웠다.

하준이 901호의 비밀번호를 누르자 삐리리릭 소리와 함께 현관이 열렸다. 문을 당긴 그가 등을 반대로 돌리며 입구를 막았다.

지안의 이마와 하준의 가슴이 퍽 부딪쳤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이쿠야! 왜?”

하준의 가슴은 딱딱했고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지안은 이마로 그의 가슴을 장난스럽게 콩 박았다.


“웁쓰. 돌덩이잖아.”

“…….”

그는 지안의 이마를 밀 듯이 누르며 손가락을 벌려 럭비공처럼 머리통을 잡았다.

지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왜에? 뭐!”

대답은 없었고 뒤로 밀려난 지안을 두고 901호의 문이 매정하게 철컥 닫혔다. 아주 냉정하고 자비 또한 없었다.

눈동자로 정확하게 읽히는 901호 숫자와 미색의 철문 그리고 양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과 분홍 쿠션.

예상에 없던 하준의 불손한 짓에 지안은 멍해졌다.


“뭐지? 이 매정한 문전박대는? 왜 그러는데? 말을 해야 알지? 야!”

그녀는 철옹성 같은 철문을 기가 막힌 듯 보았다. 얘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 한 번 있었구나.

연우 아줌마가
‘나도 너 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라고 했던 날이었다.

‘이모 딸 할래요.’
라고 대답하자 그날 하준은 나를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았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이지만.

아! 하나 더.

사춘기라는 급 성장기를 맞이했던 어느 날.

성적표가 나온 날이었고, 간만에 높은 성적을 기록한 내가 노크도 없이 하준이의 방문을 열었다.

교복을 갈아입던 하준이 팬티 바람으로 걸어와 지금처럼, 그래 딱 지금처럼 머리를 럭비공처럼 잡고 뒤로 던진 다음 문을 쾅! 닫았었다.
 

 
문을 두드리며 지안이 소리쳤다.


“문 열어. 내가 열고 들어가기 전에.”

무거운 철문 너머에서 잠금장치를 이중으로 거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쪼잔함에 진심인 자식.

지안은 주먹을 쥐고 문을 쾅쾅 두드렸다.


“윤하준.”

 
쾅쾅. 쾅.

사랑받는 아이가 되는 건 지안에겐 늘 숙제였다.

하여 그녀는 내 편이어야 할 사람의 거절과 침묵이 얼마나 두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안은 이대로 돌아설 수 없었다. 하준은 언제나 내 편이었던 사람이니까.

두드리는 손에 힘이 빠질 즈음 익숙한 전자음이 들리고 손잡이가 아래로 철컥 내려졌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정수리에 그림자를 만들며 하준이 마주 섰다.

칼같이 단호한 목소리가 단정하게 툭 떨어졌다.


“몰라? 그 쿠션을 보고도 모르겠어?”

“쿠션? 쿠션이 왜?”

하준은 감정을 짓누르고 지안을 내려다보았다.

정중하게 거절해 달라고 했잖아.

지안으로 인해 삶의 단면이 흐트러지는 날이 있었다.

그녀를 챙기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하준에겐 그 버거움을 토로할 곳이 없었다.

싫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조금 지쳤다.

길고 낮게 한숨을 내쉬며 그가 말했다.


“이만 각자 살아보는 건 어때? 그만 기생하시고.”

“뭐?”

“잘 살아. 김지안.”

문은 다시 매정하게 닫혔다.

기생?

도망갈 여지를 주지 않고 블랙홀에 삼켜진 것처럼 지안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감히 저런 말을? 우리 사이에?

그저 오늘 일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인데.

아빠 만난 걸 자랑할 곳이 너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지안은 자괴감을 짓누르며 소리쳤다.


“기생 아니고 공생이거든. 그래, 각자 살아. 누가 더 아쉬운지 보자고.”

쿠션을 꼭 쥔 그녀가 굳게 닫힌 철문에 킥을 날렸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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