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자발적 애정 과다
(20/99)
20화. 자발적 애정 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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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자발적 애정 과다
2022.09.08.
지안은 단우가 밥 위에 올려놓은 소시지를 도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사소한 짓에 마음이 얼마나 흔들리는지 모르나?
“자발적 애정 결핍이라니까. 이런 거로 애매하게 감정 건드리지 마.”
“가만 생각하니까 나는 살짝 자발적 애정 과다인 거 같거든. 그래서 꼭 이걸 하고 싶어.”
단우는 지안의 밥 위에 다시 소시지를 올리며 빙긋 웃었다.
애정 과다보단 우발적으로 넘쳐 나는 생각에 혼란스러운 밤이었지.
저리 해맑게 철벽을 치는데 혼자 수많은 생각과 싸웠으니.
지안이 젓가락을 세우고 찌를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사람을 봐?”
그녀의 젓가락에 단우의 젓가락이 부딪치자 쟁쟁 맑은소리가 났다.
단우는 이 집에서 다시 만났던 지안을 떠올렸다. 천둥소리에 젓가락을 쥐고 웅크렸던 모습을.
“그 젓가락 권법 써먹을 순 있는 거지?”
“우단우 씨! 얼른 먹기나 해. 설거지할 거야.”
“내가 할게.”
젓가락으로 마당을 가리킨 단우가 말을 이었다.
“마당에서 놀고 있어.”
단우는 번잡스럽게 어질러진 주방 정리를 끝내고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었다.
아일랜드 식탁 앞에 자리를 잡은 그의 시선이 마당으로 향했다.
“큰일 났다. 저 풍경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무릎 아래로 내려온 뽀글이 코트를 입고 털이 달린 뭉뚝한 슬리퍼를 신은 지안이 보였다.
콩콩거리다 쪼그려 앉아 말라버린 잔디를 가만히 보는 모습과.
호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넣고 걸을 때마다 차가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모습까지.
단우는 묘한 마음을 짓누르며 다짐 같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잊어야 하면 잊는 거지.
그 순간 눈부신 햇살을 손등으로 가리고 겨울 잔디를 밟던 지안이 자신을 돌아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잊긴 뭘 잊어. 어떻게 지워. 저 얼굴을.”
단우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게 좋았다.
기억하는 것도, 그 기억이 사무치게 그리울 사람도 어차피 자신이니 하려던 것을 하면 될 일이었다.
하여 단 하루만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는 지안과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테라스의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은 단우가 보폭을 넓게 해 걸음을 옮겼다.
지안의 등이 가까워지자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뒤로 꺾고 얼굴을 찡그린 그녀의 눈동자에 단우의 얼굴이 드리웠다.
단우는 심장이 뛰고 있는지 멈춰버렸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지안의 등이 가슴에 닿아 있어서였다.
커다란 손으로 햇살을 가려주며 맑게 웃은 그가 물었다.
“같이 놀러 갈래?”
“놀러?”
“미디어 아트 전시관. 들어봤지?”
반대로 돌아서며 지안은 단우를 올려다보았다.
제주도에 오면 가고 싶은 곳이 많기는 했지.
몇 개의 전시관을 다녀오긴 했지만 오름과 숲, 도서관, 서점, 시장이 동선의 전부였다.
그녀가 되물었다.
“같이?”
“당연히 같이.”
입술을 당겨 물었던 지안은 등을 보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썹을 찡그리자 그의 커다란 손이 다시 그늘을 만들었다.
등 뒤에서 전해지는 단우의 온기에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같이 있고 싶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그녀가 단우에게 대답했다.
“갈게. 미디어 아트 전시관.”
회색 담벼락과 말라버린 잔디가 전부이던 무채색 풍경에 단우와 지안의 웃음이 더해졌다.
***
미디어 아트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지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빛과 소리로 만들어낸 가상공간이 경이롭게 시야를 채우자 그녀의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이런 곳이 있었네.”
코트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단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와 보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주목을 받았고, 분야는 다르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일이라 궁금했다.
이글스 리그는 물론 플레이 라운드의 홍보에 적극적으로 이용해도 될듯싶었다.
자발적으로 플레이 라운드 대표가 된 건 아니지만 그는 이왕이면 한국형 복합 멀티숍을 만들고 싶었다.
멀찍이 앞서가는 지안을 보며 단우가 중얼거렸다.
“오리 한 마리가 되게 신나 보이네.”
파도가 밀려오고 쓸려가는 해변 전시관이었다.
운동화와 양말을 벗은 지안은 가상의 파도를 피해 달아나고 다가서길 반복하며 행복하게 웃었다.
시야에 지안이 가득 담기자 단우는 주먹으로 천둥보다 크게 울리는 심장을 툭 때렸다.
“그만 좀 두드려.”
그는 단정하게 벗어둔 작은 운동화를 들고 지안에게 다가섰다.
밀려오는 파도 앞에 무릎을 구부려 앉아 운동화를 내려놓았다.
“신어. 미끄러워.”
“기분 내보는 거야. 집 앞에 있는 바다는 발이 얼 것 같더라.”
“그런 일을 혼자서 했어?”
“산책 갔다가. 해변에서 신발 벗는 건 ‘국룰’이잖아.”
지안은 운동화 속에 넣어두었던 양말을 꺼내 발에 끼웠다.
작은 발을 감싼 양말이 당겨져 올라가자 발등 위에 다섯 개의 글자가 나타났다.
‘뒤지고 싶냐.’
양말에 굵게 인쇄된 다섯 글자에 단우는 웃음이 터졌다. 하여튼 범상치 않아.
“양말이 너무 불손한데.”
한쪽 발을 들고 주먹을 쥔 지안이 말했다.
“뒤지고 싶냐? 이거 소심한 사람을 위한 양말이야. 싸움할 때 발을 내밀고 우위를 선점하는 거지.”
지안의 머리를 헝클며 단우가 입을 열었다.
“불량 오리.”
“이봐요. 우단우 씨 불량 오리라니?”
“일어나. 밥 먹으러 가게.”
먼저 몸을 세운 단우가 손을 내밀자 지안이 그를 올려다보며 눈썹을 끔뻑거렸다.
눈이 내리던 날도 잡았던 손이었고 어젯밤 귤 바구니를 건네줄 때도 스친 손이었다.
그런데도 지안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단우가 하는 사소한 행동에 마음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탓이었다.
“여기선 혼자 일어날 수 있어. 눈밭이 아니잖아.”
지안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씽긋 웃어 보이며 다음 전시관으로 달아나버리자 단우는 민망한 손을 허망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철벽 한번 견고하네.”
그걸 믿고 함께 오긴 했지만 단우는 뭔가 모르게 서운했다.
마지막 전시관에서 사려니 숲을 닮은 길이 제주의 다른 경치로 바뀐 순간 지안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제주가 여기 다 있네. 그것도 모르고 진짜 열심히 다녔는데. 사려니 숲을 열심히 걸었어. 오름도 오름이지만.”
“오름?”
“일출도 볼 수 있고 일몰도 볼 수 있는 오름.”
단우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마다 오름을 다녔구나.
조용히 지내느라 애쓰는 줄 알았더니 기특하게 계획적으로 움직였네.
“오름 그거, 몇 개나 올랐어?”
“두 개만 더 오르면 서른 개.”
“몸보신도 시켜야겠고. 밥 먹으러 가자. 문어라면 괜찮지?”
지안은 풉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문어 라면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 단우의 입술도 옅게 웃고 있었다.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녀가 말했다.
“문어 라면에 진심이었어. 그날, 나 때문에 못 먹었구나.”
“아니야. 그런 거. ……다른 이유도 있어. 나중에 말해 줄게.”
“문어 라면 먹으러 가. 나도 먹어 보고 싶었어.”
전시관을 나온 단우가 세단을 세운 곳은 라면집이었다.
검색을 하고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라면집은 10년 전 기억과 일치했다.
제주 바다를 닮은 파란 간판에 문어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주인이 문어를 잡아야만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곳.
지안이 참지 못하고 다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문어 라면에 진심인 가게네.”
바다를 향해 있던 단우의 시선에 회상이 담기고 목소리에서 촉촉한 물기가 묻어났다.
“여기서 10년 전에도 같은 걸 먹었어. 어머니와. 그래서 와보고 싶었어.”
“미안. 몰랐어.”
“그게 왜 미안해. 안 그래도 돼.”
마주쳐 오는 단우의 눈빛에 지안은 뭉클하게 입을 열었다.
“네 목소리가 아프게 들렸어.”
“좋은 추억인데 왜 아파? 같이 먹으려고 온 거야. 새로운 추억 만들기.”
“그런 거였어?”
단우가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도는 어머니와 단우의 마지막 여행지였다.
그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딱딱했던 심장의 막이 얇아지고 말랑해진 이유가.
단우는 이 들뜬 설렘이 그녀 때문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싶었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문어를 넣고 끓인 라면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테이블에 올려졌다.
배가 고팠던 까닭에 지안은 입술을 올려 환하게 웃었다.
“예쁘게도 웃는다. 앞에 있는 놈이 좋은 놈도 아닌데.”
나쁜 놈을 자처한 그는 문어를 먹기 좋게 자르고 빨갛게 익은 새우 껍질을 벗겨 지안의 그릇에 덜어놓았다.
지안은 눈매에 힘을 주고 말했다.
“하지 마시라니까.”
“그냥 먹어. 네가 해준 밥을 내가 잘 먹는 것처럼.”
“그거야 고마워서 하는 짓이지.”
눈빛에 쓸쓸함이 스쳐 간 단우가 지안을 보며 입술을 연하게 휘었다.
그는 뭉클한 생각을 털어내고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같이 밥 먹는 걸 좋아하고 나는 반찬 올려주는 걸 좋아해. 각자의 욕망에 충실해.”
“이럴 때 보면 하준이보다 말은 더 잘해.”
“다행이네. 하준이보다 잘해서.”
이쯤 되면 하준을 한번 봐야 하지 않을까? 싱거운 생각이 단우의 뇌리를 스쳤다.
라면집을 나서는 찰나, 단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Rrrrr. Rrrrr.
핸드폰을 들어 보인 단우가 시선을 마주치며 지안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는 보폭을 넓혀 몇 걸음 물러나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나야.”
전화 너머로 태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 J가 죽었어.
“……무슨 소리야?”
- 우정현 짓이야. 사인은 복부에 생긴 상처 때문이고 네 수술 자국이랑 같아.
우정현은 우선호의 아들이었다. 약물 중독으로 인한 간부전 때문에 단우의 간을 공여받은 해송 그룹의 개망나니.
그리고 J는 미국에 있는 가짜 우단우였다. 해송의 사생아였던 자신을 감시하는 우선호의 눈을 속이기 위한 존재.
자신과 외형이 비슷한 J를 보게 된 단우가 부랑자인 그에게 직접 제안한 일이었다.
“우정현이 직접 죽였다는 소리야?”
- 그런 것 같아. 하필이면. 이젠 끝이 보이는데.
단우가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자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목소리엔 서늘한 냉기가 가득했다.
“CCTV 영상 확보해. 그 주변 블랙박스까지. 해송 법무팀보다 빨리 움직여.”
- 그럴게.
“J 가족들은?”
- 동생이랑 할머니는 무사해. 이글스 전략팀 팀원들 귀국할 때 같이 들어올 거야. 원래는 J도 함께였겠지만.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단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J가 자신을 대신해 낙오자처럼 사는 동안 단우는 태윤을 불러들이고 이름을 숨긴 채 이글스를 창업했다.
그리고 몇 년 사이 더 이글스 리그는 유저 수 1억 명 이상을 보유한 게임으로 성장했다.
하루의 평범함도 사치였구나.
J의 죽음에 단우는 발아래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
같은 시간.
휴가를 내고 공항으로 출발하던 하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 찍힌 이름은 건국 법무법인 이건태 대표였다.
“윤변, 휴가 미루고 미국으로 갔으면 하는데. 당장 갈 수 있는 사람이 자네밖에 없어서 그러네만.”
“대표님.”
“해송 그룹 우정현 상무가 일을 친 모양이야. 부탁함세.”
제주행 비행기의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그리고 하준은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재윤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제주도엔 가지 말고 믿고 기다려줘. 무사히 오면 너한테 자랑이 하고 싶겠지.’
지안의 한 달 살기가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제주에서 돌아오면 어떤 이유로든 지안과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을 것도 알았다.
미국에 다녀오면 그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작정하고 저지른 일에 놀란 척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면 될까?
집은 다시 구하는 거로 마무리를 지어야겠구나.
하준은 생각 끝에 제주가 아닌 미국행 비행기 탑승을 위해 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