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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너의 의미 (22/99)


22화. 너의 의미
2022.09.15.



 
지안의 차가 점점 멀어졌다.

단우는 선뜻 돌아서지 못하고 어둠이 짙게 들어찬 길을 우두커니 보았다.

가야 할 사람을 보냈을 뿐인데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혼자 들어선 집 안엔 지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부지런함에 비어 있던 책장이 책으로 채워졌고 따뜻한 색감과 아기자기한 무늬의 쿠션이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주방에 들어서서 냉장고 문을 열었던 단우의 눈동자가 감정을 드러내며 요동쳤다.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밀폐 병에 담겨 있는 뱅쇼, 정확히는 지안이 붙여둔 편지 때문이었다.

동글동글한 손글씨로 여백을 채운 편지를 읽는 동안 단우의 입술 사이로 짙은 숨이 쏟아졌다.

[최고의 레시피를 따라 했는데 네가 해준 그 맛이 안 나. 아마도 그 밤, 내가 가진 외로움은 너에게 큰 위로를 받았었나 봐. 고장 난 보일러에 날씨까지 추웠지만 마음이 따뜻했어. 나의 미친 짓에 같이 미친 척해줘서 고마워. 네가 해준 말처럼 멋진 오리 대장이 되어볼게.]
 


“하아! 미치겠다.”

“미치면 안 되는데.”

태윤의 인기척에도 단우는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하필이면 시야를 채운 것은 마당이었다.

지안과의 시간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폭설로 고립되었던 그 밤 마당에 누웠던 순간과 겁이 날 정도로 쏟아져 내리던 눈을.

주어가 생략되었던 질문과 자신의 대답에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던 눈동자를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단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삶이 더 이상 고되지 않기를 바랐다.


“너무 애쓰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윤은 더 해보라는 듯 손바닥을 펴고 흔들었다.


“계속해.”

“뭘 계속해. ……우정현은 어떻게 됐어?”

“쥐새끼처럼 빠져나갔지. 그 나라가 J 사정까지 헤아려 줄 나라는 아니잖아. 단순 강도 사건으로 종결.”

“세상에 묻을 수 있는 진실은 없어야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

단우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성가신 듯 뒤로 넘겼다.

그는 거실로 걸어가며 태윤이 건넨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이틀 동안 서울에 다녀온 태윤의 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단우는 플레이 라운드의 대표이자 더 이글스의 대표였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며 오랫동안 자신을 도운 더 이글스의 전략팀 팀원 다섯 명을 함께 귀국시켰다. 서울에서 그의 일을 계속 도울 예정이었다.

그리고 J의 동생과 할머니도 함께 귀국했고 태윤이 서울에 다녀온 이유는 저들을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단우가 J의 가족들에 관해 물었다.


“J 가족들은 어때?”

“괜찮아 보여. J가 너 만나기 전에 어지간히 사고를 쳤어야지. 덤덤해 보이더라.”

태윤은 단우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터치해 사진을 띄웠다. 유골함을 든 J의 동생과 할머니의 사진이었다.

J가 계약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세 사람이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가 없다고 해서 파기할 약속은 아니었다.

단우와 나란히 앉은 태윤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낯빛이 왜 그래?”

단우는 비교적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꿈이 다른 해보다 일찍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꿈. J 때문에 신경이 예민했나 봐.”

“며칠 남은 거 아니었어? 안심하고 있었더니. 이것 보라니까. 일이 어긋나려면 꼭 이래.”

“지안이 때문에 중간에 깼어. 간다는 인사하러 올라왔더라. ……다시 잠들었는데 깊게 잤어.”

“아 참. 오늘 가는 날이지?”

“잘 갔을 거야.”

이곳에 마음 같은 건 두지 않았기를 바라며 단우는 고요한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악몽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단우의 밤은 평온했다.

어둠이 물러나고 파란 하늘을 부유하는 구름은 하얀색. 변한 것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단우는 이마 언저리에 손을 얹고 눈썹을 깜빡였다.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상체를 일으켰다.

침실의 문고리가 내려지는 걸 기다려 침대에서 빠져나온 그는 태윤의 어깨를 툭 스치고 계단을 밟았다.

태윤이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는지 걱정하며 물었다.


“잘 잔 거야?”

단우에겐 태윤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는 아침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표현할 다른 말을 찾기도 싫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일상이지만 괜스레 억울한 심정은 말로 설명되지 않았다.

지안을 보내기 싫었고 이쯤 되면 마음을 잘 추스르겠다는 다짐은 우스웠다.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 물잔을 들이켜는 사이 다가온 태윤이 물었다.


“아침은 시금치 된장국으로.”

“안 먹어.”

“그럼 갈치를.”

태윤의 말이 놀려 먹자는 소리처럼 들렸다.

단우는 눈매를 가늘게 뜨고 태윤을 서늘하게 보았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더 섬뜩했다.


“죽을래?”

예민하게 반응하는 단우를 흘깃 본 태윤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고 말은 장황해졌다.


“별거로 다 죽게 생겼네. 같이 먹었던 음식도 못 먹을 정도면 지안 씨를 잡던가 했어야지. 그리고 나는 한국인이야. 삼시 세끼 밥을 먹고 싶다고. 빵 쪼가리가 아닌 밥.”

“토스트.”

“뭐 그럼 그렇지. 무난하게 잼 바른 토스트를 대령해 드리지.”

태윤은 달싹이는 입을 꾹 다물고 식빵을 토스터로 넣었다.

마당을 보던 단우는 괜한 트집을 집으로 바꾸었다.


“집이 마음에 안 들어.”

“에?”

“너무 휑해.”

“미친놈처럼 구는 건 줄 알았더니 아예 미친 거였어? 대표님. 거기까지 해라. 어!”

태윤을 슬쩍 보니 정말 화가 난 사람처럼 입술을 사납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하긴 저걸 붙잡고 툴툴거릴 일은 아니지.

마당과 통한 창을 열고 밖으로 나온 단우는 말라버린 잔디를 밟았다. 지안의 말을 떠올리며 꾹꾹. 꾹.


‘이렇게 꽉꽉 밟아주면 봄에 잔디가 더 파릇해진대. 성격이 되게 좋은 애들이야.’

성격이 좋기는. 독한 거지.

그래서 너는 정말 잔디를 밟으면서 봄에 파릇하고 싱그럽기만 바란 거 맞아?

풍경으로만 바라보던 지안의 생각이 궁금해지다니. 마음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테라스의 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린 태윤이 중얼거렸다.


“저거 진짜 왜 저래? 그냥 내버려 둬도 되나?”

“우태윤!”

단우는 성큼 다가와 태윤을 가리키며 검지를 까딱였다.

커피잔을 들다 만 태윤이 ‘저거 미친 거 맞네’ 하는 눈빛으로 그의 손가락을 외면했다.

하지만 단우는 포기하지 않고 태윤을 향해 말했다.


“거기 앉아 봐.”

“왜에?”

“일단 앉아 보라고.”

껄끄러운 표정을 지은 태윤은 건들거리며 다리를 벌리고 쪼그려 앉아 무릎에 팔을 걸쳤다.


“됐냐?”

미간을 긁어대는 단우는 태윤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태윤의 다리를 가리켰다.


“무릎은 모으고 장딴지와 허벅지를 붙여. 그리고 두 손은 신발 위에 가지런히 모아.”

입술을 다물고 콧김을 훅 뱉은 태윤은 단우가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아보려 애썼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맞지?”

“어.”

“그래? 할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근육 때문에 태윤은 할 수가 없는 자세였다.

굵은 허벅지를 장딴지에 붙이기 위해 애쓰는 태윤은 그저 안쓰러워 보였다.

신발 위에 두 손을 올리면 엉덩이가 올라가고 엉덩이를 내리면 근육 때문에 팔이 벌어졌다.

애먼 태윤을 괴롭히며 단우는 지난밤 현관을 열었을 때 보았던 지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앙증맞게 무릎을 안고 앉아 고개를 들고 뽀얀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마당에 앉아 있을 때도 같은 모습이었지.


“희한하네. 되게 앙증맞아 보이더니 네가 하고 있으니까 궁상맞다. 화장실 갈 사람처럼 보여.”

단우의 말에 급기야 태윤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


“그러니까 누구?”

“지안이.”

저걸 그냥.

단우를 사납게 흘겨보던 태윤은 그래 내가 아니면 저걸 누가 봐주나 싶어 인내를 선택했다.

태윤은 선심이라도 쓰듯 말을 던졌다.


“나는 솔직히 네가 지안 씨 사귄다고 하면 모른 척 둘 마음이었어. ……전화번호 있어. 필요하면 말해.”

“됐어.”

“그래? 그럼 별수 없지. 그나저나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 해. 여기 건물, 준공 떨어졌어.”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당의 잔디를 짓이겼다.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바라보는 하늘이 아리도록 눈부셨다.


 

***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지안의 기분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네가 좋아졌다는 단우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여행은 그런 거니까. 작은 감정이 쓸데없이 크게 부풀려지는.

생각을 덜어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작은 창 너머로 하얗게 피어올라 넓게 퍼진 구름이 보였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지안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정신적으로 조금 더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하고 싶었지만 망설였던 일을 해볼 생각이었다.

당장은 집을 구해야 했고 풀어야 할 일이 많았기에 흐트러지지 않게 제 결심을 꾹꾹 다졌다.


“다 잘 될 거야.”

그녀는 시선을 내려 핸드폰을 열었다.

며칠 사이 부재중 통화목록을 채운 이름은 하준이었다. 하준이를 원망했던 마음은 희미해져 있었다.

기생이란 말이 처음엔 화나고 아팠지만 다른 계획을 세운 뒤엔 아니었다. 그냥 조금 서운한 정도.

최다솜 상무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하준이 화가 난 이유도 충분히 납득되었다.

그녀가 하준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작 따로 있었다.

더는 너와 이웃으로 살지 않겠다. 저 말을 했을 때 하준이 진심으로 응원해주길 바랐다.

공항 철도에서 내린 지안은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서울에 돌아왔지만 그녀에겐 돌아갈 집이 없었다.

해피 오피스텔 902호는 이제 남의 집이었고 보관이사를 했던 터라 짐은 경기도 외곽의 컨테이너에 있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기면 하준이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삼성동 본가를 생각했지만 벌써 엄마의 날 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포기했다.


‘제니스 스케줄 안 도울 거니? 누구 덕분에 지금까지 편하게 사는지는 알고 있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찾아가서 굳이 저 말을 들을 필요가 있나!

상처가 더러워서 피하나 아파서 피하는 거지.

지안의 입술 사이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하여튼 말은 잘 지어내요.

그녀가 우두커니 앉아 정차하는 버스를 그냥 보내는 사이 귓전으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오리.”

오리? 지안은 고개를 번쩍 들고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패브릭 소재의 오리 인형을 들고 있었다. 배를 누르면 꽥 소리가 나는 인형이었다.


‘사랑받는 오리로 살아. 그중에서 제일 힘센 오리 대장.’

불현듯 단우의 말이 떠오르는 바람에 지안은 가만히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씩씩하게 살아야지. 대장이 되려면.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핸드폰을 열어 소민의 전화번호를 꾹 눌렀다.

***

지안은 골드 리버풀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501호의 도어 록을 해제시켰다. 소민의 집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들어선 지안의 목소리가 단번에 커졌다.


“이 꼴이 다 뭐야?”

그녀는 전화 통화를 했던 소민의 말을 떠올렸다.


‘집이 좀 엉망이긴 한데. 우리가 그런 거로 내외할 사이는 아니잖아. 일단 먼저 가 있어. 나도 곧 출발할게.’


“이소민. 이건 그래도 너무 …….”

지안은 말허리를 뭉툭 자르고 허탈하게 웃었다.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은 902호를 볼 때마다 하준이가 하던 잔소리였다.

싫다는 소리에도 기어이 청소를 해주던 하준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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