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나한테 왜 이래 (33/99)


33화. 나한테 왜 이래
2022.10.23.


우선호는 단우를 미국에 쫓아낸 그때를 떠올렸다.

당시 정현에게 간을 공여하고 단우는 몸이 성치 않았었다. 간호를 하기 위해 동행했던 김 씨는 사실 그를 감시하기 위해 자신이 붙인 사람이었다.

매달 보내오는 보고서엔 낙오자로 사는 단우의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동거인 김 씨에게 속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김씨가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선호는 단우를 조사한 최근 보고서를 보면서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는 완벽한 제 계획을 생각하며 입술을 휘었다.

마이클 회장은 귀국 기자회견에서 플레이 라운드 2호점, 3호점 오픈을 언급하며 파트너사와 협업을 발표했다.

고객 평가에서 최저점을 받은 해송 유통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도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더 이글스를 해송에 합병할 마음을 먹은 것이다.

단우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을 자신은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였다.

우선호의 비열한 웃음과 함께 정현의 말이 둥근 탁자에 흩어졌다.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 따윈 안중에도 없는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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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새끼 같은 놈.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 죽고 싶어 환장하는 모양인데.”

우선호는 못마땅하고 차가운 말로 정현의 입술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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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다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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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연회장엔 단우의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차갑고 고요한 눈동자로 우선호를 곧게 보며 그의 신경을 긁었다.

네깟 놈이 아무리 짓밟아도 절대 멈추지 않아.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세월 동안 뭘 준비했을지 기대해.

싫다고 부정해도 자신에겐 우선호와 같은 피가 흘렀다. 한계를 정해놓지 않은 잔인함이 누가 더 깊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우선호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단우는 조도를 낮춘 홀을 둘러보며 대표로서의 연설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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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플레이 라운드는 그 가치가 고객에게 직접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불어 독점이 아닌 입점한 협력회사와 주변 상권과의 공생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박수가 쏟아지자 단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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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플레이 라운드 코리아는 쇼핑문화를 선도하며 대한민국의 자랑이 될 수 있는 기업이 되겠습니다.”

단우의 목소리가 지안의 등줄기를 긁고 뜨겁게 몸을 감쌌다.

지금 자신은 일을 하는 중이었고 설사 단우가 회사의 대표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머리와 달리 떨리는 손끝과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우단우 그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었고 아직도 좋은 사람이었다.

더 엄밀히 따지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 우연히 만났을 때 반갑고 좋았던 사람. 그의 말처럼 우연이 겹쳐 특별한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안의 마음엔 부정적인 기운만 가득 차올랐다.

단우가 했던 말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바싹 타오른 입술을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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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하는 거 맞잖아. 큰 장사.”

그 순간이었다. 지안의 정수리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익숙한 목소리가 흩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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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안. 여기서 뭐 해? 그 유니폼은 또 뭐고?”

하준은 시선을 내려 조금 전까지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던 지안의 실체를 확인했다.

홀을 오가는 모습에 지안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여겼고 조도가 낮은 조명 아래에서 저절로 눈이 따라 움직였다.

몇 분 되지 않아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지안이 언니 제니스의 스케줄을 돕는 중이라 생각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제니스의 축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뒤늦게 그녀의 유니폼이 보였다. 그리고 귀에 착용한 이어셋과 내빈을 안내하는 행동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이곳에서 지안을 내려다보는 이유였다.

하준은 지난번 일로 서먹하게 구는 지안을 모른 척하며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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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수업은 어떻게 하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지안은 ‘이건 아니지.’ 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하준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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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윤하준이세요? 여기서 네가 나오면 너무 낡은 전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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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로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야. 나야 당연히 초대받았고. 그런데 너는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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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대답도 하네. 진짠가 봐.”

지안은 벌어진 입술을 다물며 정면을 보았다. 저절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빠는 사라졌고 우단우는 대표님이 되어 나타났으며 윤하준은 이런 행사에도 초대를 받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세계적인 아티스트 제니스까지 이곳에 있다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한 곳에 다 모아 둘 수가 있지?

이 정도면 놀라서 자빠질 정도가 아니었다. 뭐가 이렇게 엿 같냐고 욕을 날려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지안은 정중하게 앞을 가리키며 하준을 보았다. 그만 돌아가 달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무전기와 연결된 이어셋의 투명 줄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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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일하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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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은 학원 강의였어. 아니면 번역이거나. 그런 애가 여기 있으니까 놀라서 물은 말이고. 반응이 너무 뾰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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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했어. 플레이 라운드 고객 지원부. 근무처는 도서관이야. 오늘은 보다시피 다른 일을 돕는 중이고. 됐지?”

지안은 혀끝에 올려 둔 나머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계약직이라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번 유진의 반응으로 보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하준의 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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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여기 있는 거 보면 정식 사서는 아닐 테니 계약직이겠네. ……일하고 싶으면 정규직 자리 알아봐 줄게. 사서직으로.”

하준의 말이 타박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소리인 줄 알지만, 지안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속 입술을 당겨 물며 하준에게 자리에 돌아가기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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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 로펌 대표님이 너 찾으시는 것 같으니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하준이 돌아가자 지안은 핀 조명이 들어온 무대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 단우가 서 있던 곳이었다.

사회자의 소개에 바이올리니스트 제니스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신들린 듯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제니스를 보며 지안의 심경은 더 복잡해졌다.

지안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정글 같았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곳. 힘이 없는 약자는 웅크리고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곳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음을 연주한 제니스가 활을 튕겨 팔을 높이 올리며 공연이 끝났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무대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어도 그녀의 열정은 정말로 빛났다.

엄마의 말을 잘 들어서 아티스트가 된 제니스가 부러운 게 아니었다. 자기 일에 열정을 가진 그 마음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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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니 진짜 멋있다. 엄마가 좋아할 만해. 인정.”

지안은 한없이 작아지고, 약해지고, 못나게 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주변을 맴돌다가 시간이 끝나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아주 간단했고 쉬운 일이었다.

지안은 결의를 다지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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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안, 이곳에 있는 어떤 누구도 네 마음 따윈 안 궁금할 거야. 마주치면 일하는 중이니까. 그냥 그렇다고 하면 돼.”

뒤죽박죽 뛰기 시작한 심장을 지그시 누른 순간 이어셋에서 이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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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지원팀. 공식 행사 마지막 순서입니다. 곧 연회가 시작될 겁니다. 외부 행사팀에서 음료 케이터링 준비 중입니다. 각자 위치에서 홀 상황 체크하세요.]

지안은 연회 준비를 위해 걸음을 옮기며 단우를 생각했다.

대표님이라니.

자신과 같지는 않아도 저렇게 대단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대형 쇼핑몰의 대표라면 어느 정도의 사람일까?

재벌이겠지? 집안도 되게 좋은 데다 학벌도 좋고 결혼 상대도 정해져 있을지 몰라.

지안은 지금까지 단우가 저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큰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들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보니 자신과 단우 사이의 경계는 선명했다.

우단우. 그의 마음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떠올릴 때마다 뜨거운 기운이 몰리며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이젠 그래선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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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터링 팀과 함께 홀에 나오자 천정의 조명이 밝아져 있었다.

샴페인 잔을 기울이는 화려한 복장의 사람들 속에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이 섞여 있었다.

누가 보아도 눈에 띌 수 있게 검은색 베스트와 하얀색 셔츠를 입고 가슴엔 명찰을 달고서. 마치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삐딱해진 지안의 시야에 제주도 돌담 집의 주인 남자가 보였다.

그와 나란히 서 있는 단우와 맞은편에 서 있는 제니스가 보였고 제니스에게 샴페인 잔을 건네는 하준이 다시 시야를 채웠다.

그들은 눈빛을 건네며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저 네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났겠지? 설마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을까?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서서히 몰려오더니 해일처럼 한꺼번에 그녀를 덮쳤다.

지안은 세상이 저를 버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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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이럴 수는 없어.”

작은 불씨에 불과했던 덩어리가 순식간에 뜨겁게 타올랐다. 몸을 관통해버린 불운한 기운에 몸이 빨갛게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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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고 저들은 그냥 저들이야.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저런 다짐 따윈 다 소용없었다. 오늘 여러 번 놀랐던 마음은 자존감을 깎아내리기 바빴다. 한없이 쪼그라들며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뭐가 이래. 나한테 다 왜 이래?

지안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이내 두 걸음을 떼고 연이어 세 번째 뒷걸음질을 쳤다. 좀 더 멀리 달아나려는 걸음걸이는 점점 빨라졌다.

싫었다.

저들 중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은 버거웠고 할 수만 있다면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때, 연이어 와장창 쨍그랑 소리와 함께 지안의 주변에 무언가 와르르 쏟아졌다.

케이터링 직원이 세워 둔 트롤리와 그녀가 부딪친 것이다.

트롤리가 넘어진 소리는 홀을 채운 은은한 클래식 연주보다 크고 날카로워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안은 바닥을 적신 흥건한 샴페인 기포가 사르르 가라앉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깨어진 샴페인 잔과 날카로운 유리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케이터링 직원 또한 어쩔 줄 몰라 멍하게 서 있었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단우와 하준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단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음이 가득 차 있는 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진 것처럼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숨을 깊게 들이쉰 그녀는 교육 매뉴얼대로 정자세를 취하고 고개를 숙여 주변에 사과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고객 지원부 소속의 본분으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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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신속하게 현장 정리하겠습니다.”

이어셋으로 현장 상황을 알린 지안은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몸을 낮추었다.

가쁘게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이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지은 뒤 저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냅킨으로 감싸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현장 정리를 위해 다른 팀이 오겠지만 뭐라도 하는 것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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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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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미경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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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해요.”

하필이면 트롤리엔 음료뿐만 아니라 한 입 거리로 조리된 핑거 푸드가 함께 있었다. 여러 명의 직원이 흩어져 엉망이 된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얄팍해진 마음은 이제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었다. 명치가 조여들며 숨쉬기도 버거운데 귓불과 하얀 목이 붉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이곳보다 더한 바닥은 없을 것 같아서 할 수만 있다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손가락에 유리 조각의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진 건 순식간이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지안은 저도 모르게 짧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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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안의 손가락에 붉은 선 하나가 생기더니 피가 고이며 손끝에 동그랗게 맺혔다.

다른 손으로 베인 상처를 꼭 잡고 시선을 들었더니 커다란 그림자 세 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단우와 하준. 그리고 제주 돌담 집의 주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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