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삼자대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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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삼자대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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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삼자대면 (1)
2022.11.03.
단우의 숨결이 지안의 여린 피부를 파고들었다. 소리 없이 몸 안에 퍼지고 모든 감각이 그의 호흡으로 채워졌다.
한밤중의 도서관은 조용했고 심장 뛰는 소리는 북소리처럼 점점 커졌다.
목 언저리의 열기가 그의 입술 때문인지 체온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잡을락 말락 망설이던 단우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Rrrrr. Rrrrr.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며 고조된 분위기를 흔들어 놓은 건 지안의 핸드폰이었다.
[윤하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하준이었다.
지안은 조심스러웠던 숨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핸드폰을 열었다. 잠시 머뭇거린 사이 전화가 끊어지며 문자가 도착했다.
띠링.

[손가락 괜찮아? 혹시 모르니까 주사도 맞을 겸 병원에 같이 가줄게. 전화 줘. 아니면 전화를 받든가.]
단우는 언뜻 보인 문자 내용에 상체를 바로 세운 뒤 지안과 나란히 기대섰다.
그는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며 지안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주사?”

“파상풍 주사 말하는 것 같은데. 의무실 박 선생님도 예방 차원에서 접종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는 하셨어.”
지안은 하준에게 괜찮다는 답문을 보낸 뒤 단우를 돌아보았다. 그가 독서 테이블에 앉혀둔 까닭에 눈높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독서 테이블에서 뛰어내렸다. 안내 데스크까지 걸어가는 동안 두근거리는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지안은 안내 데스크 안쪽에 올려둔 가방과 코트를 들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병원은 안 가도 될 것 같아. 고작 손 베인 거로 탈 난 적 한 번도 없었어.”

“그래도 이참에 맞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같이 병원으로 가.”
단우는 지안의 코트와 가방을 제 손에 옮겨 들었다.
함께 있는 시간을 벌고 주사까지 맞힐 생각에 서둘러 도서관을 나섰다.
태윤은 중앙 로비를 서성거리다 도서관 입구로 다가왔다.
차마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상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오래 지체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빨리 나오기를 바라면서.
단우가 태윤을 의아하게 보며 물었다.

“설마 ……기다리고 있었어?”

“보안을 해제한 채 둘 순 없으니까. 보안실에 알려 주려고 기다렸어. 혹시라도 누가 보면 지안 씨가 곤란해질 수도 있고.”
태윤은 지안을 돌아보며 인사를 겸해 괜찮은지 물었다.

“놀라셨죠?”

“네? 네.”
지안은 연회장에서 태윤을 보고 놀랐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제주 돌담 집의 주인이었는데 단우와 함께 있는 바람에 혼란스러웠다.
그럴 수도 있다고 다독였지만 세상이 저를 버린 기분이었다.
이제보니 단우와 태윤의 대화는 돌담 집의 주인과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태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제주에선 어떻게 된 일인지 묻는 얼굴이었다.
태윤이 제주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대표님 이름으로 구매한 집이었습니다. 공교롭게 지안 씨가 한 달 살기를 예약한 시기와 맞물린 것으로 보이고요. 나머지는 알고 계시는 그대로입니다. 저 자식, 아니 대표님과 제가 말을 맞추고 거짓말한 게 맞습니다. 하필이면 날씨가 천둥에 번개까지 난리가 아니어서.”

“제가 신세를 진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잖아요. ……감사했습니다.”

“그래도 속은 걸 알고 나면 기분은 별로죠. 아! 저는 우태윤입니다. 대표님과 성이 같아서 형젠가 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시는데 그건 아닙니다. 동네 친구였습니다.”
태윤이 악수를 청하자 단우가 그의 손을 조용히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먼저 퇴근해. 나는 병원에 들렀다가 갈게.”
지안의 손을 보여준 단우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태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주차장으로 향했다.
***

지안은 한동대 응급실에서 파상풍 예방 주사를 맞고 의무실에서 받은 처치를 다시 받았다.
게다가 단우가 다른 검사는 없는지 묻는 바람에 초음파까지 하게 되어 응급실을 나오자 시간은 많이 늦어 있었다.
그녀는 바쁘게 걸어가는 단우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잠시 멈춰보라는 의미였다.
하준의 전화가 걸려오자 핸드폰을 빼앗은 것에 대한 화풀이였다.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까지 붙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단우 씨.”

“왜?”

“혹시 하준이가 만만해? 그게 아니면 겁이 나나?”

“같이 있는 시간 방해받기 싫었어. 게다가 괜찮다는데 계속 묻는 것 같길래 실속도 없어 보였고.”
단우는 제주에서와 달라진 사실에 직면했다.
하준에 관한 이야기를 제주에서도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지안과 자신만의 대화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하준의 존재가 형태를 드러내며 예고 없이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하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건 상관없지만 그가 물리적인 형태로 끼어 있는 건 싫었다. 지안과의 사이를 방해받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뺏으면 어떡해?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니고. 네 눈치 보면서 하준이 전화도 못 받을 정도야? 우리가?”

“어제까진 아니었고 오늘부터는 그런 사이지. 다시 같이 살 수도 있고,”
지안이 이건 무슨 소리지 하고 눈썹을 밀어 올리자 단우가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가장 우선순위에 있겠다는 의미였다.

“제주에서처럼 사정이 있으면 말이야.”

“서점에서 만났을 때 사정이 있어서 잠시 집이 없었던 거야. 지금은 집, 있어.”
단우는 여유롭게 웃으며 내비게이션에 지안의 집인 호수 타워 주소를 입력했다. 알고 있다는 대답 대신이었다.
그녀는 단우와 내비게이션을 번갈아 보았다. 주소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대표니까 직원 정보 볼 수 있잖아. 한번 본 건 잘 외우는 편이라 주소도 외웠고. 집으로 갈 거지. 아니면 혹시.”

“호수 타워로 갈게.”
지안은 집으로 가고 싶었다. 오늘 있었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시트에 기대 이마를 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김지안 인생 진짜 어렵다.”

“가까워서 금방 도착할 거야. 그래도 좀 쉬어.”
단우의 말처럼 호수 타워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는 기어를 중립에 놓은 뒤 지안을 보았다. 그새 잠이 들었는지 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게 둘까 하는 사이 지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잠이 들었던 게 아니었다.

“고마워. ……대표님.”
지안은 현실을 인지한 말을 하며 웃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돼? 하는 의미였다.
단우에게 저 말에 대한 답은 하나였다. 제 처지를 알면서도 지안을 잡고 싶었다.
물론 의도와 상관없이 병원에 감금되신 어머니를 모셔와야 했다. 그리고 자신과 어머니를 이렇게 만든 해송 그룹과의 악연도 풀어야 했다.
악연을 풀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끊어야 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는 비스듬히 지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 번 더 우연히 만나면 너 내 거라고 했는데. 기억 안 나?”

“정확히는 ‘나, 너 그냥 안 보내. 꼭 기억해.’라고 했는데.”

“그걸 또 기억했어? ……기특하네.”
단우는 빙그레 웃으며 지안의 머리를 쓸었다.

“나는 네가 욕심나. 그래서 욕심대로 하려고. 싫으면 네가 달아나.”

“정말 달아나?”

“아니. 절대 달아나지 마. 싫으면 싫다고 해. 그거면 돼.”

“……안 싫어.”

“바보야. 그럴 땐 좋아라고 해야지.”
지안은 ‘좋아.’라고 하려던 입술을 일자로 붙였다.
겨우 한 글자 차인데 입 밖으로 내기엔 말의 무게가 달랐다. 게다가 마주 보면서 하려니 부끄럽기도 했다.
단우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밀었다. 눈과 눈 사이가, 그리고 입술과 입술 사이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는 지안의 하얀 목을 감싸고 엄지로 여린 살갗을 스치듯 만졌다.
몸 안에 고여드는 열기가 버거워 집요하게 여린 피부를 괴롭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단우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났다.

“여기. 아까 도서관에서 내가 좀 지나쳤던 모양이야.”
지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는 목덜미에 손을 감고 눈을 크게 떴다.

“왜? 뭐가?”

“아침 되면 더 진해질 것 같은데. 내 거라는 표시라서 나는 좋은데.”

“설마, 키스 마크? 진짜?”
단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안은 울상이 되었다.
출근하면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유니폼은 블라우스와 베스트 그리고 재킷으로 구성된 스리피스였다.
스카프와 목폴라 티로 대체할 수 없는 블라우스와 파스 밴드 같은 대안이 떠올랐지만 난감했다.
지안은 행사장에서 트롤리와 부딪쳐 소란을 일으킨 일이 떠올랐다.
게다가 이은설 대리는 엄마인 은지가 뜯어버린 단추를 양면테이프로 재킷에 고정한 걸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대리의 날 선 목소리가 떠오르자 지안은 시트에 털썩 기대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오늘 일로 불려 갈 텐데. 스카프를 하면, ……복장 규정 어기면 안 되는데.”

“복장 규정 풀어줄게. 걱정하지 말고 푹 자. 대표잖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런 곳에 쓰시려고? 고맙긴 한데 그거 잘못 쓰면 갑질이잖아.”
단우는 대답 대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태산 같았던 대표 자리가 농담을 주고받는 말로 전락해 터진 웃음이었다.
웃음이 터지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을 흘기는 것으로 말을 아꼈다.
당장 뜨거운 샤워가 간절했고 기가 빠져나간 몸을 침대에 내어주고 싶었다.
너무 피곤하고 힘이 들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싶었다.
단우는 주먹을 가볍게 흔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일단 집에 들어가. 더 있다간 여기서 쓰러질 것 같다.”

“그렇긴 해. ……들어갈게.”
단우가 차에서 내렸다. 지안을 공동 현관까지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단우와 지안이 나란히 걸음을 떼어 놓는 찰나였다.
호수 타워 앞 도로에 정차해 있던 백색 세단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지안을 부르는 하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아.”
하준은 연회에 참석했던 슈트 차림으로 지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안을 향했던 그의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단우에게 옮겨갔다.
하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우단우라는 존재를 직면한 눈동자에 언짢은 기운이 더해졌다.
단우에게 바짝 다가선 하준과 그를 마주 보는 단우 사이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단우의 까맣고 차가운 시선과 하준의 단단하게 뭉친 시선에 스파크가 일었다.
허공에서 부딪친 서늘한 기운에 주변 공기가 차게 식었다.
날 선 기류를 흔들며 긴장된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지안이었다. 두고 보다간 주먹이 오갈 기세라 입술이 마를 지경이었다.

“단우야.”
그 순간이었다.
하준의 이성이 무너졌다. 지안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버린 단 1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준이 연회장에서 느꼈던 불길한 예감은 사실이었다.
지안의 이름을 애틋하게 부르던 우단우의 존재는 현실이었다.
하준의 단전에 뜨거운 기운이 몰렸다.
그는 격앙된 어조를 짓누른 채 지안을 불렀다.

“지안아. 차에 먼저 타 있어. 병원에 같이 가줄게.”
그러곤 두 사람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안과 단우의 손가락이 맞물려 있었다.
하준은 비스듬히 붙어 있는 두 개의 팔 사이를 가차 없이 갈랐다. 두고 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