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괜찮은 척 그렇지 않은 (62/99)


62화. 괜찮은 척 그렇지 않은
2023.02.02.


발인 준비를 마친 운구 행렬이 장례식장을 나섰다.

장지로 향하는 차 안, 지안이 흘깃 돌아보자 제니스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죽을 것처럼 오열하지는 않았다.

수목장의 묘비에 적힌 재윤의 이름을 보자 허망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맑았지만 지안은 물속을 잠긴 것처럼 세상이 고요한 기분이었다.

아빠가 정말 돌아가셨구나. 아빠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지안은 같은 생각을 계속 곱씹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 상태를 내색하지 않고 공항으로 출발하는 단우를 안심시키며 인사를 했다.


“괜찮겠어?”

“제발 내 걱정 좀 그만해. 집엔 언니랑 같이 갈 거고 출근도 할 거야. 그러니까 출장 잘 다녀와.”

“제주도에 뭐 기억나는 거 없어? 사다 줄게.”

“음. 초콜릿? 왜 원통형 통에 들어 있는, 네가 사 줬던 거.”

“그래. 그러자. 그거 사다 줄게.”

그녀와 인사를 하는 동안 단우는 지안의 손이 궁금했다.

하지만 호주머니에 꼭꼭 숨어 있던 손은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쫙 펼친 채 좌우로 흔들렸다.

지안이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멀어지자 태윤이 단우의 어깨를 묵직하게 잡았다.


“마음이 무거운 건 알겠는데, 우리도 가야지. 일정 조정하느라 힘들었어.”

“알아. 출발해.”

단우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떼어놓았다.

***

호수 타워 앞에 세단이 멈춰서자 지안이 조수석의 문고리를 달깍 당겼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차 실장에게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보자 제니스가 처연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은 냉담한 은지를 흘깃 보곤 차에서 내렸다.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차를 보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저를 부르는 하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아.”

“……여긴 웬일이야?”

“잠시 전해 줄 게 있어서 로펌 들어가다가 차 돌렸어. 정신이 없네.”

하준은 들고 있던 스테인리스로 된 보온병을 머뭇거리며 내밀었다. 예전이라면 당연한 일에 생각이 필요해진 요즘이었다.


“어머니가 새벽에 가져오셨는데 이걸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전복죽인가 봐.”

“왜 안돼? 이리 줘. 엄마가 주신 건데. 그렇게 똑 부러지게 선 긋지 마.”

지안은 주춤거리는 하준의 손에서 보온병을 받아들었다.

하준은 호수 타워를 올려다보며 함께 있어 줄 수 없는 현실이 실감 나 생각이 많아졌다.

그가 손가락으로 공동현관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

“고마워. 집으로 갈 거야?”

“아니. 로펌.”

지안은 차라도 마시고 갈지 권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흐지부지 끝났던 지난번 라이딩처럼 그냥 돌아가는 하준을 보니 뭔가가 개운하지 않았다.

하준은 27년 된 제 친구이고 가족보다 더 자주 보고 살았던 사이인데.

어정쩡하게 관계를 정리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제대로 된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그게 오늘이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다른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결국 하준을 불렀다.


“저기. 하준아. 근처 카페에 가서 차 한잔 마시는 건 어때? 나도 따뜻한 거 한잔 마시고 들어가게. ……팥빙수 대신인데.”

“그래. 그럼.”

막연한 빌미로 남아 있던 약속을 수락하며 하준은 걸음을 옮겼다.

지안은 상가 건물에 있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서 고개를 돌렸다. 하준은 벌써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캐모마일 차가 놓인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하준이 머그잔을 가리키며 먼저 입을 열었다.


“우 대표는 어디 가고 혼자야?”

“제주도 출장 갔어. 나는 모레부터 출근이고.”

“병원 가보자. 아니 가 봐. 혼자 있기 힘들면 소민이나 유진이 집으로 가고.”

재윤의 죽음으로 인한 지안의 쇼크 상태가 걱정된 하준은 오래된 습관이 튀어나왔지만, 급하게 말을 바꾸어 병원에 가기를 권유했다.


“왜 그렇게 내 걱정을 해? 언제는 혼자 안 지냈어? ……정 안되면 소민이 부르려고 마음먹고 있었어. 병원도 갈 거야. 걱정하지 마.”

하준은 말을 더 보태려다 입을 닫고 찻잔을 제 앞으로 당겼다.

제가 단우에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본인도 지금 당장 로펌에 들어가야 하고 내일은 변호사협회 연수가 있었다.

연우가 끓여온 죽을 핑계로 지안을 보러 왔지만 사실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연우의 마음을 전하지 않는 것도 마음이 불편해 지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만간 어머니껜 사실을 말씀드려야겠구나. 계속 걱정하실 텐데. 반찬도 해주실 거고.’

지안이 단우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든 그날 밤, 하준은 생각이 많았다.

친한 것과 친밀한.

한 끗 차인 줄 알았던 말은 그 격차가 상당했다.

선뜻 손을 내어주고 어깨에 기대게 하는 사소함이 저는 왜 어려웠을까?

이웃으로 도어 록 비밀번호까지 공유하고 살았지만 지안은 저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선을 넘기가 힘들었지. 믿는 사람이 실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왜 하필이면 ‘가족 같은’ 친구였을까? 좋은 의미인 줄 알았더니 순 몹쓸 말이었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하준은 이젠 정말 끝이구나 생각했다.

지안이 걸음을 멈추자 하준은 헛헛한 생각을 털어내고 그녀의 팔을 꾹 잡고 놓았다가 주먹으로 툭 쳤다.


“잘 지내. 힘들면 누구라도 불러. 나는 빼고. ……바빠.”

“잘 지낸다니까. 무슨 걱정을 헤어질 때까지 해? 바쁘다며 얼른 가. 그리고 일은 좀 줄여.”

“걱정은. ……네가 먼저 들어가.”

하준은 지안이 호수 타워 안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발길을 돌렸다. 이젠 이곳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사소한 만남이 당연했던 사이를 지안은 이미 끊은 듯 보였고 이번엔 제가 끊을 차례였다.

***

집에 돌아온 지안은 침대 끝에 털썩 앉아 재윤의 장례를 잘 끝냈다는 안도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맞은편 화장대 거울에 단우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단정하게 차려입은 원피스가 비쳤다. 그제야 금요일 밤이 떠올랐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적막한 공간에 혼자가 되자 버티고 있던 몸 안에 생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괜찮아 보이려고 애쓰던 마음도, 재윤을 보내며 못나게 굴지 않으려던 다짐도, 모두 사라지자 텅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해졌다.

하지만 지안은 애써 힘을 내 욕실에 들어섰다. 수전을 올려 샤워기 아래에 서서 흩어지는 물줄기를 한참 동안 맞고 서 있었다.

갑자기 극심한 피로가 몰려들더니 손발에 힘이 빠졌다. 5일의 장례 동안 제대로 자지 않아서인지 잠이 몰려왔다.

기력이 빠져나간 사지엔 버거운 현실이 알알이 맺혀 무겁고 깊게 지안을 빨아당겼다.

다리를 끌다시피 침실에 들어선 지안은 침대에 풀썩 쓰러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 아빠. ”

몇 시간 뒤, 깊게 잠이 든 지안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지 힘겹게 신음을 흘렸다.

습기 찬 공기에 정신을 차린 지안은 버썩 마른 몸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끝에 차가운 물기가 닿은 순간,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으며 의식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그때 검은 시야 너머로 적막한 공간에 혼자 서 있는 아빠가 보였다. 지안은 먹먹한 서러움을 딛고 힘겹게 걸음을 내디뎠다.

아빠.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닿을 것 같아 손을 내밀었지만 그럴수록 더 멀어졌다.

한 걸음을 다시 뗀 찰나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진 지안은 숨이 탁 트인 순간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다시 일어서서 걸어도 아빠에겐 닿을 수가 없었다.

막막한 꿈속에서 지안은 힘껏 소리치고 싶었다. 그녀의 간절함은 탁성이 되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빠!”

땀에 흥건히 젖은 지안이 눈을 번쩍 떴다.

잠에서 깨어나자 서럽고 먹먹해진 그녀는 천정을 보고 바로 누워 작게 중얼거렸다.


“꿈. ……이구나.”

축 처졌던 몸을 일으켜 세운 지안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우두커니 허공을 보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눈물이 바짝 마른 목을 꽉 막았다. 지안은 숨이 막혀와 주먹으로 답답한 가슴을 쾅쾅 때렸다.

그 순간 지안의 머릿속에 할머니의 집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칼이 곤두선 그녀는 핸드폰을 열고 재윤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외벽의 색이 바뀐 사진과 마당의 시멘트를 덜어내고 자갈을 깔아놓은 사진을 차례대로 보았다.

창호를 교체하고 새로 싱크대를 넣었던 날과 마음에 드는 벽지를 고르라며 보내준 사진도 있었다.

그러다 재윤이 보내준 주소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 순간, 지안은 고양시에 있는 할머니 집에 가보고 싶어 벌떡 몸을 바로 세웠다.

곧장 파우더 룸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옷을 잡아당겼다. 바쁘게 어깨에 걸치면서 보니 밤색 카디건이었다.

핸드폰만 들고 정신없이 집에서 나온 지안은 1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비상구로 뛰어갔다.

가족들이 다 모이면 아빠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재윤이 생을 마감하며 남겨 두었을 흔적이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아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가려고 하는데요. 여기 주소요.”

택시에 올라탄 지안은 기사에게 핸드폰에 띄운 마을 이름과 주소를 보여주었다.

택시가 출발하자 지안은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 초조하게 창밖을 보았다. 밤이 내려앉은 강물의 까만 윤슬과 가로등이 휙휙 지나갔다.

지안의 머릿속엔 재윤에 관한 생각이 빼곡히 들어찼다.

택시는 고속도로에서 더욱 속도를 내더니 한적한 시골 마을에 들어서자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지안이 요금을 지불하고 뒷좌석에서 내리자 공터를 회전하며 빠르게 사라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재윤과 함께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지안이 집을 돌아보았다. 수험생이었으니 십 년이 넘은 기억이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구나.

밤이 깊어진 탓에 사방은 캄캄하고, 휑한 들판을 지나온 바람은 봄 날씨가 무색하게 시렸다.

재윤이 대기업에 취직해 5년간 부은 적금으로 지은 단층 양옥집은 엽서에 나올 것처럼 예쁜 집으로 변해 있었다.

지안은 대문 앞에 다가서서 기다란 문고리를 잡았다. 별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대문이 안으로 밀렸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들여놓자 마당의 자갈이 밟히며 잘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애달픈 한 마디가 기어이 지안의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아빠!”

사진을 보내줄 때마다 왜 달려오지 않았을까? 봄이 되면 다녀가라던 그 말을 왜 믿었을까?

이렇게 단숨에 달려 올 수 있는데.

지안은 현관 앞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을 모아 잡고 북받치는 숨을 겨우 들이쉬었다. 억지로 일어나 도어 록을 본 그녀의 입술이 서글프게 휘었다.

할머니가 봤으면 쓸데없는 짓 했다며 화내시겠네.

까만 화면을 터치한 지안은 한꺼번에 나타난 숫자를 보며 막막해졌다.


“이걸, 가르쳐 줬어야지.”

이 밤에 종구 삼촌을 깨워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지안은 조심스럽게 숫자를 입력해 보았다.

삐삐삐. 삐.

재윤의 생일을 눌렀던 지안은 문이 열리지 않아 제 생일에 해당하는 숫자를 눌렀다.

0827.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도어 록이 해제되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문고리를 내리고 문을 당기자 천정의 센서 등이 밝아졌다.

지안은 운동화 한 켤레가 지키고 있는 현관의 모습에 눈시울이 빨갛게 젖어 들었다. 고집을 피워 아빠와 커플로 사 신었던 운동화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