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너무 아파지면 그때는
(69/99)
69화. 너무 아파지면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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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너무 아파지면 그때는
2023.02.26.
술에 취한 하준이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고 가만히 서 있자 집안에서 그의 어머니인 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어머니 저, 하준이입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아들이 반듯하기를 바라는 연우를 위해 최대한 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어 록을 해제하고 문을 연 연우는 하준이 비틀거리자 깜짝 놀라 문을 더 활짝 열고 스톱 바를 걸었다.
“웬 술을 이렇게나 마셨어?”
“아닙니다. 조금 마셨습니다.”
연우의 놀란 목소리에 하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금’이라고 말했다. 실상은 술에 취해 간신히 현관문을 잡고 있었다.
“대표님까지 참석한 회식이어서 평소보다 몇 잔 더 마신 겁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 거면 다행이고. ……집으로 가질 않고.”
하지만 집안에 들어서려던 하준은 다리에 힘이 풀어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머나. 얘 봐. 하준아. 여보! 여보 좀 나와 봐요.”
연우는 주저앉아버린 하준의 팔을 잡고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불렀다.
하준의 아버지인 윤호가 부랴부랴 밖으로 나와 현관 풍경에 놀라며 연우의 팔을 뒤로 당겼다.
“내가 할게. 당신은 비켜나 있어.”
“여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사회생활 하다 보면 거절 못 할 술자리도 있는 거지. 당신은 하준이 방에 이부자리나 좀 펴.”
하준이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탓에 연우는 걱정 어린 눈으로 등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겁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준은 저를 부축한 윤호의 손을 털어내며 애써 정신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 모습을 보일 줄 알았으면 본가에 오지 않았을 텐데.
주량보다 많이 마신 술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하준이었다.
전화를 걸어와 지안을 걱정하는 연우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굳이 핑계를 대자면 전화가 아니라 얼굴을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방에 들어선 하준은 침대에 털썩 누워 팔로 눈을 가리고 숨을 내쉬었다. 몸을 휘감은 술내가 주변으로 짙게 흩어졌다.
연우가 무슨 일인지 다시 물으려다 말고 하준을 염려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기다려. 꿀물 타올게.”
하준은 움푹 팬 것처럼 심장이 아파 왼쪽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때렸다.
지안이는 지금쯤 우단우, 그와 함께 있겠지?
술에 취한 탓인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좁아터진 속을 계속 아니라고 부정했으니 곪아 터질 수밖에 없지. 더 아파도 할 말이 없는 그였다.
왼쪽 가슴을 부술 것처럼 때리던 하준은 연우의 발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손을 멈췄다.
“일어나. 꿀물 마시고 자.”
“…….”
“하준아.”
“두고 나가시면 마시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못 올 데 왔니? 마시고 자. 속 버려.”
연우는 돌아서 나가려다 하준의 넥타이를 풀어주며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하준은 죽을 것처럼 아픈 제 속이 들킬까 봐 팔로 눈을 가린 채 어머니를 바로 보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고추기름에 북어를 볶아 콩나물을 넣고 해장국을 끓이느라 연우의 손이 바빴다.
하준은 식탁의 상판에 적힌 아름드리 공방 낙인을 만지며 어머니인 연우의 등을 보았다.
그는 넥타이 없이 드레스 셔츠만 입고 있었지만, 지난밤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반듯한 모습이었다.
식탁에 빨갛게 끓인 콩나물국을 올린 연우는 따뜻한 밥을 내려놓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콩나물국을 한술 뜨며 하준이 입을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속 아프겠다. 입이 까끌까끌해도 한 그릇 다 먹고 가.”
“괜한 걱정 끼쳐드렸네요. 죄송합니다.”
하준은 방금 구워낸 김에 뜨거운 밥 한 숟갈을 올리곤 기름장을 얹어 입 안에 넣었다. 빨간 국물과 콩나물 건더기를 후루룩 밀어 넣자 깔깔한 입안이 그나마 나아졌다.
연우의 눈빛을 묵묵히 받아내며 밥그릇을 비우자 투병한 잔에 담긴 까만 액체가 그의 앞을 차지했다.
“마셔. 붕어 즙이야.”
하준이 유리잔을 비우자 밀폐 용기에서 꺼낸 초콜릿을 건네며 연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안이는 어때? 엄마가 생각해 봤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이도 있으니까 이젠 둘이.”
“그럴 일 없습니다.”
하준은 연우의 말허리를 자르고 지안과 제 사이에 관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안이와 저 친구 사이입니다. ……사실은 저도 사귀는 사람 있고 지안이도 있습니다. 지안이가 플레이 라운드에 입사한 이유도 있지만 서로 불편해서 이사한 겁니다.”
“그럼 장례식장에선 왜 며칠 밤을 새워? 너 사귀는 아가씬 어쩌고?”
하준이 지안을 친구라고 단정 지은 게 처음이라 연우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지안이 별안간 이사까지 하고 하준의 눈치도 이상했지만, 재윤의 장례식에 하준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연우였다.
연우는 막연하게 두 사람이 친구 이상일 것으로 생각해 왔기에 놀랍기도 하고 내심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친구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주 오래된. 지안이 아버님과 인연도 있고. 그보다는 제니스 소속사 자문 변호사로서 지켰던 자리입니다. 제가 사귀는 사람도 이해해 준 일입니다.”
하준은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며 표정의 변화 없이 연우를 묵묵히 보았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보다는 어머니가 제 말을 믿어 주기를 바랐다.
지안에게 다른 사람이 생겨 제가 혼자 아파한 것을 알면 연우가 속상할 걸 알았다.
연우가 가끔
‘둘이 언제 결혼할 거니?
’라고 물었던 순간이 떠올라 하준의 입가에 쓴 웃음이 걸렸다.
미루지 말고 그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면 좋았을걸.
하준이 짧은 후회를 하는 동안 연우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는 자식 편이야. 자식이 좋으면 나도 좋더라고. ……네가 결정했으면 엄마는 그렇게 알고 있을게.”
연우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입술을 빙긋 올리고 웃었다.
하준이 일어나 의자에 걸어둔 넥타이를 집어 들자 연우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넥타이를 건넨 하준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옆으로 길게 다리를 벌렸다.
연우의 안색을 살피며 하준이 쓸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는 지안이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나? 글쎄. 아들만 셋이니까. 너무 속 보이지?”
연우는 흔한 말로 대답하고 넥타이의 매듭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곤 걸음을 뒤로 물리며 말을 덧붙였다.
“처음엔 네가 좋다고 하니까 눈에 들어왔어. 어린이집에 혼자 남는다는 말을 듣고 집엘 데려왔는데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거야.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활짝 웃더라. 그 얼굴이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
“…….”
“지안이는 우리 집에 오면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놀았어. 공룡, 중장비, 팽이 그런 거 말이야. 그맘때 여자애들이 그러고 놀겠니? 그런데 싫다는 소릴 한 번도 안 했어.”
지안과 이웃사촌으로 살며 제 위주로 생활을 했으니 하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쩌다 지안이 무언가를 부탁하면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생색까지 냈다. 오죽하면 그녀가 윤하준 사전에 공짜가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을까!
“지안이 걱정 너무 안 하셔도 됩니다. 아시잖아요. 혼자서도 잘하는 거.”
“그건 그렇고. 사귀는 아가씨는 뭐 하는 사람이야? 같은 변호사니?”
“네. 입사 동기입니다. 연수원에서 만난.”
연우가 사귀는 여자에 관해 묻자 하준은 두서없이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러곤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잠시 뒤.
하준의 세단이 호수 타워 앞에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차가 멈추자 그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길 왜 와!”
말과 다르게 하준은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보도블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안이 집에 돌아왔다면 이 시간쯤 출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안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시골집에 찾아가지도 않은 주제에 그녀가 돌아왔는지는 알고 싶었다.
지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초조해진 그는 결국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이웃으로 살며 부스스한 얼굴로 저를 배웅하던 지안이 아직도 선했다. 그런 그녀를 한심한 눈으로 보곤 했는데.
“미친놈이 따로 없었네.”
먹먹하게 지안을 생각하던 하준은 대시 보드의 시간을 확인하곤 시동을 걸었다. 출근하지 않았으니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핸들을 돌려 도로에 진입하자 뒤늦게 호수 타워로 차를 운전한 제 모습이 어이없었다. 그는 복잡해진 머리를 비우기 위해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가사에 난데없이 심장이 썰려버린 순간.
끼익. 덜컹.
“이런 X.”
급브레이크를 밟은 하준이 욕을 짓씹었다.
사랑이 너무 아프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가사에 심장이 욱신거리며 헛웃음이 터졌다.
‘나는 김지안과 사랑을 한 게 아닌데. 그저 너와 멀어졌을 뿐인데.’
노래 가사 한 줄에 아파질 일이 아니라고 우겨도 정신을 놓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아무런 의식 없이 기생이란 말을 내뱉고 태연하게 실수라고 말한 순간이, 결국 내게 돌아오겠지 하며 친구로 남겠다고 결심한 자만심이 날카롭게 되돌아왔다.
처절하게 빌었어야지.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울었어야지. 나는 네가 있어야 한다고 죽을 것처럼 매달렸어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아파할 자격이 어디 있다고.
출근 시간,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서 버린 하준은 사방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호텔에서 하루를 더 지낸 지안과 단우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테이크아웃 해온 생강차가 지안의 속을 따뜻하게 데웠다.
단우는 불현듯 우선호가 저를 감시하기 위해 붙여 두었던 동거인 김 씨를 떠올렸다.
동거인 김 씨는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우선호에게 보고를 하던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 김 씨로 인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겪은 단우였다.
“서울에 돌아가면 당분간 펜트하우스에서 같이 지내는 건 어때?”
지안을 보며 다정하게 웃은 단우가 조심스럽게 제 속내를 드러냈다.
‘언제는 혼자가 아니었나?’
저 말을 믿고 지안을 두고 제주도 출장을 갔던 단우는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다. 혼자 견디기 힘든 시간인 줄 알면서 혼자 두었다는 사실이 내내 그를 괴롭혔다.
“혼자보단 나을 거야. 마음 추스를 때까지만 같이 지내.”
“…….”
지안은 그럴 순 없다며 반박하려던 말을 쏙 집어넣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제 모습이 어땠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꿈을 꾸며 울거나, 깨어나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의지와 다르게 무력해지는 시간이 사실은 버겁고 힘겨웠다.
단우가 깨우지 않았다면 지난 사흘 밤 역시 꿈을 꾸고 울다 지쳐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안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긴장한 얼굴로 단우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