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진실과 거짓, 그 중간 (73/99)


73화. 진실과 거짓, 그 중간
2023.03.12.


우선호의 집무실에 다녀온 수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이 석연치 않았다.


‘우리도 시간은 벌어야지.’

듣기엔 우호적인 말이었으나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수정은 저 말이 불길했다. 하여 혹시 하는 마음에 우선호의 집무실에 숨겨 둔 카메라 녹화영상을 돌려보았다.


‘더 이글스 합병 제안서 작성이 끝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영상을 재차 확인하던 중 이 실장의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합병 제안서라. 그렇다면 우단우와 우선호가 벌써 만났을지도 모르잖아. 우선호라면 더 이글스의 합병을 제안하고도 남을 인간이지.’

우단우, 그는 우선호의 합병 제안에 제게 했던 것처럼 어머니인 지혜수의 무죄를 조건으로 붙였을 것이다.

그간 해송 바이오의 비리가 드러난 탓을 제게 돌리던 우선호였다.

수정은 문득 우선호가 더 이글스를 삼키기 위해 지혜수의 죄를 저에게 전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우의 속내를 알고 싶어진 수정은
‘조만간 찾아갈게요.’
라고 했던 제 말을 떠올렸다.

***

도시 곳곳에 봄이 깊게 스며들자 다락방 도서관엔 [그림 작가 은률의 초대전]이 열렸다.

수정은 꽃물이 든 손톱을 내밀고 있는 아이 그림을 보며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몽환적인 그림을 지나자 봄에 관한 글귀가 눈에 띄었다.

[발끝에 봄이 닿는다. 너를 만난 순간 까만 눈동자에 꽃물이 들고 나는 봄이 되었다. - 작가 NJ 봄을 만난 순간 -]
 


“나를 봄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면 사랑할 맛이 나겠네.”

수정의 혼잣말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사이 단우가 작게 기침을 하며 다가섰다.

단우는 수정의 시선이 머문 글귀를 마음속으로 읽었다. 어딘지 모르게 지안이 떠오르는 글귀였다.

그는 정면에 시선을 둔 채 먼저 입을 열었다.


“집무실로 올라와도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 오셨어요?”

수정이 놀란 척 목소리를 높이더니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은률 작가님을 좋아해서요. 겸사겸사 다녀간다는 연락만 드린 거예요.”

“시간까지 정확히 말한 게 너무 노골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나 봅니다.”

“들켰네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누구를 적으로 둘지 정한 겁니까?”

다음 그림으로 걸음을 옮긴 단우의 물음은 직설적이었다.

수정은 아이가 풀꽃 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그림에 시선을 두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사방이 적이어서 그나마 좀 덜 나쁜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해야겠죠.”

“그래서 내가 제일 덜 나쁜 놈이던가요?”

“적어도 지금은 그래요. 대표님은 내가 가진 자료가 꼭 필요하잖아요.”

“그거 아십니까? 지금까진 당신이 뭘 가지고 있을지 확신이 없었는데 지금 본인 입으로 밝힌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다고.”

“자 그럼. 이젠 대표님이 저한테 줄 수 있는 게 뭔지 들어 볼까요?”

걸음을 멈춘 단우가 그제야 몸을 돌리고 수정을 곧게 보았다.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솔직한 말과 듣기 좋은 말 중 어떤 것을 원합니까?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솔직한 말이 좋겠네요.”

“지은 죄만큼만 벌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보태면 그 이후에 하고 싶은 일을 돕는 정도.”

수정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시선으로 단우를 보았다. 너무 매달려도 매력이 없겠지만 어느 정도 속을 숨겼으면 좋을 텐데.


“정말 솔직하시네요.”

“지은 죄에 관한 벌만 받든가 아니면 짓지 않는 죗값까지 함께 받든가. 그거 선택하라는 겁니다. 나도 아직 누구를 내 편으로 둘지 정하지 않아서요.”

수정은 단우의 말에 담긴 속뜻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제 예상대로 우선호와 우단우 사이에 모종의 말이 오간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제 선택만 남은 셈인데.

수정은 우선호와 우단우 중 누구를 제 편으로 두어야 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단우와 수정이 도서관을 나가자 미경이 지안을 흘끔거렸다.

지안은 데스크 앞을 지나가던 다른 직원이 귓속말을 하며 저를 흘끔거리는 것을 보았다.


‘뭐지? 기분 진짜 이상하네.’

긴 휴가를 끝내고 출근하자 반복되는 업무와 일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대책 없이 허물어진 저를 꾸짖기라도 하듯 말이다.

하지만 저를 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백일이 안 되어 어린이집에 맡겨지고 좀 더 자라선 학교와 돌봄교실을 전전했던 지안은 누가 뭐라고 해도 눈치가 백 단이었다.

휴가에서 복귀한 뒤, 그녀는 재윤의 장례식에 와준 것에 감사 인사를 전하며 동료들에게 직접 구운 쿠키를 건넸었다.

당시엔 회피하거나 쏘아보는 시선이 제니스 때문이라 생각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제니스의 사인을 받아 달라거나 콘서트 초청장을 물어보며 흐지부지되던 일이었다. 그런데 사인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고,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미경아.”

“네. 언니.”

미경이 제풀에 놀라 큰소리로 대답했다.

재윤의 조문을 다녀온 직원들 사이에서 지안과 단우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목격한 직원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이었다.

미경이 놀라자 지안은 확신을 두고 물었다.


“며칠 사이에 나를 보는 눈들이 조금 이상해졌어. 너도 그렇고.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

머뭇거리던 미경이 슬그머니 물었다.


“언니. 혹시 대표님이랑 제주도 출장 같이 다녀오셨어요?”

“내가? 아니. ……그런데 그건 왜?”

“사실은요, 조문을 시간 맞는 사람끼리 드문드문 가다 보니까 언니랑 대표님이 같이 있는 걸 목격한 사람이 있어요. 나는 못 봤는데.”

지안은 순간적으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빛이 흔들리고 말았다.

사실임을 짐작한 미경이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언니 무단결근을 비서실장님이 휴가로 처리까지 하는 바람에. 게다가 복귀 날짜도 비슷했잖아요.”

“미경아. 그게 그러니까. 입사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여기 대표님인 줄도 모를 때였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 빨라진 지안을 보며 미경이 그녀를 저지했다.


“저한테 구구절절 설명은 하실 필요 없는데. 그럼 사귀는 게 맞네요. 어쩐지 도서관에 자주 오시더라. ……일단 다행이에요.”

“다행이야? 너 속이는 게 제일 미안했는데?”

“소문이 좀 듣기 거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니까, 다행이지 뭐.”

“이럴 땐 밥을 사야 하는 거지?”

미경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밥은 사주면 마다하진 않죠. 그런데 대표님이랑 같이 계신 여자분 완전 미인이던데.”

“응.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오해하지 말라고 미리 문자 받았어.”

“우와. 그런 것도 문자로 해 줘요? 되게 자상하시다.”

지안은 수정에 관한 이야기를 적당한 말로 얼버무렸다.

그날 오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흐리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안이 삼성동 본가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은 주말이었다. 할머니 집과 본가에 드나들기 위해 중고차 매입을 결심한 탓에 퇴근 준비를 하는 마음이 바빴다.

직원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아침엔 날씨가 쾌청했던 탓에 미처 우산을 준비 못 한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때 작게 환호성이 들려왔다.

아!

그리고 지안도 작게 탄식했다.

슈트 차림의 단우가 우산을 쓰고 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뒤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앞에서 멈추었다.


 
놀란 토끼 눈이 된 지안은 단우와 시선이 쏠린 직원들을 번갈아 보았다.

단우가 빙긋 웃으며 지안의 손목을 당겼다.


“뭘 그렇게 놀라? 비 와서 데리러 왔어. 오늘 본가에 간다며. 데려다줄게.”

“아! 그게.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소문 다 났는데 뭐 하러 숨겨.”

단우는 오후에 받았던 지안의 문자를 떠올렸다.


[나 대표님이랑 제주도 다녀온 거더라. 소문이 그렇게 났대.]

한숨 쉬는 오리 이모티콘과 함께 보낸 문자에 대표님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 번 써 보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단우는 지안을 우산 안으로 끌어들이고 소문을 사실로 일단락시키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얼떨결에 단우와 함께 걷게 된 지안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단우를 불렀다.


“뭘 이렇게까지 해?”

“소문보다는 사실이 낫잖아. 다음 주엔 구내식당에 갈 생각인데.”

“아니. 하지 마. 오늘로 충분해.”

지안은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로 쏠리는 게 부담스러워 단우를 저지시켰다.

단우가 빙그레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자 지안이 한숨을 쉬며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오른 그가 내비게이션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삼성동 본가 주소 입력해.”

“그 전에 다른 데 들러야 하는데. ……나도 차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중고차 보러 가려고. ”

“중고차?”

단우가 시동을 걸다 말고 돌아보자 지안이 한 번 더 제 말을 확인시켰다.


“응. 중고차.”

“……새 차 사줄게. 당장 필요하면 오늘은 내 차 써. 나는 우 실장 부르면 돼.”

“왜?”

지안의 짧은 물음을 끝으로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새 차를 사주고 싶은 단우와 그것이 과하다고 여기는 지안의 마음이 묘하게 대립하며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문 것이다.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지안이었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나도 그 정도 경제 능력은 있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거든. 그리고 믿을 만한 곳 추천받아서 가는 거야.”

단우의 눈치를 보며 지안이 조심스럽게 제 뜻을 밝혔다.

이런 일로 단우의 마음이 상하는 건 싫지만 그래도 승용차는 너무 과분했다. 다리 마사지기와 비교도 안 될 일이었다.

지안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단우가 내비게이션을 다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같이 가는 건 괜찮지? 차 고르는 거 도와줄게. 그건 내가 너보다 나을 거야.”

“응.”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단우의 차가 멈추었다.

지안이 소개받은 딜러에게 차를 추천받는 동안 단우는 새 차를 사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매입할 차를 결정하자 단우는 시동을 걸어보고 엔진을 살핀 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은 계약이 끝나자 뿌듯한 표정으로 빨간색 소형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차종은 틀리지만 색깔 때문에 그런지 제주도 생각나지 않아?”

“그렇네. ……대신 오늘은 내 차 타고 가. 이 차는 내가 끌고 갈게. 중고차니까 정비를 받고 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머뭇거리던 지안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단우의 단호한 표정에 차 키를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단우가 지안을 당겨 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에 잘 다녀와. 같이 갈 수도 없고.”

“자다가 우는 거 언니한테 솔직히 말하려고. 그러면 괜찮을 것 같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올게.”

“얼른 가.”

먼저 세단에 올라탄 지안은 단우에게 웃어 보이곤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뒤 플레이 라운드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단우가 빨간색 소형차에서 내리자 태윤이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

단우가 그에게 차 키를 던지며 말했다.


“뭘 웃어? 이 차를 꼭 타겠다잖아. 정비 꼼꼼하게 부탁하고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는 건 다 교체해.”

“알았어. 곧 화상 회의 시작이니까 가서 일해. 이글스 리그 새 버전 곧 출시야. 정신 바짝 차려.”

“그래야지. 차 ……잘 부탁해.”

빨간 소형차에 올라탄 태윤은 핸들을 탁 때리며 미국에서 힘들었던 시절을 잠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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