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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낮과 밤의 온도 차이 (78/99)


78화. 낮과 밤의 온도 차이
2023.03.30.


단우는 잠든 지안을 하염없이 보다 문득 도서관에서 읽었던 글귀를 떠올렸다.


‘너를 만난 순간 까만 눈동자에 꽃물이 들고 나는 봄이 되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봄이지만 제게는 없었던 계절, 그런 저에게 지안은 유일무이한 봄이었다.

마음을 자각한 단우의 목소리가 방안에 흩어졌다.


“아무래도 너를 사랑하는 것 같지.”

단우는 오늘 자신이 해송그룹 우수호 회장의 혼외자인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기자 회견을 했다.

기자 회견에서 집이 전소된 사고와 어머니 이야기까지 밝히며 다른 날보다 처절한 마음이 극에 달해 있었다.

지난 10년 중 어느 날은 사방이 막힌 곳에서 혼자 걷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처럼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어머니의 행방을 찾고 밤낮없이 개발한 게임을 출시했을 때는 제가 전진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 어머니를 찾는 것.

하려는 일은 명확했지만 단우의 내면은 어둡고 무거웠다. 플레이 라운드의 대표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불운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지안이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고, 그로 인해 제 마음에도 온기가 들어찰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사람.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았던 그녀에게 스며들 듯 마음이 빼앗긴 단우였다.

하지만 제주를 떠나는 지안을 잡지 못하고 말라버린 잔디를 꾹꾹 밟으며 애달픈 마음을 사치라고 단정 지었었다.

살아가다 한 번은 마주치겠지.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단우는 몇 달이 지난 지금, 잠든 지안을 보고 있었다. 잠에서 깰까 봐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애틋한 마음이었다.

만지기도 아까운 사람. 그런데도 문득문득 안고 싶어 욕심이 나는 사람.

자신은 그런 존재인 지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슴푸레 느껴지는 인기척에 지안은 천천히 눈을 뜨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단우를 보았다.

그녀는 몽롱한 의식에도 팔을 뻗어 단우의 볼을 보듬었다.

텅 빈 단우의 눈동자를 보면 짙고 푸른 바다가 떠올랐다. 아리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단우의 희미한 웃음과 움푹 팬 눈가가 어머니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출생의 비밀과 어머니에 관한 말을 덤덤히 뱉어내는 단우의 기자 회견을 보면서 지안은 몇 번이나 울컥울컥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비스듬히 상체를 세우고 조금 더 길게 팔을 뻗어 단우의 목에 감았다.

그러곤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단우를 걱정했다.


“너 괜찮아?”

“왜 일어나. 자는 것만 봐도 되는데.”

“……안아줘.”

단우를 안아주고 또 그에게 안기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위로였다.

소리 없이 뛰는 심장에서 쿵쿵 소리가 들리는 듯한 순간, 지안의 팔에 딸려간 단우가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는 지안의 입술을 삼키며 침대 위에 눕혔다. 그러곤 조금의 틈도 없이 깊고 깊게 지안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멈출 순간을 잊은 사람처럼 키스를 했다.

단우의 손길은 농밀해지고 머뭇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이 남자의 인내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지안은 알고 있었다. 저를 안는 것을 갈망하면서도 그 기다림을 당연하다고 여기던 단우였다.


“지안아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부드럽게 귓불을 머금은 단우의 목소리가 지안의 흐린 의식 속으로 흘러들었다. 가쁜 숨을 내뱉던 지안의 모든 감각이 그의 말 한마디에 벅차게 달아올랐다.

달곰한 과일 같을 줄 알았던 말이 점성이 높은 초콜릿처럼 진하게 들려왔다.

지안의 옷자락을 비집고 들어가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감은 채 단우가 시선을 맞추었다.


“허락해줄래?”

지안은 대답 대신 단우의 손을 당겨 잠옷의 단추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어둡고 조용한 방안에서 단우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지안의 숨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부드럽기만 하던 단우의 열망도 점점 속도를 올렸다.

그 밤, 인내하며 기다리던 시간 동안 철저히 숨어 있던 수컷의 본능이 지울 수 없는 감각을 지안의 몸 안에 새겨넣었다.

***


 
잠에서 깨어난 지안은 기절할 것처럼 잠이 들었던 순간과 그 직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숨소리를 조심스럽게 삼켰다.


‘어떻게 안 예쁜 곳이 없어.’

지난밤 단우가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지안의 얼굴에 홍조가 짙어졌다.

쉴 새 없이 밀려들었던 감각과 몽롱함 속에서도 느껴졌던 따뜻한 수건의 감촉이 뚜렷하게 기억났다.

지안이 난감한 옷차림을 먼저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린 순간, 단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가?”

“어? 그게 ……잠이 깨서 씻으려고.”

“같이 씻을까?”

“아니.”

지안이 단번에 대답하자 단우가 웃으며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젠 제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듯 더 깊이 당겨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조금만 있다가 가. 욕조에 물 받아줄게. 샤워만 하면 종일 힘들 거야.”

“……너는 진짜. 내가 아는 우단우 맞아?”

지난밤의 아찔한 감각이 떠오르자 지안의 몸에 저절로 경련이 일었다. 사람의 몸에 그런 감각이 있다는 사실을 단우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어젯밤 그 우단우는 너한테만 튀어나오는 수컷이고,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은 남자 친구 우단우.”

“…….”

“기다려.”

단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눈을 끔뻑거리는 지안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도 많이 참은 건데 까무룩 잠이 드는 바람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컸다.

잠시 뒤, 지안이 욕실에 들어서자 둥근 욕조에 뜨거운 물이 찰랑거렸다. 지안이 어정쩡하게 서서 돌아보자 단우가 욕실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편하게 씻어. 문은 잠그고 나갈게.”

지안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달아오른 뺨을 저도 모르게 감쌌다.

***

수정이 해송 바이오의 비리를 폭로한 후 여러 날이 지났다.

들끓는 여론으로 검찰에선 해송 바이오의 비리를 수사하기 위한 특별 검사팀을 만들었다.

단우의 기자 회견이 일시적인 이슈를 만들기는 했으나, 한국에서 몇십 년을 굴지의 기업으로 뿌리내린 해송그룹의 대응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수정이 흘린 최초 보도를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태윤은 차로 이동 중에 단우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오늘 만나게 될 특검팀 황기현 검사 프로필이야. 그리고 이건 어머니의 학창 시절 사진.”

각종 SNS에 지혜수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게다가 그녀의 협력자가 단우라는 루머까지 생겨났다.

해송그룹은 지혜수의 감금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었다.


“해송은 어머니의 폐쇄 병동 영상이 조작이라고 반박하고 있어. 병원 관계자 인터뷰, 환자 명단 전부 공개하는 바람에 그럴싸해 보여.”

“기업의 이미지가 걸린 일이니까 명예훼손으로 나를 고소하겠다고 발표했겠지. ……우리는 우리 일을 하면 돼.”

“그래도 다행인 건 어머니 동영상과 SNS에 떠도는 사진을 비교하는 영상들 대부분이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분석했어. ……밖으론 못 나오시는데 아직 병원에 계신 것 같아.”

태윤은 개인 방송인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우선호 측에서 내린 조처라고 말을 덧붙였다.

해송그룹이 소재를 알 수 없다던 지혜수의 행방은 이미 밝혀졌지만, 검찰은 이제야 특검팀을 만들었다.

단우는 참고인 조사를 핑계로 저를 부른 검찰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단우의 말수가 줄어들자 태윤이 제 생각을 쏟아놓았다.


“우수호 회장님이 가진 바른 이미지는 곧 해송의 상징이었어. 그런 우 회장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지 타격은 있을 거야.”

“……우정현 고소 준비해.”

나쁜 뉴스는 또 다른 나쁜 뉴스로 덮으면 될 일이었다.

어머니인 지혜수의 이름을 덮기 위해 J를 죽인 우정현과 해송의 이미지를 더 나락으로 떨어뜨릴 타이밍이었다.

우선호의 아들인 우정현은 미국에서 저를 대신해 우단우 행세를 하던 J를 해한 뒤 단순 강도로 위장해 감쪽같이 죄를 덮었다.

그 당시 갑자기 날아든 J의 사망 소식에 단우는 주변 CCTV와 블랙박스, 그리고 검증된 업체를 통해 현장 증거까지 확보해 두었었다.

정현은 그동안 여러 가지 극악한 짓을 저질러왔다.

물론 해송그룹의 보호 아래 처벌받지도 않고, 사생활 유출까지 철저하게 막은 탓에 댄디한 재벌 3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J의 동생인 지영이 그를 고소하면 정현의 본색이 드러날 것이다.


 
며칠 뒤.

J의 여동생인 지영이 우정현을 고발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지영은 변호사와 함께 기자들이 볼 수 있게 고소장을 펼쳐 든 채 좌우로 돌렸다.

지영의 인터뷰가 방송되던 그 시간, 이미 경찰은 강남의 한 클럽에서 정현을 살인 혐의 및 상해치사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했다.

정현은 마침 제 방식대로의 잔인한 유희를 즐기던 중이었다.

어디선가 정보를 듣고 클럽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개인 채널을 가진 방송인들에겐 더없이 좋은 가십거리였다.

같은 날 밤.

신분 세탁을 위해 브로커를 고용한 수정은 선수금을 전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강변에 차를 세웠다.

그녀는 단우의 기자 회견 기사를 떠올리며 어이없는 듯 웃었다.


“우수호 회장이 아버지였어? 그래서 우선호 그 인간이 지혜수를 이용한 거야? 저는 더 엉망이면서.”

화려한 옷 대신 모자를 눌러쓰고, 청바지와 평범한 재킷 차림의 수정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감옥에 수감 중이던 정호의 출소를 까마득히 몰랐던 수정이었다. 그녀는 오빠인 정호를 만난 공포감에 집에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호가 찾아옴으로써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수정이었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

“그래, 이수정은 이수정이 지켜야지.”

그녀는 지혜수는 물론 우선호를 함께 해송 바이오의 비리 당사자로 지목해 언론에 정보를 흘렸다. 틀리긴 했지만 우단우의 출생까지 언급하면서.

우선호는 지혜수에게 죄를 몰면서도 더 이글스를 삼킬 생각에 협력자 운운하면서 그녀의 소재를 숨기고 있었다.

반면, 우단우는 지혜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우선호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수정은 두 사람이 하는 짓이 웃지 못할 코미디 같았다.

그사이 수정은 제 살길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간 모아둔 비자금을 차명 계좌로 이체하고 은행의 개인 금고에 있던 몇 개의 중요한 자료 또한 옮겨 두었다.

이젠 며칠 후면 해송 바이오는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수정은 일주일 후 이 나라를 떠나 지금과는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을 예정이었다.


“왜 이렇게 늦는 거야?”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색 승용차가 보였다. 수정은 곧장 현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승용차는 그녀를 지나쳐 구석진 곳에 차를 세웠다.

수정이 가방을 들고 흔들자 대답하듯 승용차의 비상등이 깜빡거렸다. 그러곤 조수석 문이 철컥 열렸다.


‘뭐 하자는 거야? ……차에 타라는 소린가?’

주변을 살피며 브로커의 차에 다가선 수정은 조수석의 문을 당겼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흘깃 시선을 주고 조수석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고갯짓을 차에 타라는 의미로 해석한 수정은 의심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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