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불량 부단장 베를
(11/90)
11화. 불량 부단장 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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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불량 부단장 베를
2022.09.08.
황궁의 북쪽, 아치형의 큰 창이 붙은 고건물.
이곳은 4층 건물로, 황궁의 집무실 중 가장 바쁘다는 기사단의 행정실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슬슬 각종 민원을 들고 오는 귀족들의 발걸음이 시작될 무렵, 누군가 그 건물 입구에서 초조한 발걸음을 움직이며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다 누가 오면 건물 뒤편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또 나타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눈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과 넘기다 만 갈색 머리.
평소와 조금 다르지만 누가 봐도 알아볼 법한 그 수상한 자의 정체는, 흑의 기사단 부단장. 베를 알토루트다.
그는 성실하고 청렴하기로 유명한 알토루트 남작가의 셋째 아들로, 대대로 몸을 쓰는 일보단 사무 관리를 하는 직업이 많았던 집안에서 유일하게 기사가 된 사내다.
그 때문에 가문에서도 특이한 취급을 받았지만, 그래도 유전자는 무시 못 하는지 기사단에서도 남다른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 부단장으로 출세했다.
그런데 오늘, 그런 자랑스럽고 성실한 베를 알토루트는 이제 없다.
흑의 기사단 행정관들은 방금 출근한 베를을 바라보며, 인사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들에게 베를은 무심하게도,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손을 들다 말고는 제 책상에 앉았다.
그런 모습에 단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저어……. 부단장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베를이 기사단 생활 한지도 어언 7년.
지각이라곤 없던 그가 이례적으로 며칠째 정확히 5분씩 늦게 출근한 것이다.
“내가 자네에게 늦는 사유라도 말해야 하나?”
“아, 아닙니다.”
그를 걱정하던 단원은 평소와 달리 차가운 베를의 모습에 당황해하며 결재를 받았다.
그 돌아가는 모습을 잊지 않고, 비릿한 표정으로 바라봐주는 베를.
“부단장님, 요즘 왜 저러시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
“저런, 그럼 좀 쉬셔도 될 텐데.”
“절대 안 쉬시죠. 부단장님처럼 성실하신 분이 어디 있다고.”
베를은 더욱더 어두운 얼굴로, 자신을 보며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이들을 주시했다.
‘그래. 이제야 내가 엄청나게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군. 크크…….’
그렇다.
베를은 지금 반항 중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단장을 존경한다고 자부할 만큼 충성도가 높았고 또, 그런 자신이 단장과 제일 친밀하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5년간 어떤 시비가 걸려와도 꿋꿋이 제 단장을 기다리던 베를이었다.
하지만 그런 충직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5년간 유일한 연락책인 자신에게 아이 임신 소식은커녕 말도 없이 육아 휴직에 들어간 단장의 소식.
그는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깊숙이 분노했고, 결국 흑화해 자신이 생각한 최대치의 반항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괴롭겠지. 괴로울 것이다. 오늘은 머리조차 정리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이런 행동이 단장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 물론 아주 크게 후회하시겠지. 그리고 나의 빈자리를 그제야 느끼게 되실 거야. 크큭…….’
혼자 흑화해 키득대는 베를을 보며, 그를 모시는 단원들은 결심했다.
“저렇게 힘드시면서도 어쩜 저리 깔끔하게 다니실까. 대단하셔.”
“그러니까요. 게다가 근래 앞머리까지 내리시니 훨씬 젊어 보여요.”
“자, 단장님이 안 계신 지금. 우리라도 힘이 되어 드립시다!”
“그래요! 힘냅시다!”
또다시 속삭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베를은 더욱 쾌감을 느꼈다.
‘자, 오늘도 무려 5분이나 늦은 나를, 이런 게으른 나를, 타락한 나를!! 이 악마 같은 부단장을! 단원들아, 어서 단장님께 고하라!!!’
자신의 올바른 반항적인 모습에 취해 있는 부단장이었다.
그때였다.
실컷 흑화하던 베를의 눈에 들어온 책상 위의 낯선 서류.
그것은 흑의 기사단이 보낸 전서들의 회신 된 목록이었다.
“……에드. 이번 달 전서를 보낸 건 2건인데, 왜 회신 된 건 3건이지?”
베를의 물음에, 한 단원이 재빠르게 일어나 대답했다.
“며칠 전 출근 시각 되자마자 총사령관님의 보좌관이 주셔서 단장님께 발송했던 전서입니다. 급하게 보내달라 하신 건이었는데 오늘 겨우 회신받았습니다. 정말이지, 단장님께 회신받는 건 늘 어렵다니까요. 하하……. 부단장님?”
밝게 웃는 단원이 말을 하면 할수록, 베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만 갔다.
‘……다, 단장님께 총회의 초대장이……!’
회의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단장 대신, 항상 자신이 초대장을 받아 대리로 출석했던 회의.
겨우 5분 늦은 탓으로 이미 단장에게 발송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육아 휴직으로 한참이나 구설에 오른 때에!
‘아, 안돼! 단장님……!!’
순식간에 홀쭉해진 그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향해 고원의 치타처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어차피 해야 할 일.
그녀는 대회의실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칠판 맞은편 반원의 탁자에는 4개의 화려한 의자가 있었다.
그것은 흑, 백, 적, 황의 기사단 단장들을 위한 의자였다.
그 의자의 중앙을 차지한 채, 묵직한 기운을 내뿜는 사내 둘.
붉은 곰 같은 큰 덩치로 화려한 견장을 달고 있는 적의 기사단장 벵거트과 이국적인 구릿빛 피부의 황의 기사단장 아샨이었다.
그들은 루시아보다 10살 정도 위로, 그녀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설립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었다.
“오, 이게 누구십니까. 대단하신 분 아닙니까?”
“오랜만이군. 루시아 단장.”
루시아와 눈이 마주쳐 인사하는 그들은, 오랜만에 보는데도 그리 반가워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루시아는 인사와 함께 그들을 가로질러 황의 단장 아샨의 옆, 끝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앉은자리에서 가장 멀리 있는 빈자리를 주시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은 아직 오지 않은 리온의 의자였다.
협박, 불편한 선물들.
회귀하자마자 그에게 뜻 모를 술수를 당한 루시아였기에, 이 불편한 회의장에서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 피곤해진 그녀였다.
“육. 아. 휴직 중이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오? 좀체 믿을 수가 있어야지.”
조용한 회의장에서 적의 단장 벵거트가 덩치에 맞지 않게 비아냥대며 말했다.
그런 물음 같지 않은 물음에 루시아가 반응이 없자,
“크흠! 애까지 낳고 5년 만에 소드 마스터라! 애까지 낳은 여자가 어떻게. 대단하군. 설마, 폐하의 눈이라도 속인 건 아니겠지? 하하.”
누가 봐도 일부러 거는 시비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도발되기란 92세 정신연령을 탑재한 그녀에게는 한참이나 어려운 일이다.
루시아는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최소한의 반응을 하듯, 그를 보며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이봐, 단장! 그 웃음은 뭐요? 지금 날 무시하는 것이오?!”
조용히 넘기려던 루시아의 의도였지만, 언제나처럼 그 메마른 미소는 오히려 그의 화를 돋게 만든 모양이었다.
흑의 기사단 성질이 음습하고 차가운 늑대 같다면, 반대로 적의 기사단은 끓는 용암과도 같은 성질머리를 가진 집단.
그래서인지 단원들도 늘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싸워댔기에 어쩌면 당연한 상황인지도 몰랐다.
“그만하지. 단장끼리 꼴사납군. 아, 루시아 단장. 안 그래도 그 건에 대해 논의 중이네. 복귀 전에 군 징계 위원회가 열릴지도 모르지.”
둘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황의 단장이 조용히 말했다.
화제를 돌리는 것 치고는 꽤 적의가 담긴 말이었다.
황의 기사단은 황제의 곁을 보필하는 은밀한 집단.
그렇기에 많은 기사 중에서 황제와 더 가까운 게 당연했지만, 언제나 가장 위험한 순간에는 루시아만 찾는 황제였기에 그 역시 그녀가 좋게만 보이지 않던 것이다.
‘……징계라. 귀찮군.’
어차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진 휴직이었기에 별다른 징계는 없을 게 분명하다.
그저 한소리 하고 싶은 보수파 귀족들의 자그마한 잔치일 뿐.
루시아는 조기 은퇴를 선언하고 산맥으로 들어갈 때, 그들의 돌변한 태도를 떠올렸다.
위계질서에 민감한 귀족들은 지금의 단장들처럼 황제의 신임을 받는 그녀를 항상 못마땅해했지만, 결국 약해질 전력에 끝까지 바짓가랑이를 붙든 건 그들이었다.
그런 어리석은 이들과 다시 얽히려니 피곤했지만, 니아를 생각하면 정보를 빨리 알아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이득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던 중, 적의 단장이 다시 비식대며 말했다.
“징계라. 어디 제대로나 열리겠소? 훈련하라고 보냈더니 애를 낳아온 사람에게 직접 육아 휴직까지 하사하신 폐하이신데. 그나저나 훈련이 참 길긴 했나 보네. 그 소문난 흑의 단장이 불장난을 다 하고.”
남녀를 떠난 명백한 희롱이었다.
도를 넘은 그의 발언에 루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였다.
“그따위 것은, 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 저음의 부드러우면서도 깔끔하고 단호한 어투.
차분한 발걸음으로 회의장에 들어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의 마법사단 단장. 리온 루윈스였다.
언제나처럼 군더더기 없는 미소의 리온은, 오자마자 가볍게 자신의 의자를 들어 올려 루시아 옆에 두었다.
리온이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언제나 깍듯한 그가 공적인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의 편을 든 적은 없었다.
그의 직진에 당황한 황의 단장이 일어나 의자를 옮겼고, 어쩔 수 없이 적의 단장도 어정쩡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뭐, 뭐요. 대체 왜 굳이 그곳에 앉는 것이오? 아니, 그것보다. 리온 단장! 지금 같은 단장인 날 가르치려 드는 거요? 대체 이 무슨 경우요!”
“예, 맞습니다. 제 시기에 배우지 못한 것을 알려드리는 것이지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그의 상냥한 독설에 충격받은 적의 단장, 벵거트.
멀건 그의 반응에도 리온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루시아 옆에 놓은 의자에 편히 착석했다.
그러고는 평소의 성스러운 천사의 얼굴로,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뿜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