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이의 입학 준비물
(19/90)
19화. 아이의 입학 준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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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아이의 입학 준비물
2022.10.06.
엘다리온 제국 수도 광장의 거리.
그 큰 거리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고급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 한가운데 걷고 있는 루시아와 니아였다.
걷다 보니, 까마득하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점점 시원해지는 날씨에 루시아는 육아 휴직 또한 한 달밖에 남지 않음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유치원 입학식마저 이제 겨우 1주일 앞.
늦은 감이 있지만, 유치원에서 일러준 준비물을 사러 드디어 시내에 나온 모녀였다.
노르지아 원장의 의도 모를 말 중,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합격 통보였다.
정확히 한 달 뒤, 아카데미 부속 유치원에서 온 합격 통보.
제국에서 하나뿐인 유치원이기에 면접 보는 기간만 몇 달, 그 늦은 봄에 본 면접이 초여름이 되어서 합격 통보가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유치원은 늦은 가을에 입학하여 총 6학기가 아닌 5학기 시스템.
특이하게도 입학식이 가을이 된 것에는, 제국을 이룬 것이 여름인 이유에서다.
정확히는 크고 작은 나라가 합쳐져 제국이 되었기에 내분이 존재했고, 경계심 많은 이들을 위해 당장 엘다리온 아카데미라는 명문 브랜드를 앞세워 유치원을 몇 달 만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로 간의 싸움이 줄어든 것을 보면, 역시 자식 위하는 길에는 장사 없는 법이었다.
-딸랑.
기분 좋은 날씨를 느끼며 도착한 양장점.
“어서 오세요, 구스 본 클로젯입니다.”
루시아와 니아가 문을 열자, 요즘 유행한다는 엉덩이를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마중 나왔다.
역시 군복이라는 것이 위협적이었던 걸까?
유치원 면접에 이은 루시아의 평범한 차림새 덕분인지, 그 화려한 점원은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 젊은 여인은 앞서 걸으며 양장점 내부를 안내했고 그곳엔, 아기자기한 드레스와 작은 정장, 소품 등.
아이들의 옷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임을 누구라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용품이 정리되어 걸려 있었다.
친절해 보이는 점원은 루시아의 뒤에 있는 작은 아이에게 살짝 무릎 굽혀 미소지었다.
“귀여운 영애님. 유치원에 입학하나 봐요? 축하해요! 머리 예쁘게도 땋았네. 누가 해줬어요?”
이전 같았으면 루시아의 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낯을 가리며 말을 하지 않을 니아였다.
지금도 역시 루시아 옆을 절대 떠나지는 않았지만, 예전과 다른 건.
“녜에……! 버논, 해줬어여!”
시간은 조금 걸려도 확실히 대답한다는 것이었다.
노련한 원장 덕분일까?
확실히 그녀와의 면접 이후로 아이는 말을 하는 데에 빈도가 높아졌고, 또 그만큼 잘 웃었다.
“오, 그랬어요? 집사님이 솜씨가 좋으신가 봐요. 부러워라!”
순식간에 집사가 된 버논이었지만, 그가 하는 일이 집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루시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 그럼 부인, 먼저 온 아이의 치수를 잴 동안 이곳에 앉아 기다려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안내한 테이블로 가니, 점원이 니아 앞에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쿠키를 놓아주고는 이내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루시아는 달라진 니아를 보며,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반면, 아직도 고치기 힘들어 보이는 두 가지 나쁜 버릇도 함께 생각이 났다.
첫 번째는 하녀처럼 온갖 집안일을 도우려 하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잡아두기 위한 협박이었지만, 하도 닦아 대서 이젠 발자국이 남았다기보다 물로 매일 닦으니 나무 바닥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렇게 계속 흔적이 남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하지 말라고 하면 보육원으로 갈 거라고 말할까 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루시아.
그나마 단원들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유는, 아이가 착해서 집안일을 도우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루시아 눈에 내어온 쿠키를 보며 빤히 쳐다보는 니아가 보였다.
“…….”
한참을 창가에 눈길을 돌리다가도 쿠키를 힐끔거리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게 두 번째 나쁜 버릇이다.
좋아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버릇.
루시아는 집안일을 돕는 것보다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가 어른이었다면 숨기는 것이 좀 더 능숙했을 수는 있으나, 쿠키 앞에서 그것을 숨길 수 있는 5살 아이는 없다.
집 안에서야 말 안 해도 챙겨주지만, 그 버릇이 계속되다간 유치원 가서 점심은? 간식 시간은?
이대로라면 아마 다른 아이들이 달라면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말 것이다.
루시아는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것을 다른 아이에게 뺏길 걸 상상하니, 한숨이 나왔다.
‘이게 성녀의 운명인가. 그래. 이게 계속되다간 아이는 아마 모든 것을 뺏길 거다. 회귀 전 그랬듯…….’
……고작 아이가 간식에 욕심내지 않는다고 희생과 비교하는 루시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렇게 점점 호들갑 떠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
루시아는 아직도 쿠키에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어쩌면 이게 연습시킬 기회라고 생각했다.
“……맛있게 생긴 쿠키네.”
니아는 갑자기 제 속마음이 밖으로 나온 것처럼 급하게 주위를 확인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루시아.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겠지. 참 먹고 싶게 생긴 쿠키다. 그렇지?”
“……!!”
이번에는 큰 눈을 깜빡이며, 군침까지 삼키는 니아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작은 꼬리를 잔뜩 흔들며, 맛있는 간식을 눈앞에 둔 안달이 난 강아지처럼 보이기 시작한 루시아.
누가 보면 아이를 유혹해 영혼을 데려갈 악마처럼 승리를 예감하며, 니아의 귀에 마지막 직격타를 날렸다.
“내가 어릴 땐 저런 모양의 쿠키라고는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단다.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 자, 생각해 보렴. 이 바스러지는 고소한 버터 향의 과자와 안에 박힌 잼은 상큼한 열대 과일처럼 쫀득하게 씹히는 천상의 맛일 거야.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
루시아의 앞선 집착은 그녀를 거의 미식가 수준의 비유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녀 역사상 이렇게 많은 비유와 많은 단어를 말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 확실했다.
아아, 거의 넘어왔다.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한 걸까?
니아의 작은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니아눈. 쿠키가……”
그때였다.
아까 그 친절한 점원의 목소리와 함께 여인의 수다 떠는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세자르가 어찌나 얌전한지. 아주 신사가 따로 없다니까요.”
“맞아요. 남작 부인, 이렇게 의연한 아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답니다!”
“어머, 그래요? 어쩜 좋아. 호호호”
그들의 시끄러운 대화에 경계심을 세운 강아지는 결국 흔들던 작은 꼬리를 감추고 벌어진 입을 금세 닫고 말았다.
‘……아. 실패군.’
자신이 공들여 만든 기회를 무참히 밟아버린 자들을 확인하려, 루시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풀거리는 산뜻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세자르라는 아이를 옆에 두고 제 자식 자랑을 끊임없이 해대는 중이었다.
루시아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에 재빨리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다행히 점원의 배웅과 함께 작은 종소리가 멈추자 안심한 루시아.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다시 돌리려는 데 창밖에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 어머!? 설마……!”
창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바짝 놀란 눈으로 손가락질하는 여인.
그렇다. 루시아가 얼굴을 돌린 곳은 깔끔하게 잘 닦인 길이 훤히 보이는 쇼윈도인 것이다.
‘…….’
또 실패였다.
오늘은 운이 없나.
아니나 다를까 루시아를 알아본 부인은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다시 양장점으로 복귀했다.
“세상에, 세상에! 루시아 단장님!?”
오랜만에 만난 단원들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루시아였기에, 또다시 누가 누구지 게임이 시작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단장님! 저예요! 저! 마리엔!”
“아. 마리엔…….”
다행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어 마주 반응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도 확실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요!! 어쩜. 이건 운명인가 봐요. 어서 인사드리렴, 세자르!”
“네, 어머니. 세자르 체플리, 체플리 남작 가문의 첫째입니다. 반갑습니다.”
아이는 니아와 또래로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언변과 발음이 완벽해 꽤 놀랐다.
또래라도 차이가 꽤 있는 모양이었다.
“루시아 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원래도 멋진 분이시지만, 이 분은 네 아가 시절을 함께 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분이시란다.”
‘……아가 시절?’
“네, 어머니. 잘 알아요. 백의 기사단장님께 부탁해주신 이후로 육아 휴직이 만들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시아 님.”
짙은 갈색 머리에 따뜻한 인상의 세자르가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다.
‘아아, 누군가 했더니 베를의 누나인가.’
마리엔은 베를의 누나였기에, 충직한 베를이 수없이 하던 단장의 칭찬에 이미 그녀의 악명은 그저 피하기는커녕 친근할 뿐이었다.
루시아는 그런 마리엔을 제대로 본 것은 한 번이었기에 기억해내기 어려웠지만, 세자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베를과 닮아 이후로는 손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반갑구나. 세자르.”
세자르의 눈인사를 받았지만, 어쩐지 그들은 떠나지 않고 미묘한 정적만 흘렀다.
분위기를 파악하니, 그들의 눈은 루시아 뒤에 숨은 니아에게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은 아마 또래를 보고 생긴 경계심 덕분인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날이 선 느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식 인사를 가르쳐줘 본 적이…….’
“……니아에여.”
마리엔 남작 부인은 니아의 소심하고 짧은 인사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반응에 루시아는 잊고 지내던 귀족들의 예절이 생각났다.
마리엔도 남작 부인 지위를 가진 귀부인이었고, 아무리 5살 아이의 인사라도 대뜸 이름만 말하는 이런 인사는 결례일 수 있었다.
니아의 짧은 인사에 마리엔의 눈썹이 꿈틀댔다.
“……너!”
‘……귀찮게 됐군.’
루시아는 벌어질 훈계에 한숨을 작게 쉬었다.
하지만,
“너……. 너무 귀엽잖아!! 어쩜! 제가 꿈꾸던 얌전한 여자아이예요!”
“…….”
루시아의 예상과 달리, 있는 호들갑은 다 떨며 반짝이는 눈으로 두 손을 꼭 모으고 있는 마리엔이었다.
“세자르가 워낙 얌전해서 다음에 딸을 낳게 되면 활달한 아이를 원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아이의 소꿉친구 중에 여자아이가 있는데, 글쎄. 그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랍니다? 그 아이가 집에 왔다 하면 모든 물건을 다시 확인해봐야 해요. 꼭 어딘가 부서져 있다니까. 오호호……!”
아무리 들어도 그 여자아이가 이반느일 것 같은 느낌은 그저 느낌일 뿐인 걸까.
마리엔은 멈출 수 없는 기차에 탑승한 것처럼 계속해서 아이들에 대한 말을 늘어놓았다.
듣고 있는 귀가 터지기 직전, 다행히 세자르의 재촉에 그녀의 지옥 같은 수다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재단실에서 한껏 긴장한 채 팔을 벌리고 있는 니아를 바라보며 루시아는 생각했다.
‘……제법 적응이 쉬울 수도 있겠어.’
폭풍 같은 수다를 듣는 시간은 괴로웠지만, 그 덕에 생각보다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여유가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덜어진 루시아였다.
“자, 얌전하니 빨리도 끝나네.”
“호호, 그러게 말이야. 자, 그럼 어디 상을 줘볼까요?”
“자, 어디 한번 골라봐요. 작은 영애님. 두 개도 좋답니다.”
치수를 재는 내내 수줍은 아이의 모습에 중년의 여인들은 인자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그중 한 명이 고급 사탕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러나 아이는 한참을 눈치 보며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또…….’
어린아이가 사탕을 거부하다니.
숙소에서도 간식으로 가끔 사탕이 나올 때면, 언제나 환하게 웃던 아이였다.
그런 모습을 아는 루시아는 지금 이게 또 그 좋아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버릇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중년의 재단사는 아이가 거부하자,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이런, 꽤 어른스러운 아이군요. 그럼…….”
그녀가 바구니를 치우려고 돌아서다, 갑자기 옷자락이 집혔는지 작은 무게감에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자,
“……쿠, 쿠키.”
아이의 소심한 중얼거림이 재단실에 퍼졌다.
“네? 무슨…….”
되묻자, 아이는 세상 간절한 얼굴로.
“아까 쿠키……! 루샤 줘야 해. 어린 루샤는 그런 거 본 적두 없어. 한 번두 못 먹었대여. 그로니까 한 개만, 한 개만. 주쎄여! 부탁임미댜……!”
아이는 세상 간절한 얼굴로 생애 처음 누군가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의 애절한 부탁에 재단사들의 변한 눈빛이 얼빠진 루시아에게로 향했다.
“요즘 젊은 엄마들 말이야! 식습관 식습관 하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쿠. 키. 하나 못 주면 그게 정말 아이를 위하는 길이 맞을까?”
“그러게 말이야.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아이에게 쿠. 키. 하나 먹이지 못하는데 그깟 유치원 하나 보내는 거로 훌륭한 교육이라니.”
“맞아. 이렇게 흔한 쿠. 키. 를 어린 동생 준다고 달라고 하다니 믿어 지지가 않네? 가슴이 너~무 아파. 그렇지?”
그것은 마치 아동학대라도 목격한 뒤 쏟아지는 뒷말들 같았다.
루시아는 정말 오랜만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이 앞에 입조심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 때문이었던가.
이내 순수하고 순진한 미소로 받아온 쿠키 더미를 루시아에게 수줍게 내민 니아.
그것을 받아 든 루시아는 차갑고 정 없는 엄마를 바라보는 무시무시한 재단사들의 눈빛을 정면으로 당당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오해라고 밝히기엔,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엄마를 위해 가져온 귀한 선물에 대한 칭찬을 바라는 반짝이는 눈망울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너만 행복하면 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