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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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그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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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그의 목적
2022.11.20.
녹색의 칠판과 교실 중앙, 둥글고 큰 원탁들과 작은 의자.
그리고 구역이 나뉜 뒤편 놀이방, 아기자기한 수많은 장난감과 책.
이처럼 아이들이 쓸만한 작은 것들로 가득한 유치원 참새 반에서는, 일찍부터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에밀리가 홀로 서 있었다.
한때는 아카데미의 여왕벌이라 불리며 기세등등했던 백작가의 고귀한 영애, 에밀리.
이제는 고귀한 거지가 된 가족들의 가장이 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난관을 무조건 뚫고 나아가는 것.
그런 에밀리는 고개를 들어 올려, 양손을 힘차게 뻗었다.
‘야호! 이제 숨는 것은 하원 때만 하면 된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는 이유는, 황궁에서 일하는 부모 한정으로 한 시간씩 앞당겨 아이를 맡길 수 있었는데 니아가 그 이른 아침 반이었기 때문이다.
“아시르 여신님, 오늘도 무사히 숨을 수 있게 해주…… 악! 깜짝이야!”
에밀리는 제 치마가 벗겨지는 느낌에 얼른 허리춤에 손이 갔다.
“나 왔더.”
“어머……! 이반느, 왔구나. 힘도 좋지. 근데 선생님한테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움, 죠은 아침이에여. 에밀리 선생님.”
“그래. 잘했어. 내일부터는 그렇게 하기야?”
“웅.”
“응이 뭐야, 네라고 해야지!”
“녜!”
벌써 일주일은 가르친 내용이지만, 대쪽 같은 이반느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놀이방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흐린 눈으로 지켜보는 그녀 뒤로, 웅얼거리는 얇은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이에여. 션생님……!”
“어머! 제국에서 가장 예쁘고 귀여운 니아 왔구나! 좋은 아침이야. 어젯밤 잘 잤니? 선생님은 잘 잤단다.”
그렇다. 보험 삼아 가장 잘 보여야 하는 원생 1순위, 니아.
이른 아침 반에 있다가 온 니아는, 온갖 사탕발림에 반 발짝 물러서서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반느에게로 달려갔다.
에밀리는 그런 니아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말도 안 돼. 저렇게 소심한 애가 그 차가운 루시아의 딸이라니.’
아이는 제 엄마와 똑같은 검은 머리였지만, 그녀의 딸이라고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착하고 온순한 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하긴. 자기 자식은 아끼는 걸 보니, 저렇게 곱게 클 만도 해.’
입학식에서 게더린 일가의 후처치만 봐도, 그녀의 과보호가 알만한 에밀리였다.
‘그러고 보니, 의외로 학부모들도 조용하네? 흑의 기사단 단장의 아이라면 한 번쯤 난리가 날 법도 한데……. 아, 올해는 거의 다른 왕국 출신이었던가? 그럼…….’
지금 이 조용한 상황은 일부러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
만약 고위급 귀족의 손자 손녀가 있는 상급반이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무성한 소문에도 전쟁 5년, 훈련 5년.
장장 10년을 모습을 감춘 루시아였기에 동창인 자신만 알아본 것이다.
그렇게 에밀리는, 이 살벌해질 눈치 게임에 끼지 않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물기로 했다.
그녀는 결심으로 굳은 얼굴을 재정비하고, 차례로 들어오는 아이들과 밝게 인사를 하며 시선을 모았다.
“자, 참새 반 친구들. 이제 다 왔으니 모여볼까요?”
“네에-!”
대부분 놀이방에 있던 아이들은 하나둘 착석하기 시작했고, 그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을 보며 에밀리는 오랜만에 한껏 밝은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실, 오늘 기분이 매우 좋았다.
오늘은 무려 유명한 어둠의 중매인을 통해 자산가들의 명단을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의뢰로 인해 모아두었던 돈을 탕진하긴 했지만, 얼마 전 그 정보로 인해 알려지지 않은 지방 영주와 결혼한 안나가 알사탕보다 큰 다이아 결혼반지를 자랑하는 걸 보니 그 정도 돈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귀족들의 재산 정보를 캐내는 거라, 연루되면 감옥에 갈 위험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후후, 극상의 후작가를 포기한 지금. 명예는 무슨, 세상은 돈이 최고라고!’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온갖 금은보화를 두른 모습을 상상하는 욕망의 두 얼굴이었다.
“오늘은 말이죠. 새로운 친구가 올 텐데, 저기 저쪽에 앉을 그 친구를 위해 다 같이 박수 연습을 해볼까요?”
“녜에-!”
그녀가 가리키는 빈 곳은 니아와 이반느, 로이, 세자르가 함께 앉은 동그란 테이블이었다.
그곳에 빈자리는 원래 게더린의 자리였는데, 오늘 그 자리를 대신해 누군가 새로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작고 오동통한 손을 들어 올리자,
-똑똑
마침 새로운 아이가 도착한 건지,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자, 새로운 친구가 도착했나 봐요. 약속대로 선생님이 두 손을 들면~!”
-두두두두!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완전무장한 황궁 기사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설마, 의뢰가 벌써 들켰다고?!’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란 에밀 리가 하찮게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선생님의 신호만 기다리던 아이들이 손뼉치기 시작했고, 그 환영과 함께 험악한 기사들 사이에서 나온 조그마한 아이.
“샤를 엘다리온 황녀 전하, 도착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름에 그녀는 넋 나간 에밀리.
그녀의 눈앞에는 누가 봐도 황족임을 뜻하는 달콤한 솜사탕 같은 분홍 머리, 고급 드레스를 두른 인형보다 더 인형같이 예쁜 아이.
순간 그녀의 머리를 밝히는 생존 본능에, 최근 사교계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사건은 어떤 귀부인이라도 황녀의 유모로 가기만 하면, 최소 한 달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그만두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었다.
그렇게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하던 그녀가 황녀의 뒤에 있던 노르지아 원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잘 부탁한다는 입 모양 함께, 짙은 미소를 보이며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소름 돋게 인자한 미소.
루시아를 마주칠 때 보았던 그 함정과 같은 미소와 다르지 않은 것은 착각일까?
괴물의 아이와 제국의 소 악마 금쪽이, 아기 파이터 이반느까지.
아이들의 박수 세례 사이로, 오늘도 어김없이 이반느 그림처럼 썩은 쭉정이가 된 에밀리였다.
*
루시아의 집무실.
아이의 하원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아이렌 황태자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와……!”
그의 탄성에 루시아가 쳐다보자,
“못 알아볼 뻔했네. 정말 예쁘다.”
그녀가 군복 벗은 모습을 처음 본 아이렌은, 마치 넋이 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원 생각에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루시아.
예상했다는 듯 한숨 쉬며 따라붙은 그가 농담 반 진담 반, 말을 건넸다.
“같이 가자니까. 근데 단장, 방금 제국 내 1, 2등을 다투는 인기남의 고백을 들은 소감은 어때?”
그의 놀리는 듯한 말에 루시아는 대꾸할 가치도 못 느끼는 듯 더 빠르게 걸었다.
‘역시 장난질이군.’
지금이야 나이를 먹어 얌전하지만, 한때 20살이 되기도 전의 황태자는 어마어마한 악동.
이를테면 한때 소문난 잉꼬부부를 이혼에 이를 정도로 만든다거나, 콧대 높다는 영애의 속을 태우거나, 그가 껄떡댄 왕국의 공주가 황궁의 담을 넘게 만들어 국교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속썩이던 그였다.
그에 비교하면 이 정도는 제법 가벼운 장난이 아닌가.
루시아는 대충 그가 말장난에 넘어갔거나, 오해거나, 잘못 들었을 거라 예상했다.
“아, 대답 안 해줄 거야? 그럼 좀 천천히라도 가든지. 나보다 키도 작으면서 뭐 그리 걸음이 빨라?”
“같이 가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목적지가 같다니까.”
그의 수상한 말에 루시아는 그를 힐끗 보았다.
“에이, 그렇게 경계하지 말지. 그래도 우리 친했잖아? 하하, 그 표정은 마치 기억이 100년도 더 된 거 같아 보이네?”
“…….”
그의 텅 빈 농담에 그녀는 뭔가 켕긴 듯 헛기침이 났다.
아마도 그 기억은 루시아가 16살, 기사가 되자마자 맡았던 그의 호위 임무를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아의 기억 속에는 그와 친했던 기억이 없었다.
그저 징징거리는 걸 몇 번 받아준 기억이 있을 뿐.
“진짜 기억 안 나? 서운하네. 단장이 날 두고 전쟁에 나갔을 때 정말 슬펐는데, 매일 밤 베갯잇에 눈물을 적시며 신전에서 매일 기도할 정도로…….”
그는 그녀를 따라 걸으면서 장난인 듯 진심인 듯 우울한 분위기로 툴툴대었다.
루시아는 그를 슬쩍 보고는, 역시나 아직도 떼쟁이인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녀를 전쟁에 나가게 하지 않기 위해 황제의 다리를 붙잡으며 집무실을 열흘 넘게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반대를 했었다.
결국, 보내야만 했지만.
“목적이 뭡니까?”
“응?”
“비밀로 해주는 목적.”
“친해지고 싶다고 말했는데 안 믿네. 그게 안 믿긴다면, 비밀로 해야 할 만큼 단순한 사정이 아니라는 거겠지?”
“……!”
루시아는 꽤 놀란 듯, 무심한 얼굴에 금이 갔다.
“하하, 여전히 거짓말 못 하잖아?”
황제를 닮아 체력은 약해도 머리 하나는 좋았던 그여서 그런지, 목적을 알아내려던 루시아는 되레 정보를 주고 만 격이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조금 초조해진 루시아의 눈에, 벌써 담벼락 너머 유치원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냉정히 생각했을 때, 각성까지 10년도 더 남은 시점에서 그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니아가 성녀라는 걸 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렇게 추정한다면,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니아가 그녀의 딸이 아니라는 것뿐.
기억대로 악동이라고 단정했을 때, 지금 가는 곳이 유치원이라면 아이 앞에서 서슴없이 말을 꺼낸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람이 몰릴 이 시간에 그와 가는 것은 큰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돌변한 루시아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담벼락으로 몰아넣었다.
“……왜, 왜 이래.”
그가 다가오는 루시아를 피해 뒷걸음질 치자, 그때다 싶어 유치원으로 향하는 퇴로를 막기 위해 벽에 발을 디디며 가로막았다.
-탁.
루시아의 구두가 아이렌의 허벅지 바로 옆, 유치원 담벼락에 박히는 소리였다.
“……루, 루시아. 치, 치마라고오~!!!”
이제까지 능글거리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황태자는 터질 듯한 얼굴로 애써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나, 루시아는 그의 사정을 봐줄 수가 없었다.
“목적지가 어딘지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가실 수 없을 겁니다.”
-푸슛.
허약 체질의 그가 결국 코피를 터트리자, 루시아는 재빨리 그의 코에 손수건을 갖다 대었다.
고작 이런 협박에도 코피를 터트릴 정도로 병약하지만, 그는 제국의 황태자.
그런 고귀한 황족을 협박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그만큼 루시아에겐 목적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루시아가 작은 외침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의 미니어처라고 해도 좋을 아이가 청안을 깜빡였고 그 아이를 따라 병사들도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피가!”
“괜찮아. 이 부인이 도와주셨어. 인사부터 드리렴.”
새침해 보이는 아이가 다가가자, 당황하던 그는 어디로 갔는지 멀쩡한 얼굴로 담담하게 코피를 닦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네. 부인.”
이 귀엽지 않은 말투의 아이는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루시아는 눈앞에 솜사탕처럼 보송한 머릿결의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들은, 조금의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는 유치원의 원복을 입은 상태.
그렇다면 아이렌 황태자는, 유치원 다니는 동생을 데리러 온 거였다고?
“……아닙니다. 샤를 황녀 전하.”
상황을 눈치챈 루시아가 장난기 그득해 보이는 아이렌 황태자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뜸 들이며 말하자,
“그러게, 날 믿으라니까. 난 분명 목적지가 같다고 말했다고.”
그는 그녀의 반응이 꽤 만족스러운 듯, 보란 듯이 귀한 동생을 안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