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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그래도 바보가 하나인 게 낫지 (39/90)


39화. 그래도 바보가 하나인 게 낫지
2022.12.15.



“하아, 하아.”

차가운 푸른 공기가 가시지 않은 새벽.

방금 깨어난 니아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검은 긴 머리를 흔들며 뒤돌아 사라지는 여인.

그렇게 망설임 없는 뒷모습에 붙잡으려 발버둥 쳤지만, 더러운 진흙과 오물들이 발에 묶여 도무지 무게를 이길 수 없었다.

니아는 그 생생한 꿈에 불안한 듯, 서둘러 이불을 걷었다.

그러자,


“……휴우.”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는 잠버릇이 고약한 이반느의 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아이는 다행이라 안심하면서도 이미 두 눈 가득 맺혀버린 물방울을 잡지 못했다.


“……엄마아.”

이대로 날이 밝아도 엄마가 오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식사 시간 웃어주던 얼굴들, 심심할 새 없이 함께 놀았던 이반느, 정원의 안락한 노을빛.

그 모든 것은 데리러 올 루시아가 있기에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이제 더는 잠이 오지 않는 아이는 이내 몸을 동글게 말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드륵.

분명 이곳은 2층인데?

니아는 깜짝 놀라, 숨을 죽이고 이불에 파고들어 눈만 빼꼼히 내밀었다.

그리고 방금 살포시 들어온 인영과 눈이 맞자,


“……쉿.”

새벽빛에 천천히 드러난 루시아의 얼굴이 아이의 맑은 금안에 스며들었다.


“……우, 우으으으으……!”

“……!”

니아는 시킨 대로 소리를 죽였지만, 역시 울음을 참지 못한 채 그대로 달려가 안겼다.

그 바람에 열린 창문 뒤로 넘어가 큰일 날 뻔했지만, 그녀의 운동 신경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이가 무사한지 확인만 하고 가려고 했던 루시아.

하지만 어쩐지 안겨 오는 체온에 무사한 건 생명의 나무를 보고 난 뒤 처참했던 그녀의 마음이었다.


 

*

엘다리온 황궁의 북쪽 흑의 기사단 전용 연무장.


‘소드 마스터, 검은 괴물이 돌아왔다!’

이것은 연무장 앞에 득실대는 기사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었다.

강대국의 전사들을 가차 없이 괴멸하고 5년을 내리 은둔한 검은 괴물.

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커진 괴소문은 신 제국이 되어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육아 휴직 후, 복직.

황궁에는 대연무장을 파괴한 엄청난 굉음으로 그녀의 복귀를 알렸고, 그 폐허의 증거로 이제 더 이상 소문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겁먹은 귀족들을 제외하고 소드 마스터를 경외하던 기사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로 치솟은 것이다.

과연 그녀를 이길 자는 이 대륙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지금 이 시각 연무장 입구에 알음알음 몰려든 각 기사단의 단원들은, 저 멀리 상석에 앉은 루시아를 일제히 바라보며 경외와 추앙의 눈빛을 반짝이고 있다.

그때였다.

-탕탕.

버논이 검집으로 방패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자자, 그만 기웃거리시고 여길 좀 보십시오~!”

“에헴! 우리 단장님은 비싼 몸이시니, 보는데 1 실버. 20 미터 안으로는 10 실버! 연무장 입장은 1 골드으~!”

“……여기로.”

버논과 길리아나가 손짓하자, 히스가 어디서 가져온 건지 꽃병을 내밀었다.

그들은 마치 서커스의 입장료를 걷듯, 순진한 기사들을 향해 돈을 걷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루시아 옆에 있던 부단장 베를이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었다.


“저 몹쓸……!”

기사의 품격 같은 것은 개나 주라는 듯, 그들의 과거가 보이는 모습에 베를이 참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달려간 것이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명예로운 흑의 기사단의 단원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어서 이리 주세요!”

그가 돈이 반쯤 찬 히스의 꽃병을 빼앗자,


“부단장님! 어차피 눈먼 돈 아닙니까!”

“아, 부대장!! 우리 그걸로 회식하자아~! 단장님! 말려봐요!”

“이리 줘.”

이런 짓을 당사자의 눈앞에서 벌려 놓고 말려보라니, 변치 않은 뻔뻔한 그들이었다.


“이러니까 우리 흑의 기사단이 욕을……. 으아아아? 이게 무슨……!”

-촤르르르르!

갑자기 베를이 들고 있던 꽃병에 반짝이는 골드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30 골드. 대련비라면 이 정도면 됩니까?”

돈이 흐르는 소리에 수십 명의 시선이 쏠렸다.

그것은 연무장 상석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저 애송이.’

황의 기사단 에이스. 차기 소드 마스터.

거뭇한 피부의 이국적인 외모, 높게 묶은 진한 금발에 길고 시원하게 뻗은 다리를 가진 여인이 루시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루시아보다 5살 어린 20살의 나이로, 제법 눈에 띄는 실력을 보이는 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기준.

대륙의 모든 소드 마스터들이 그렇듯, 그녀가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15년 이상 지나야 했다.

만약 정점에 오른 루시아가 그녀를 집중 교육한다면, 훨씬 빠르게 도달할 수 있겠지만.

이미 그녀에게서 돌려버린 루시아의 시선은 관심 없는 듯 공허했다.

사실 지금 루시아는 흑마법사들과 생명의 나무까지, 특별 임무로 알게 된 새로운 정보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그 건으로 재상에게 독대를 신청한 그녀는 알현 시간이 되길 기다리며 연무장에서 훈련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루시아 단장님!”

결국, 그녀가 베를의 방어를 뚫고 루시아 앞에 서서 눈을 빛냈다.


“돈은 가져가도록.”

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짧은 거절에 오히려 난리가 난 이들은 흑의 기사단 에이스들.


“단장님! 대련 한번 해주시고 저희 회식 거하게 하면 안 됩니까! 네!?”

“대장! 우리 그냥 맛있는 거 먹자! 30 골드면 고급 주점을 통째로 빌릴 수 있다고!”

“……맛있는 거!”

-차랑차랑.

무표정한 히스도 어느새 꽃병을 뺏어 들고 루시아에게 보이듯 흔들고 있었다.

진저리난 얼굴의 루시아가 한없이 졸라 대는 이들에게 입을 열 참,

누군가 청중을 뚫고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황의 기사단, 부단장. 루시아 단장님을 뵙습니다. 저희 못난 단원이 폐를 끼쳤습니다! 이전 일도, 이번 일도. 정말 죄송합니다!”

단단한 근육으로 다져진 깔끔한 외모, 큰 키.

보수적인 단장 밑에서 제법 일 처리가 우직하고 깔끔하기로 소문난 황의 부단장이었다.

이곳에 나타날 리 없는 그는, 아마도 사고 치는 단원을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차기 소드 마스터는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반응 없는 루시아의 뒤에 숨듯, 황의 부단장을 경계하는 것이다.


“하아, 레비. 이 녀석! 뭐 하는 거야? 빨리 이리 오지 못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듯, 황의 부단장이 이마를 짚으며 외쳤다.


“싫습니다! 전 흑의 단장님이 좋다고요!”

“뭐?”

“이제 와 모른 척하기입니까? 기사단 전배 신청을 10번도 더 냈잖습니까!”

둘의 대화를 듣던 주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황의 기사단은 황제를 직접 모시는 근위 기사단으로, 특별히 높은 귀족 출신만 뽑는 기사단이었다.

근데 그런 기사단의 간판이, 범죄자 취급받는 이곳에 오고 싶다고?

루시아를 동경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출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귀족이 이렇게 적극적인 공세를 하는 것은 아예 없다고 봐도 되는 사례였다.


“오호? 베를 부단장님. 대련비가 30 골드인데, 입단비는 얼마를 받아야 합니까? 저는 막 설레기 시작합니다만.”

“입단비라니. 사기 칠 생각 마십시오. 여기가 무슨 용병단입니까?”

너구리 같은 버논의 능청스러운 말에 베를이 눈을 흘겼다.


“허, 헛소리 그만하지 못해? 아샨 단장님이 있는데 무슨 그런 말을……!”

“그거야말로 무슨 소리예요? 루시아 님이 아버님보다 훨씬 강하신걸? 전 이날만을 기다렸다고요! 그러니까 빨리 전배 시켜달라고오!”

또다시 충격적인 2차 발표에 연무장에 몰린 기사들에게서 큰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에엑! 저 기사! 황의 단장님 딸이었어?”

“와, 어쩐지 외모가 닮았더라니. 근데 딸이 다른 기사단을……. 하하하하!! 이게 무슨!”

“……개망신?”

에이스들의 놀림에 귀가 새빨개진 황의 부단장은 결국, 그녀의 목덜미를 억세게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놔! 놔아아아! 루시아 단장니임! 전 단장님밖에 없어요! 아카데미 시절부터 계속 동경했다고요!”

그녀의 간절한 고백이 전용 연무장에 퍼졌다.

그 모습에 길리, 버논은 거의 배를 움켜쥐고 눈물이 고일 정도로 낄낄거렸다.


‘검은 제법 쓰나, 머리가 제정신이 아니군.’

그래서 저 재능에도 15년이나 걸렸으리라 짐작하는 루시아였다.


“우와. 난 뭐, 겁 없이 달려드는 하룻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완전 터무니없는 망나니였잖아?”

-촤락촤락.

길리아나가 꽃병에 있는 골드를 한주먹 쥐어 주머니에 몰래 쑤셔 넣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그 콧대 높은 아샨 단장님도 자식 하나는 마음대로 못하시는 모양입니다.”

-도르륵, 탁. 도르륵, 탁.

버논도 검집에 골드를 하나씩 흘려 넣으며 말했다.

-후두두두둑.


“응.”

마지막으로 히스가 자신이 만든 마도구, 무한 공간 주머니에 죄다 쓸어 넣어 깔끔해진 꽃병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던 루시아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저긴 바보가 하나잖아.”

그녀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베를.

이내 그 바보들의 정수리를 쳐서 토해낸 돈을 다시 꽃병에 담기 시작했다.

*



“어쩐지 반응이 꿍하더니, 황태자비라고? 웃기지도 않군. 자네마저 휩쓸리진 않았겠지? 애들 사정은 별개로 폐하와 자네가 나선다면 나도 가만 있지 않을 걸세.”

어쩐지 루시아와 있을 때와는 천지 차이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는 총사령관, 헬버트 벵험.

그는 재상의 집무실에 앉아 여유롭게 보란 듯 검을 닦고 있었다.


“크흠. 그런데 그랜드 소드 마스터 소식에는 놀라지도 않는군? 검사로서 허탈하지 않나?”

재상은 헬버트의 눈치를 보며 사실 휩쓸렸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을 하기에는, 하필 헬버트가 날카로운 검을 닦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탈은 무슨! 당연한 거지. 예상보다는 좀 이른 것 같긴 하지만, 난 그 아이가 도달하지 못할 거라 여기지 않았네. 오히려 그런 명칭 같은 게 무색할 정도로 더 대단한 존재가 된다 해도 그건 당연한 거지. 내 제자이자, 딸이니까! 하하하!”

갑자기 루시아의 이야기가 나오니, 그는 바보처럼 주절거리며 쾌활하게 웃어 댔다.

역시 소문난 팔불출 중 팔불출이었다.


“하여간 유별나군. 동족이라고 감싸는 건가? 지금의 자네가 회색의 악마라 불릴 때가 어언…….”

“……쓸데없는 소리.”

젊은 시절부터 함께 다녔던 터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을 회상하던 페더린 재상이었다.

다시 굳어버린 헬버트는 그를 조금 노려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잘한 짓인지 모르겠군.”

“그 나무를 보여준 것 말인가?”

“그건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흑마법을 쓰는 자들과 얽히는 건……. 께름칙하단 말이지.”

“걱정 말게. 대륙 어딜 뒤져도 지금의 루시아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걸세. 껄껄.”

페더린 재상은 그의 말이 터무니없다며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굳은 헬버트의 얼굴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무언가를 지키며 싸우는 건 다른 문제지. 난 이제 더 이상 더러운 꼴 보게 하고 싶지 않아. 지난 전쟁으로 충분히 차고 넘친다고 생각하니까.”

루시아와 만난 것은 헬버트 나이 47살 때였다.

그런 손녀뻘의 7살 아이를 발견한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후견인을 부탁받고 긴 여행이 끝나 처음으로 아이를 보려 멋대로 찾아간 날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가 기억하기로, 어린 루시아의 상태는 심각했다.

사람과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도, 함께 음식을 먹거나 온기를 나눈 적도 없는, 말 그대로 텅 빈 아이.

언제나 의도를 알 수 없는 사내라고 생각했던 케르반 클루에르 백작은 스승과 제자의 사이로 막역했지만, 아이를 이런 식으로 방치한 것에는 그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 앞에서 정규 교육을 제외한 교류는 금지, 매주 바뀌는 사용인들도 사적인 말을 하는 것을 금지, 그 흔한 동물을 키우는 것도 금지.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아이를 키우는 데에 쓰는 수칙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후견인인 헬버트는 그 모든 금지 사항을 무시하고 아이에게 살갑게 검술을 가르쳐주었고 그 숨찬 두근거림이 결국, 아이에게 첫 온기가 되었다.

그렇게 아이에게 검은 자신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헬버트 역시 처음은 연민이었지만, 그렇게 재능이 넘치는 아이가 핏줄 하나 없는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어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자신을 검사가 아닌, 가족으로서 필요로 하는 유일한 아이.


“어딜 가는 건가? 설마.”

“말했잖나? 둘의 찬성이 아니었다면 이 일에 끌어들이기 싫었다고. 그러니 지루한 이야기는 자네가 해야지? 난 미움받고 싶지 않네. 조금도 말이지.”

“그래서 결론은 도망친다는 건가?”

‘……또 자극해서 경계를 받으면, 이번엔 진짜 눈물 나올 수도 있다고. 크흡…….’

겉보기에 헬버트는 무덤덤한 얼굴로 자리를 떴지만, 팔불출인 그는 사실 루시아의 차가운 눈빛을 받은 그날의 충격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똑똑.

그가 나간 문을 지켜보던 재상의 미간이 펴지기도 전에,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루시아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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