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학부모 황비의 초대
(42/90)
42화. 학부모 황비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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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학부모 황비의 초대
2022.12.25.
황궁의 서쪽, 녹빛의 작은 별궁.
-툭툭.
경비병이 알아볼까 담을 넘어 들어온 루시아는, 낙엽이 붙어 있을까 치마를 무심히 털어냈다.
그렇게 정원을 헤치고 조금 걸어 나오자, 우아하게 양산을 쓴 부인들이 보였다.
사철나무 정원의 알록달록한 꽃 같은 그들은, 알기 쉽게 두 부류로 나뉘어 정원의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머~! 루시아 부인!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반이 달라서 안부가 궁금했는데!”

“그러게요. 방금 마리엔 부인도 잠깐 들러 인사했는데, 함께 보지 못해 아쉽네요. 다음에 다과 모임을 열어볼까 봐요.”
메라와 세르딘의 반기는 인사에, 대치된 귀부인들의 시선이 몰렸다.
유치원은 초급과 고급, 졸업반.
즉, 3학년 나뉘어 있어 반 대표는 총 12명으로, 고위급 귀부인과 신진 귀족 부인이 서로의 영역을 가르고 있던 것이다.
그 신진 무리에 루시아가 오자, 그녀들은 견제하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 흑빛 머리의 부인은……?”

“네, 맞는 것 같아요. 아까 저 무리에 왔다가 돌아간 부인에게 듣기론 남편이 전쟁 중에 전사했다는데, 대체 어느 지방의…….”
멀리서 그녀들의 소곤거림이 루시아의 밝은 귀에 들어왔다.

‘어떤 부인이 왔다가 내 이야기를 했다는 거지? 아, 마리엔인가.’
루시아는 거짓 정보를 속삭이는 그녀들의 말에 방금 들렀다는 마리엔이 떠올랐다.
그녀는 에이스들처럼 흑의 기사단장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걱정해주는 듯했다.

‘그래서 지난번부터 모른 척해 준 건가.’
루시아는 반 대표 때부터 리온을 엮으며, 부인들의 눈을 돌리던 것이 기억났다.
수다가 많아 힘든 타입이지만, 자신을 돕는 그녀의 행동에 루시아는 언젠가 모든 것이 밝혀지면 보답하리라 다짐했다.

“이곳은 너무 멋진 곳이에요! 이런 황궁에 함께 올 기회를 얻다니. 남편도 한 번도 와본 적 없다던데, 샤를 황녀 전하 덕분에 호강이네요! 호호호.”
그렇게 한쪽은 신나서 수다를 떠는 반면, 오히려 고위 귀족가 부인들은 즐거워하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저 웃는 얼굴 좀 보세요. 아직 자기네들이 누굴 뵙는지 모르나 보네요.”

“후후, 알만하지요.”
루시아는 그녀들의 의미심장한 말이 거슬렸지만, 마침 꽤 깐깐해 보이는 별궁의 시녀장이 나타나 안내가 시작되었다.

“황비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 따라오십시오.”
그녀를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두 부류의 여인들.
설렘을 안은 부인들이나, 도도한 부인들이나.
분명 어떤 결심이 보이는 그녀들의 머릿속엔 똑같은 바람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의 소풍 장소가 반드시, 자신들의 영지로 정해지는 것.
1년에 전 유치원생이 모이는 모임은, 발표회와 가을 소풍.
그중 특히 가을 소풍은, 곡식 수확기로 황금빛이 될 근사한 영지의 모습을 영향력 있는 귀족가 자제들의 머릿속에 남기기에 제법 좋은 기회인 것이다.
게다가 이번엔 황제가 끔찍하게 아낀다는 샤를 황녀도 함께이기에 분위기는 꽤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열띤 분위기가 무색하게도, 따라온 이곳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
아마도 모두의 머릿속에 있을 밝고 우아한 연회장이 나타나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이 깜깜한 공간은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나마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빛마저 암전되자, 불안한 작은 숨소리가 커질 때쯤.
-탁!
갑자기, 연회장 중앙에 강한 빛이 밝혀졌다.
순식간에 발현된 빛 때문에 깜짝 놀라, 눈을 찡그리는 부인들.
그녀들의 시야가 회복될 때쯤,

“어머, 저게 뭐야?”
그 강렬한 빛 사이로, 뜬금없이 반짝이는 수백 개 잔이 쌓인 샴페인 탑이 보였고,
-팡!

“꺅!”

“엄마야!”
-졸졸졸, 파스스스…….
우스꽝스러운 분장의 광대가 순식간에 서로의 어깨를 올라타, 그 화려한 탑의 정점에서 고급 샴페인을 터트리며 붓는 소리였다.
그러자, 산호색 거품이 반짝이는 진주알처럼 화려하게 쏟아져 내렸고, 그 장관을 시작으로 밝혀진 무대 위 흥겨운 음악과 댄서들이 춤과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황비의 연회장이라고 보기엔 말도 안 되는 분위기.
게다가 황당한 귀부인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한 것은, 불이 밝혀지며 드러난 테이블의 카드와 이국의 마작, 물담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뿌연 연기였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이곳은 완전히, 완벽하게.
어느 뒷골목의 퇴폐 귀족들이 벌이는 불순한 공연과 다름없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대적인 혼란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듯, 천장에서 내려오는 그네 하나.
그 그네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앉아 있는 아름다운 긴 분홍 머리가 무대의 중앙에 우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 절세미인은 가녀린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치며,

“자아, 육아에 지친 그대들을 위해 준비했답니다! 잠시 부모의 역할은 잊고, 휴식을 취해보아요!”

그녀는 분명 세상 누구보다 우아하고 고귀하고 현명해야 하는 여인, 로비나 엘다리온 황비.
그러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서로를 멀리하던 귀부인들은 닭장의 놀란 닭같이 붙어 그저 동공을 떨어 댈 수밖에 없었다.
*
그 시각, 엘다리온 유치원.
참새 반에는 고소한 버터 냄새가 가득했다.
그것은 간식 시간이자 모의 티타임으로, 아이들의 테이블 가득 황금빛 호박파이와 상큼한 오렌지 주스가 찻잔 가득 따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교사인 에밀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진짜 어른들의 다과 시간을 흉내 냈다.
그리고 연습용으로 찻잔에 따라진 오렌지 주스를 우아하게 홀짝이던 샤를이 말했다.

“니아 어머니가?”

“웅, 오눌 전하 엄마 뵈러 간다구 해쎠여.”

“오호, 그래서 며칠 별궁이 시끄러웠구나.”
니아는 대답하면서도, 열심히 주변 아이들을 살폈다.
아무래도 식사 예절에 관해 버논에게 조금 배웠던 적이 있기에 틀릴까 봐 전전긍긍인 모양이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이반느가 벌써 호박파이의 마지막 한입을 넘기며 물었다.

“전하, 별궁이 황궁이야?”

“응. 그렇지? 근데 니아, 찻잔은 두 손으로 들면 안 돼. 이렇게.”

“녜에! 고맙슴미다!”
샤를의 교정에 이반느도 한몫 거들었다.

“니아. 포크는 주먹으로 쥐는고 안니야. 요러케.”

“우웅!!”
다정한 친구들의 가르침에 니아는 두 눈을 크게 부릅뜨며 열심히 배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사 에밀리가 오랜만에 입꼬리를 훈훈하게 올렸다.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사건 사고의 온상이 언제 이렇게 서로를 아끼며 잘 지내는지.
이젠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에밀리였다.

“군데 구롬, 니아 엄마는 이거보다 더 맛있는 거 먹눈 거녜? 부럽다!”
이반느의 말에 샤를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생각보다 맛있는 거 없어. 우린 특히 관리해야 하니까.”
어제 자신의 방에 들른 식단 관리자, 시녀장의 엄격한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 그래서 그고 안 먹눈거야? 내가 먹눈다?”
친구의 어두운 얼굴보다, 손도 대지 않은 호박파이가 눈길이 간 이반느가 말했다.
그 모습에 샤를의 얼굴이 짜게 식었지만, 어차피 먹을 수 없는 건 똑같았기에 근근이 참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걸로 끝나면 이반느가 아니다.

“울 엄마랑 체질이 같나 보녜. 엄마두 간식 먹으면 살찌고든. 그럴 때마다 꿀꿀 하면 엄마가 엄청 화낸다?”

“안대여, 이반느 안대.”
니아는 이반느의 말에 지난번에 본 줄리의 무서운 모습을 떠올리며, 먹다 말고 작은 손을 저어 만류했다.
오늘도 발랄한 딸 덕분에 귀가 가려운 줄리아나.
그때, 갑자기 누군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항! 꿀꿀이래, 꿀꿀.”
대화를 듣던 로이가 웃음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샤를이 결국 울컥했다.
어제 시녀장이 금지한 것은 간식.
요즘 부쩍 유치원의 식사로 살이 쪄 오늘의 먹음직스러운 호박파이를 손도 대지 못한 것이다.

“로이! 그 입 다물어?”

“하하……. 우웅.”

“전하, 약한 애 괴롭히는 거 안니야.”
이반느가 거들먹거리자,

“저게! 평소에 괴롭히던 게 누군데. 아무튼 황족은 몸이 약해서 그런 거야! 그런 문제가 절대 아니라고!”

“모야, 화내니까 더 꿀꿀 같녜. 꿀꿀 전하 꿀꿀!”
이반느의 놀림에 입을 막고 웃는 로이.
그 모습에 더욱 열이 받은 샤를이 이반느를 쫓기 시작했다.

“야, 너! 거기 안 서!!!”
하지만 잽싸게도 도망가는 이반느.
아까까지 식사 예절을 가르치던 아이들이 매섭게 돌아다니자, 그것을 지켜보던 에밀리는 오늘도 눈물을 삼켰다.
*
화려하고도 당황스러운 연회장의 무대가 끝나, 얼떨결에 자리에 앉게 된 반 대표 고위 귀부인들은 이내 몰래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쩜 이리 천박한 연회장을 꾸미실 수 있죠?”

“그러니까요. 그 출신 근본이 어디 가겠어요?”

“맞아요. 도박 때문에 아직도 이 별궁에서 나오지도 못하시는 분이 어떻게!”
그렇다.
장장 10년째 무성한 소문만 떠도는 루시아보단 덜했지만, 이쪽 황비도 도박 중독으로 갖은 소문과 함께 3년째 이 별궁 밖에서 그녀를 본 사람이 없다.
루시아는 그녀들에 의해 한때 황제에게 지겹게 들은 로비나 황비에 대해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카이우스 황제가 로비나 황비를 처음 만난 건,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주점에 암행을 나갔을 때였다고 한다.
그 화려한 주점의 무대, 단 하나의 꽃인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황제. 아니, 그땐 왕국 시절의 왕자였던 그.
불같은 사랑에 어린 그녀와 애까지 만들어 결혼 약속을 해버린 그는, 당연하게도 평민을 거부하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당시 그런 그가 머리를 쓴 것이 제국 건국이었다.
그 원대한 포부에 귀족들의 눈을 돌리고 끝까지 황후 자리를 비우며, 황비로 만들어버린 그의 장기 계획.
이것은, 정말 하찮은 그가 가끔 작정하고 바보짓을 벌리면 얼마나 대책 없는 짓을 벌이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너무 아낀 탓일까?
황비가 되었지만, 넘치는 사랑에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에 사고란 사고를 다 치고, 제국의 안 주인으로의 권한도 없는 그녀를 귀부인들이 무시하는 것은 정해진 처사였다.
지금 신진 세력들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루, 루시아 부인. 여기가 정말 회합의 자리인가요? 보통 이렇게 하나요?”

“황족들은 원래 이런 문화를 즐기나 봐요. 저는 이런 곳에 초대되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스럽지만……. 호호…….”
안타깝게도 신진 세력의 주축인 메라와 세르딘마저 다가오는 분위기에 위축되어 본능적으로 루시아에게 가까이 붙었다.
기댈 곳이 무덤덤한 그녀뿐인 듯했다.
그때, 여전히 무대 위에 있던 황비가 샴페인 잔을 울렸다. 그 청량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부인들, 우리 샤를 황녀가 유치원에 다니고서 많이 밝아졌다는 걸 아시나요? 소풍 장소를 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우선 감사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 있답니다. 어서들 가져오게.”
예쁘게 패인 일자 보조개, 매끈하고 고급스러운 버선코,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애교 있는 금안의 눈웃음까지.
황태자가 꼭 닮은 외모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38세의 그녀가 지금도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믿지 않을까?
그러나 역시, 신은 공평한 법이다.
로비나 황비는 루시아 못지않게 이 불편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 자리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탕!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나뒹구는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화, 황비 전하! 이것이 농이라면 지나치십니다!!”

“세상에! 이런 남사스러운……!”

“어머머!! 이, 이게 무슨……!”
얼굴이 잔뜩 붉혀진 그녀들은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본 듯, 황비가 준 선물에 호들갑스럽게 물러났다.

‘대체 뭐가 들었길래……? 응? 이게 뭐지?’
루시아가 선물을 풀자, 그곳엔.
슈미즈라 부르기에는,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붉은 천에 끈과 문양, 레이스가 달려 뭔지 모를 것이 하얀 장미꽃이 가득한 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게 도대체 뭔지 알 길이 없었던 루시아가 그것들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확인하니,

“맙소사! 부인!”

“어, 어머어!!! 어째, 어서 내려놓으세요!”

“…….”
자세히 확인도 하기 전에 메라와 세르딘이 급히 달려들어 상자가 닫히고 말았다.

“호호호, 다들 아직 소녀군요? 그것은 이국에서 최신 유행하는 슈미즈랍니다! 꽤 매혹적이죠? 아이들이 적당히 컸으니, 이제 우리의 밤도 소중하지 않겠어요?”
……황족의 선물이, 야한 속옷이라고?
거기다 아이들의 소풍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회합에서?
황비의 애교 어린 눈짓에 기가 막힌 귀부인들의 탄성이 하나둘, 연회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