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소풍 장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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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소풍 장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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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소풍 장소는?
2022.12.29.
로비나 황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쩜, 우리 아이들을 위해 모인 회합에서 이런 몰상식한 선물을 주다니!”
“맞아요. 황녀 전하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으신가? 당장 집안 어른들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저도 이건 가만히 있을 수 없겠네요!”
화려한 연회장을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던 고위 귀족가의 며느리로 추정되는 부인들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역시 연회장 황비 궁의 시녀들이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하아, 황비 전하께서 이런 걸 주실 줄이야. 이걸 어떻게 들고 가죠?”
“맞아요. 시종들에게 들켜도 황비님의 선물이라고 하기엔…….”
“그러게요. 황실의 선물이니, 안 가져갈 수도 없고…….”
메라와 세르딘, 바샤브 부인은 다른 귀부인들보다야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좋진 않았다.
많은 불평이 나오자, 듣고 있던 루시아는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저 열린 문밖에 삐져나온 화려한 푸른 드레스.
루시아와 함께 앉은 테이블의 귀부인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바로 연회장 입구가 보이는 대부분의 고위 귀부인들이 대놓고 언성을 높이는 이유였다.
알만은 했다.
무려 도박으로 별궁에 갇혀, 아무런 힘도 못 쓰는 황비.
그런 그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차라리 대놓고 욕을 들을지언정, 뒤에서 칼을 갈 일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이내, 그 황비의 푸른 천이 재빨리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갑자기 웃어 대는 귀부인들의 모습에 나머지 반대표 부인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루시아는 이 상황을 보며, 조금 있으면 붉게 물든 눈가로 나타날 황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한 명쯤은 그 꼴을 안 봐도 되겠지.’
어차피 분위기는 개판에 소풍이고 뭐고 정하기는 글러 먹었다고 판단한 루시아는, 눈치채지 못하게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정문으로 나가지도 못할 텐데, 그럴 바에 중간에 도망치려 한 것이다.
“그럼 전 잠시, 바람을 쐬러 다녀오겠습니다.”
루시아는 메라와 세르딘에게 조용히 속삭이고는, 연회장에서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베란다로 나왔다.
그리고 몸을 던져, 멋지게 착지.
이제야 갑갑한 향기가 나는 공기에서 정겨운 시골 냄새에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시골 냄새?’
그녀가 생경한 냄새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에,
-꿀꿀!
-꽤엑~! 꽥꽥꽥!
-음머어~!
갑자기 나타난 루시아로 인해 놀라 소리 지르는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경계음처럼 울렸다.
돼지, 오리……, 소?
그녀가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니, 잘 다듬어진 수풀 벽에 일부러 가려 놓은 듯한 작은 축사가 보였다.
‘황비의 궁에 대체 왜 이런…….’
그때였다.
-샤삭.
멍한 얼굴로 가축들을 바라보던 루시아의 치맛단에 무게감이 느껴져 바라보니,
“흐, 흐으으윽. 단자아앙.”
“…….”
눈물로 얼룩진 로비나 황비가 수풀 벽에서 기어 나온 채로 치맛단을 잡은 모습이었다.
‘망했군.’
.
.
.
-꽤엑~! 꽥꽥꽥!
-꿀꿀.
“이상하죠? 여기가 유일하게 내가 있을 곳인 것만 같아요.”
로비나 황비의 손에 이끌려, 뜬금없이 가축들이 울어대는 사육장 앞에 앉게 된 루시아.
그런 당황한 루시아 앞에 황비는, 청순하고 가녀린 팔로 지친 듯 눈물을 닦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난, 평범한 농가의 딸이었어요. 도시로 가고 싶어서 주점에 일자리를 구했고 운 좋게도 그곳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죠.”
그녀의 아련한 눈빛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해 보였다.
“난 지쳤어요. 그저 남편 하나 보고 시집온 것뿐이고, 원하거나 가고 싶은 자리에는 다 참석했어요. 그래요, 사실 즐겁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다시 감정에 복받친 듯 울기 시작하는 로비나.
“윽.”
그녀가 갑자기 안겨, 루시아의 가슴팍에 통증이 느껴졌다.
“흐윽!! 근데 이제 재밌게만 지내면 안 된대.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다들 나에게만 뭐라고 해……!”
“…….”
무려 경지에 오른 검사의 가슴을 기습한 예상 못 할 황비.
지금 이 순간, 계곡물보다 차가운 루시아는 그녀가 어떤 상태든 모르겠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렇지. 단장, 단장이라면 이해해주겠죠? 단장이 검술을 좋아하듯이, 나는 화려한 파티를 좋아할 뿐이에요!”
……그게 이렇게 된다고?
루시아는 적정한 시기를 기다리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녀는 자기 속을 알아주는 사람이 그동안 없었던지 한 번 터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맞장구를 쳐줄 사람을 잘못 고른 로비나 황비.
아무 반응 없자 결국,
“단장마저 날 바보 취급하는 건가요? 어째서! 어째서 몰라주죠!? 그 최신 슈미즈는 남편이 정말 좋아했던……!”
“……거기까지. 주군의 취향까진 알고 싶진 않습니다.”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던 루시아는 강력한 의지의 얼굴을 굳히고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췄다.
그 단호함에 그제야 황비는 조용히 웅얼거렸다.
“귀찮게 굴어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샤를만큼은 제대로 키우고 싶어요. 아이렌 황태자처럼 어리석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자신 없는 말투에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아마도 부모가 서툰 황비에게서 자신이 느꼈던 아이를 키우는 것에 막막함에 대한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루시아는 버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애써 각색했다.
“……황비 전하, 저는 지금 군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아시겠지요? 그러니 저들처럼 비슷하게 입고 비슷하게 행동하면 결국,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길이 될 겁니다.”
로비나 황비가 애초에 루시아를 부를 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단장이라 불렀다면 이미 들켰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비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루시아의 처지를 이해한 거라…….
“응? 나도 드레스잖아요?”
“…….”
그녀의 뒤로 행복한 꽃밭이 펼쳐진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순수한 눈망울을 깜빡이는 황비였다.
‘……우연이었네.’
루시아는 남을 설득하는 것에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버논의 말조차 통하지 않는 것을 보며 그냥 대놓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방금 주신 선물을 아이들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해보세요.”
‘솔직히 아직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다들 놀랐으니 대충 알아듣겠지.’
이렇게 말했는데도 모르면 그냥 포기다.
“어머! 그걸 애들한테? 글쎄요, 실뜨기라도 하려나? 단장도 참 짓궂은 질문……. 아? 그렇군요! 이건 학부모들의 모임이군요! 어쩌죠? 그런 야한 슈미즈를 줬으니!”
다행히 로비나 황비가 알아들었던지,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모양새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단장!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샤를이 오늘 일로 또 날 미워하면 그땐……. 흐윽…….”
로비나 황비는 다시 복받쳐 울기 시작했다.
한때 나쁜 엄마였어도 지금은 뉘우치려고 하는 데다, 이제라도 딸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황비는 상담자를 잘못 골랐다.
지금 루시아의 머릿속에 명답은, 그냥 같이 가만히나 있으시죠. 인 것이다.
“그냥 같이 가만히나…….”
“황궁 개방이에요. 어머니.”
루시아가 의식 없이 매정한 말을 내뱉으려 할 때, 갑자기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어머니라 부를 이는 단 한 명, 아이렌 황태자밖에 없었기에 루시아는 그 정체에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황궁 개방이라니요? 황태자, 지금 무슨 소리를……?”
“네, 어머니. 지금은 아이들의 첫 소풍에 대한 회합이지 않나요?”
“아, 그렇다면 설마……”
“맞아요. 아이들에게 황궁의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안내하는 것에 두 손 들고 환영하지 않을 부모는 없겠죠?”
어린아이에게 설명해주듯, 아이렌 황태자는 밝게 웃으며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그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는 루시아.
그녀는 모자 관계인데도 나이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불멸의 외모가 신기한 듯, 두 절세 미모의 분홍 머리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설명이 끝나자, 그제야 황비의 얼굴에 갑자기 혈색이 돌았다.
그러고는 눈을 반짝이며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듯, 아들을 솜방망이로 토닥거렸다.
“황태자도 참!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왜 알려주지 않았나요!”
말씀드렸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어머니. 라는 글귀가 적힌 지친 얼굴이 언뜻 스친 건 착각일까?
“그럼, 그럼 어서 같이 들어가요. 루시아 단장! 아니, 루시아 부인이죠? 우린 같은 학부모니까!”
‘아, 그런 의미로 부인이라 불렀던 건가.’
아무튼, 운이 좋은 그녀였다.
황비가 꽃 같은 웃음으로 루시아의 손을 잡아당기자, 아이렌은 그런 둘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다시 화려한 연회장.
뛰어내린 게 무색하게도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온 부메랑, 루시아의 눈에 벌써 갈 채비를 하는 부인들이 보였다.
황비는 그런 그녀들을 보며 급하게 말했다.
“잠깐, 우선 앉아보세요. 선물은 사과하겠어요. 하지만 그 슈미즈만큼은 효과가 굉장……!”
“로비나 황비 전하. 하실 말씀을 하시죠.”
조금만 틈을 보이면 딴 길로 새려 하는 못 말릴 황비를 잡아든 루시아였다.
“아아, 그렇지! 고마워요. 루시아 부인? 그럼 소풍 장소를 건의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디 이번엔 뭘 말하나 보자. 같은 신뢰 없는 얼굴로 로비나 황비를 볼뿐이었다.
하지만,
“그 장소는 바로, 황궁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 그녀들의 무심한 얼굴에 하나둘 불이 켜졌다.
신진 귀족인 귀부인들은 그 의견에 굉장히 들뜬 모양새로 손뼉까지 칠 정도였다.
그중, 메라가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든 후 물었다.
“황비 전하! 저는 메라 리테린 남작 부인입니다. 외람되지만, 그 말씀은 황족 외에 들어갈 수 없는 소문의 정원도 우리 애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학부모들의 눈이 커졌다.
귀족들에게는 왕국 시절부터 황족들만 사용했던 비밀의 화원으로 소문나 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질문 잘해주셨어요. 그럼요! 그것뿐 아니라, 황궁 곳곳에 있는 기관을 소개받을 수 있게 준비시켜 놓겠어요! 그리고 또, 의견 주시겠어요?”
이제야 제대로 된 소통하게 된 황비의 얼굴은, 슬픈 기색 하나 없이 아이처럼 순수하고 해맑았다.
그녀의 품위 없는 웃음에 고위급 귀부인들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렸지만, 하나둘 얼굴에 드러난 궁금함을 숨기지 못했다.
“세르딘 남작 부인입니다. 그럼 요즘 아이들에게 유행하는 연극배우를 초청하는 건 어떨까요?”
“유행하는 연극……?”
황비가 뭔지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세르딘 부인의 말에 메라 부인이 공감하는 눈초리로 말했다.
“어머! 남작 부인. 부인네 자제도 좋아하나 봐요? 우리 집 애들도 난리인데. 입장권 구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맞아요. 역시……. 무리겠죠?”
그녀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황비.
그러다 기세등등한 얼굴로 자신이 꾸민 화려한 무대를 가리키며,
“세르딘 남작 부인. 요즘 활동을 쉬었어도, 그쪽 세계라면 제게 불가능은 없답니다.”
지금은 조용히 생활하지만, 자기는 한때 누구도 넘보지 못할 무대의 꽃이었다는 것이다.
연극과 황궁 내부 건물, 그리고 각 부서의 안내까지, 이어지는 끊임없는 의견은 이전보다 훨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한 고위 귀부인이 비뚤어진 입술을 떼었다.
“테린 후작가의 에일린입니다. 황비 전하. 연극 무대는 그렇다 치고, 나머지는 황궁에서 일하는 모든 분께 폐를 끼치게 될 일인데 걱정입니다. 이 별궁 밖으로는 나가실 수도 없으실 텐데 말이죠.”
그녀의 말은, 도박으로 자숙 중인 주제에 그럴 권한이 있냐는 것이다.
황비를 향한 명백한 도발과 사실에, 이제껏 많은 대화로 설렌 귀부인들이 눈치껏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