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두 번째로 잘 보여야 하는 사람
(55/90)
55화. 두 번째로 잘 보여야 하는 사람
(55/90)
55화. 두 번째로 잘 보여야 하는 사람
2023.02.09.
루시아는 오늘도 하원 시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황녀가 유치원에 오고부터 호위 기사를 마주치는 건 아무래도 피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여전히 단상 아래 숨어 있는 에밀리의 머리끝을 보았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얼굴을 직접 보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가.’
황궁의 정원에서는 먹는 걸 챙겨줄 정도로 그렇게 살갑게 굴더니 갑자기 또 돌변한 그녀였다.
“엄마아!”
교실에서 엄마를 기다렸던 아이는 루시아를 보더니, 두 볼 가득 해맑은 미소를 품고 몸을 맡겼다.
그녀는 그런 아이를 이제 제법 익숙하게 안아 들었다.
“니아, 오늘도 재미있었니?”
“웅! 재미쎠!”
“그래, 그럼 이제 집에 갈까?”
“녜에-!”
그렇게 활기찬 아이의 대답과 함께 발걸음을 돌릴 참,
“……흑의 기사아……?”
교실 문 뒤에서 빼꼼히 반짝이는 눈을 내민 포실한 금발의 아이.
루시아가 그 아이를 쳐다보니, 니아가 친구를 소개했다.
“……로이! 엄마, 조기 로이예여!”
그러자 로이라는 남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퍼뜩 칼같이 경례했다.
항상 니아가 마지막이었는데 오늘 더 늦게 남은 아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눈 위트니 남작 가문의 로이임미다! 로이눈 나중에 흑의 기사가 되꺼야!”
“……?”
연극을 보고 난 후 흑의 기사에게 완전히 매료된 로이.
니아가 흑의 기사를 보고 엄마라 불렀을 때는 황녀의 분노로 인해 흐지부지되었지만, 팬이 된 로이만은 날리는 꽃잎보다 루시아를 보고 있던 것이다.
“징쨔 머싯댜! 구때처럼 휙휙 휘둘러여? 칼? 칼은 어딧셔? 빨갛게 빛나눈 고 할 수이쎠?!”
인사 한 번에 마치 절친이 된 것처럼, 로이는 정신없이 루시아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이반느와는 다른 적극성에 난감해진 루시아.
“로이, 지금 뭐하니? 어머, 루시아 부인?”
“아, 위트니 남작 부인. 오랜만이군요.”
살았다.
아이의 어머니가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참새 반 대표일 로이의 엄마, 수샤 위트니.
그녀는 로이와 마찬가지로 동글한 얼굴에 포슬거리는 숱 많은 금발인, 제법 부드러운 인상의 여인이었다.
“어머! 반가워요. 수샤라 편히 불러주세요. 니아도 반가워!”
“녜에……! 반갑숨미다!”
니아가 수줍게 인사하자, 수샤 부인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귀엽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흥분해 있던 로이가 발을 동동 굴리며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 보셰여! 흑의 기사에여!”
“어머, 얘 좀 봐. 또 그러는구나? 검은 머리 색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은 아니란다. 로이. 부인께 예의 있게 굴어야지? 어서 사과드리렴.”
“우웅……. 죄송함미다. 루시아 부인. ……근데 진쨘데……. 맞눈데…….”
그러자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로이는 짧은 다리를 미적거리며 잔뜩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휴, 우리 아기. 언제 다 자라려나. 저는 오늘 아이를 데리고 외식을 하기로 해서 오랜만에 나왔답니다.”
그녀는 말을 끝내고 답을 기다리듯 루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원 길은 집사나 유모가 대신 마중 오는 게 일반적이라 어째서 직접 왔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저는 일터가 궁이니, 매일 함께 다닙니다.”
“와, 좋겠네. 니아는 엄마가 매일 데리러 오고!”
수샤 부인의 말에 엄마 손을 꼭 쥔, 니아가 수줍게 웃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얼굴을 굳히며, 루시아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부인! 저기, 잠깐 이쪽으로.”
“네?”
수샤는 누가 들을까, 속삭이기 시작했다.
“글쎄, 사교계에 이름 날리던 듀크윌 남작이 거의 사망 직전까지 갔는데, 그 남작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군지 아세요?”
“……아니요.”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녀는 마치 옆 동네 연쇄 살인마에 대해 말하듯, 표정에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무려 흑의 기사단이래요! 입에 담기도 무섭게 피가 튀기고 이빨도 막 튀겼다고 들었어요! 듣던 대로 정말 잔인한 성향의 사람들이에요.”
“…….”
역시 그랬나.
잘 도망친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조만간 또 징계 회의가 열리겠지.
‘……또 출장인가.’
앞일이 걱정인 그녀의 속을 모르는 수샤 부인은,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건지 또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인! 더 놀랄 일은, 그 남작이 사실 애가 있는 걸 숨기고 중매에 나갔는데, 그 자리에 그 애를 데리고 나타난 사람이 흑의 기사단이었대요! 그러니까 이제 아시겠죠?”
“예? 무슨…….”
“그러니까 사실은 그 파렴치한 인간을 두들겨 패준 거라고요! 다들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조사하는데 다들 하나같이 범인에 대해 입을 닫았대요! 어휴! 몹쓸 사람.”
루시아는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예? 다시 한번, 입을 닫았다고요?”
그녀는 지금 자기 귀를 의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분명 들었다.
어디 만만한 동화의 교훈처럼, 모두가 기피하는 대상이라도 옳은 일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잊지 않고 알아주는 것일까.
아직까진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녀에게 이것은 어쩌면 꽤 큰 희망일지도 몰랐다.
“어머, 죄송해요. 초면에 너무 험한 말을 한 것 같네요.”
그녀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며, 작은 소리로 수줍게 중얼거렸다.
“아뇨, 아닙니다. 그런데 수샤 부인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아셨습니까?”
들 수 있는 의문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아는 게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 그게…….”
“?”
“이건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사실 그 중매 자리에 나간 영애가 에밀리 선생님이었다고 하더군요. 마침 제 사촌이 로비에 있어 몰래 들은 사실이랍니다. 같은 해 졸업생이거든요. 아카데미요.”
“아하…….”
동창이라는 말에 루시아는 혹시라도 들킬 수 있던 상황에 군복을 입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자신을 제대로 기억하는 또 다른 동창생은 아직도 단상 아래에 숨을 죽이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럼 살펴 가세요. 그리고 조만간 다과모임 초대장 보낼 테니, 꼭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루시아는 그녀의 밝은 얼굴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경례를 하는 로이.
그 해맑은 모습은 누가 봐도 모자로 보일 만큼, 순수한 애정과 사랑이 넘치는 이들이었다.
.
.
.
마차를 탄 루시아는 아이와 함께 도착한 숙소 앞에 내렸다.
하지만 문을 열기 전, 발걸음을 멈춘 루시아.
‘이상하군. 오늘은 도와주는 이가 오지 않는 날인데…….’
동으로 만들어진 문고리가 오늘 아침보다 아주 미세하게 돌아가 있는 모습.
그리고 루시아는 이내, 니아의 앞에서 팔을 벌렸다.
“니아, 눈을 감아. 그리고 꽉 안아야 한다.”
문고리를 확인하는 것은 습격에 예민한 그녀의 오래된 버릇이고, 또 아이를 안아 드는 건 그녀의 새로 생긴 버릇이다.
다시는 아이를 놓치는 사건 따위 일으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니아는 엄마의 심각한 얼굴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겼다.
짧은 팔로 힘껏 안았지만, 아이의 힘이라 그런지 그녀가 제대로 움직이면 금방 떨어질 것 같았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드레스 안의 짧은 단검에 두터운 검기를 불어넣은 루시아.
잘못 휘두르면 작은 숙소가 엉망이 될 테지만, 지금 그걸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챙!
그렇게 문을 열자마자, 복면으로 부딪혀 오는 검을 막아낸 루시아.
일부러 상대의 무기부터 없앨 생각으로 다시 부딪혀 오는 검날을 격파하기 위해 찔러 넣었다.
-퍽, 쨍강!
역시 예상대로 검기에 두텁게 싸인 단검의 강한 힘에, 상대의 장검은 금세 부러져 벽에 박혔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복면의 늑골 밑, 심장을 향해 단번에 검을 찔러 넣는 것.
가장 빨리 숨을 끊을 방법이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금세 사나운 검기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대부님, 뭐 하시는 겁니까.”
“파하하하! 정말, 우리 딸은 걱정할 틈이 없군! 근데 어떻게 그렇게 검기가 두껍게 나오는 것이냐? 아주 용암이야! 용암! 어디 한번 다시 보자. 응?”
루시아의 대부, 헬버트였다.
그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복면을 벗고, 마치 백 점 맞은 시험지를 확인하듯 철딱서니 없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중년의 사내를 실눈으로 조심히 바라보는 아이.
니아는 엄마와 그 사내의 대화를 유심히 들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
.
.
“…….”
“…….”
루시아가 차를 내오는 사이, 덩치가 족히 10배 차이 나는 둘은 침묵에 휩싸였다.
특히 헬버트가 아까와는 달리 매우 불편한 눈치였는데, 그것은 아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아예여……!”
아이가 먼저 대뜸 침묵을 깨자, 어색한 헬버트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그래……. 네가, 우리 애 딸이더냐?”
고작 하는 말이 우리 애 딸이냐니.
니아는 퍼뜩 헬버트를 바라보며, 큰 눈망울로 깜빡거렸다.
‘우리 애!’
설마 했던 호기심이 맞았다.
엄마의 아빠.
그렇다면 가장 소중한 엄마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니아에게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잘 보여야 하는 사람.
“……녜에……! 녜! 니아예여! 니아눈 칫솔질도 잘하고, 숙제도 잘해여! 밥도 마니 머거! 그리구, 청소도 잘해여!”
“……어어. 거. 자, 잘 됐구나.”
“네에, 니아눈 온제나 열씨미해여!”
헬버트는 이 반짝이는 눈을 한 병아리가 조잘대자, 다시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애초에 살가운 인간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루시아를 만나기 전, 그에게 아이라는 존재는 힘주면 부서지는 유리같이 보호만 해야 하는 아주 나약한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 예외는, 말도 안 되는 신체적 재능을 가진 루시아뿐.
“니아눈 열시미 하눈데……. 인제, 모라구……. 불러여?”
“……?”
“모라구…… 해야 대여? 그고…….”
아이는 무슨 일인지, 두 볼을 복숭아처럼 수줍게 물들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얼마 전 이반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나두, 하부지 이쎠……!’
물론 이반느의 할아버지는 정말 무서웠지만, 이반느의 평범함을 동경하는 아이는 자신만의 할아버지가 생긴 것에 설레는 것이었다.
“그고…….”
“루시아, 요 아이가 뭐라고 하는 것이냐?”
“예? 무슨 말이요?”
마침, 루시아가 차를 들고 나왔다.
단 한 번도 차를 내온 적이 없던 그녀는, 꽤 심기일전한 얼굴로 집중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던 헬버트는 마음이 울컥거렸다.
“……네가, 진짜 네가 한 게냐?”
“예. 드셔 보세요.”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차나, 음식을 내온 적 없던 무뚝뚝한 아이.
그런 아이가 챙길 사람이 생겨 그런지, 생전 처음 보는 살가운 모습에 코가 시큰거렸다.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이 귀중한 차에 입을 가져다 댄 헬버트.
-푸후후훕!!!!
“쿨럭! 쿨럭! 루시아! 날 죽일 셈이냐! 이, 이게 무슨……!”
“…….”
루시아의 실망한 얼굴.
“……맛있는 맛이냐! 너무 맛있어서 죽을 것 같구나!”
“됐습니다.”
마치 풀 무침처럼 이글거리는 찻잎들이 춤추는 잔.
그런 루시아를 달래려 다시 마셔 보려 하지만, 이 정도면 차라리 말린 잎을 과자처럼 씹어 대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대체 저 성녀는 뭘 먹고 자라는 거지?’
아무리 엄청난 회복력을 가진 성녀라지만, 이따위 것을 먹고 자란다고?
그제야 성녀라는 사실보다, 아이를 보는 눈빛이 된 헬버트의 얼굴에 연민이 어렸다.
죽을 만큼 쓴 차를 마신 헬버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니아는 쪼르륵 달려가, 소풍에서 남긴 과자를 몇 개 집어왔다.
“……이고……. 니아 아끼눈 고……. 마싯셔……!”
아이가 수줍게 조막만 한두 손으로 내민 쿠키.
“고, 고맙구나.”
‘다행히 간식은 사 먹이나 보군.’
그것을 어색하게 받아 든 헬버트는 기대 어린 두 눈을 피하며 입으로 가져갔다.
-우적우적.
아이 덕분에 이제야 입에서 쓴맛이 한결 가시는 헬버트였다.
그 모습을 보던 니아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점수를 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작은 담요, 아껴놨던 사탕.
니아는 어떤 기대를 하는 것인지, 자꾸만 헬버트에게 뭔가를 주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의 행동에 더욱더 어색해지는 헬버트.
“그, 그래. 고맙구나. 이제 괜찮다.”
“구롬 인제 니아, 불러도 대여……?”
왠지 모를 아이의 수줍은 행동과 말에 루시아와 헬버트가 집중했다.
“뭐를 말이냐?”
“……?”
그러자, 잡은 손을 꼼지락대던 니아.
“……하, 하부지여…….”
아이의 말에 굳은 헬버트와 루시아.
“……내가? 할아버지?”
“그렇군요. 할아버지시네요.”
루시아의 말에 멍하니, 자신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아이는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금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루시아는 딸, 그럼 딸의 딸은, 손녀.
근데 손녀가 성녀고, 성녀가 손녀.
이 말 고리에 묶인 그는 혼란에 빠졌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말이 없으면 없을수록, 아이의 눈치 보는 얼굴.
마냥 밝은 아이들이 낼 수 없는 그런 어두운 눈빛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역시 그냥 데리고 올 리가 없어.’
헬버트는 저 사연 많은 눈빛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닮은 것은 머리카락 하나뿐이라 생각했지만, 굳어가는 얼굴 속에 루시아의 처음 봤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파하하하! 그래, 세상일은 알다 가도 모르는 것이군. 요 꼬맹이. 그 몹쓸 늙은이들 몰래 함께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의 갑작스러운 커다란 웃음에 니아는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더 크게 웃는 헬버트.
그의 나이 65세, 어쩌면 적기에 얻은 귀중한 손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