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복직, 그리고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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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복직, 그리고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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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복직, 그리고 도발
2022.05.12.
첫 출근길. 몇 년을 통근하던 이 길이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출근……. 되게 오랜만이네.’
내게 반길만한 소식이 있다고 말하던 국장님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KBC 방송국 정문을 지나쳐 곧장 국장실로 향했다.

“국장님. 복직 인사드립니다.”
이제 막 출근했는지 자리를 정돈하고 있는 그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국장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보고는 중앙 테이블로 걸어왔다.

“왔어? 앉아 봐.”

“제가 반길 만한 소식이 뭘까요?”
국장님은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내게 결재 파일 하나를 들이밀었다.
뭐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내게 국장님이 열어보라고 손짓했다.

‘앵커직 오디션?’

“알다시피 앵커직은 심사를 통해서 발탁되잖아. 본래 윤 아나도 그 케이스였고.”

“그렇죠.”
원래 메인 앵커 자리는 사전 면접과 테스트를 거쳐 뽑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회귀 전, 최연소 나이로 뉴스9의 메인 앵커로 선발된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채서린이 바로 앵커를 맡는 것이 아니었나……?’
그에게 수긍하며 다시금 앵커직 사내 오디션 공고문을 내려다봤다.
따로 심사를 본다는 말은 없었는데.

“원래는 비공식적인 면접이 있을 예정이었는데 말이야. 전처럼 공개 오디션을 통해 뽑는 거로 바뀌었어.”

“으음.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형평성에 맞겠어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윤 아나운서를 그 오디션에 추천했어.”
집어 든 파일을 도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저는 자격 요건이 안 되지 않나요?”

“이번 오디션엔 자격 요건이 없어. 게다가 윤 아나운서는 오늘부로 라디오 뉴스에 복직할 거니까.”
내가 내려놓은 파일을 도로 집어가면서 천연한 웃음을 짓는 그가 보였다.
그 웃음이 ‘더 말하지 않아도 알지?’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오디션이라…….
나와 지한 사이에서 무수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이거였던 모양이었다.

“내 도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의 말처럼, 차고 넘치는 도움이었다.

“그럼요. 역시 국장님뿐이에요. 감사합니다.”
다 된 밥이라 생각하고 있을 서린이 지을 표정이 상상돼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
.
.
국장실에서 나와 국장님과 함께 아나운서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다가 불현듯 누가 앵커직 면접 형식을 바꾼 건지 궁금증이 일었다.

“국장님, 그런데 갑자기 왜 오디션으로 바뀐 거예요?”
느닷없이 던진 내 질문에 국장님이 멈춰 섰다.

“글쎄. 아무래도 앵커는 뉴스의 꽃이니까? 윤 아나운서 말대로 원성이 클 것 같기도 했지.”
국장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웃더니 다시 앞서 걸었다.
미묘하게 변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숨겨진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를 뒤쫓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윗선에서 결정을 번복할 정도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하여간, 예리하다니까.”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면 나한테까지 숨기는 걸까.
이쯤 하면 이야기할 법한데, 국장님은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앞서 걷을 뿐이었다.

“……말씀 안 해주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나중에 알게 될 테니. 다 왔네.”

‘알게 된다고?’
먼저 걷던 국장님이 편성국 아나운서실 문 앞에 멈추더니 내 쪽으로 돌아섰다.

“어쨌든 일 년 만에 돌아와서 감회가 남다르겠어. 축하해, 윤 아나운서.”

“국장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뭘.”
내게 싱긋이 웃어 보이더니, 국장님은 아나운서실 문고리를 돌렸다.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이 국장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물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자자, 집중.”
뒤이어 들어온 날 발견했는지 점차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부터 라디오 뉴스팀으로 복귀한 윤여진 아나운서야. 다들 알지?”
국장님의 말에 아나운서실의 얼어붙은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상황 파악을 끝낸 아나운서들에게서 차츰 축하 인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축하해요!”

“여진 선배, 오랜만이에요. 휴직하시고 일 년만인가?”

“환영해. 서린이는 어딨지? 채서린 캐스터가 윤 후배랑 친했잖아.”
내 쪽으로 다가온 9시 뉴스의 앵커, 영준 선배가 너스레를 떨며 웃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서린을 찾기 시작했다.
아나운서들이 함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찰나였다. 닫혔던 아나운서실 문이 열렸다.

“왜 다들 모여 있어요?”

“여기 왔네. 서린아, 저기 봐봐. 선배 돌아왔어.”
양손 무겁게 신문을 들고 돌아온 서린이 그녀를 향해 집중된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러다 서서히 서린의 시선이 내 쪽으로 닿았다.
- 툭.
그녀는 국장님 옆에 있는 날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신문을 떨어트렸다.

“오랜만이야, 서린아.”
떡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다물어질 줄 몰랐다.
경악으로 차오른 눈빛으로 끔뻑거리던 서린의 손가락 끝이 내 쪽으로 향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가냘픈 손가락과 단번에 굳은 얼굴. 예상했던 반응 그대로였다.
그 모습에 앞으로 일어날 즐거운 일들을 상상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곧 만날 거라 했잖아.”

* * *
스튜디오 앞에 놓인 모니터의 시계를 보니 슬슬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날씨입니다. 오늘 밤과 내일은 전국에 구름이 많겠습니다. ……]
라디오 스튜디오였다.
주말에 이따금 라디오 뉴스를 진행했던 시절 이후 이 스튜디오에 앉은 게 몇 년 만인 건지.

[뉴스 마치겠습니다. 윤여진이었습니다.]
기사 방송부터 날씨 예보까지 이어진 종합뉴스를 끝마치고 끼고 있던 헤드셋을 벗었다.
5년 만의 첫 복직 방송이었는데 실수 없이 끝마쳐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원고와 짐들을 챙겨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아나운서실로 돌아오자, 자리에서 쉬고 있던 선후배들에게 또다시 둘러싸였다.

“윤 후배, 근데 왜 라디오 방송이야?”
물음을 던진 건 함께 뉴스9를 진행하던 메인 앵커인 영준 선배였다.
선배의 옆자리에 마련된 내 책상에 앉자 그가 궁금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러게요. 여진 선배라면 TV 프로그램 진행도 맡을 수 있었을 텐데.”
라디오 뉴스는 5, 6개의 라디오 방송을 진행해야 하기에 제법 고된 일이긴 했다.
더군다나 목소리로만 기사를 전달해야 하기에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다.

‘하물며 뉴스 메인 앵커를 했던 사람이 다시 아나운서로 복직하는 일도 드무니까.’
그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기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것도 뉴스를 진행하는 거니까요. 라디오도 보람 있어요. 카메라만 없을 뿐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네가 아까워서 그렇지.”
선배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더 밝게 웃음 지었지만 묘하게 바뀐 주변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안쓰러운 입장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걱정 고마워요, 선배.”
계속 앉아 있다가는 폭풍같이 몰려올 질문이 예상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서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오전에 마주했던 얼굴과는 달리 여유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오후 근무표를 체크하기 위해 근무 배당표에 다가섰다.
복직한 첫날이기에 오후 뉴스 방송을 끝마치면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하고 병원에 가야겠다.’
점심에 있던 라디오 방송 직전에 김 박사님의 연락을 받았다.
부모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연락에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갈 계획이었다.

“언니.”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 앉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린이 보였다.
팔짱을 낀 채로 그녀가 다가와 내 앞자리에 앉았다.

“복직 축하해요? 난 언니가 이렇게 바로 복직할 줄 몰랐어요.”

“고마워.”
서린은 비웃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난 또 뉴스 앵커로 복직할 줄 알았는데, 라디오 팀일 줄은 몰랐잖아요. 말 좀 해주지.”

“…….”

“그래도 언니 뒷배경이 좋기는 하다. 경력단절 아나운서가 바로 복직이라니.”
사근사근한 말투로 친근한 호칭을 섞어가며 축하했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휴게실까지 따라 들어와 기껏 꺼낸 서린의 말이 우스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겨우 내게서 잡은 꼬투리가 고작 이거인가 싶어서.
그녀가 말하는 배경이라는 걸 쓸 거였으면 이렇게 어렵게 복직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뭐가 웃겨요……?”

“아니야. 서린아, 너 저녁 방송 준비 안 하니? 한참 원고 쓸 시간인 거 같은데.”
날 선 내 지적에 의기양양하게 웃음 짓고 있던 서린의 미간이 단숨에 좁혀졌다.
그때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부재중 통화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만.”
서무진 회장님의 전화였다.
이야기하다 말고 전화를 걸자 날 바라보던 서린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회장님에게 다시 건 전화는 몇 번의 신호음이 지나지 않고 바로 연결되었다.

“할아버님. 전화하셨어요?”

- 그래. 괜찮니? 네가 여러모로 마음고생이겠어. 걱정이 돼서 전화했다.
회장님은 내 할아버지와 막역한 사이였고, 나는 그를 어릴 적부터 친할아버지처럼 따르곤 했었다.
결혼식부터 내가 겪은 지난 일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통화에 일어서려던 서린이 멈칫하며 섰다.
‘할아버님’이라는 호칭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챈 듯 그녀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좋지 않으셔서요…….”

- 안 그래도 김 박사한테 들은 참이다. 지영이 내외가 큰일이구나. 괜찮아져야 할 텐데.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연락하고.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을 이어나가던 회장님이 넌지시 다른 화두를 꺼냈다.

- 참. 여진이, 너 복직했다면서.

“네. 복직했어요.”

- 그래……. 네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마음 쓸 일이 많을 텐데 너무 무리하진 말아라.
남편이었던 지한조차 진심 어린 걱정을 건넨 적 없었는데.
순간 울컥했으나 애써 덤덤하게 미소 지었다.

- 그리고 한 번 지한이와 같이 평창동 들러.

“네. 지한 씨와 시간 맞춰 갈게요. 할아버님.”
유독 지한이라는 말에 힘주어 말했다.
전화를 끊으며 그대로 멈춰서 있는 서린과 눈을 마주했다.

“말하다 말고 미안해. 시댁에서 전화가 와서.”

“…….”

“괜찮다 해도 손주 며느리가 너무 걱정되셨는지, 식사하러 오라네.”

‘서린이, 네가 오매불망, 그토록 들어오고 싶어 하는 그 집안 말이야.’
그 시댁이 지한의 집안인 호진 그룹임을 아는 서린의 입술이 서서히 내려갔다.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욕망이 그녀의 눈동자에 들끓는 것이 보였다.

‘좀 더 내 자리를 탐내. 그리고 지옥 속으로 들어와, 채서린.’

“뒷배라 그랬지? 그러게.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이참에 회장님께 부탁이라도 드려볼까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