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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누구야, 네 남편? (40/126)


40. 누구야, 네 남편?
2022.08.18.


지한은 예고했던 대로 직접 자선 사업 행사장을 찾았다.

사실 그도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 이름을 걸고 기획한 아파트 브랜드 론칭을 앞두고 파혼 추문이 터졌다.

자신의 스캔들 때문에 바닥을 친 아파트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그는 어쩔 수가 없었다.

행사장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바라보다가 지한과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자신 앞에서는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뒤에서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파혼하셨다면서?”


“내연 관계였다나 봐. 그래서 틀어진 거지, 뭐.”


‘가증스럽군.’

지한은 건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억지웃음을 유지하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빌어먹을 기자들은 자선 사업 행사장에서 제게 파혼에 관해서 물었다.

곤욕스러운 질문만 골라서 하는 기자들에게 깊은 환멸감이 들 정도였다.

지한은 자신을 뒤따라오는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이제 출발해도 되나?”

“네. 이제 오후 3시에 인텍 투자 건 관련해서 미팅 있으십니다.”

“……가도록 하지.”

건물에서 나오자 앞쪽에 세워진 검정 세단이 보였다.

차를 향해 다가가는 길에 쫙 깔린 기자 무리가 지한에게 다가왔다.

행사장에서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들고도 부족한지.

문이 열린 뒤 좌석을 향해 걸어가는 지한을 향해 한 기자가 다가왔다.


“파혼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하실 건 없나요? 아직 공식 입장문이 나오지 않았는데요.”

분명히 스캔들과 관련해서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비쳤는데 끈질겼다.

지한이 걸음을 멈춰 제게 질문을 한 기자를 향해 돌아섰다.


“곧 공식 입장 나갈 겁니다. 오해가 있었지만. 그 여성분은 더블유 가와는 절차대로 파혼하고 난 후에 만난 사람입니다.”

“기사가 오보라는 말씀인가요?”

미끼를 문 것처럼 주변에서 셔터음이 터졌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질문에 한순간 지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가 바쁘신 여러분들을 여기까지 오시라고 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

“파혼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었으면 기자 회견을 열었지 않겠습니까?”

지한은 달갑지 않은 주제에 관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의 주변을 에워싸던 기자들이 누르던 셔터 소리가 서서히 멈췄다.


“기자님들은 청소년 미혼모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지.”

“…….”

“저는 호진을 대표해 불우 가정, 그리고 미혼모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함께 방법을 찾겠다는 굳은 의지를 전하기 위해 이곳을 왔습니다.”

할 말을 잃은 기자들은 서로서로 바라보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지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가 들었다면 비웃었을 만큼 위선적인 말들을.


“그러니 제 파혼 기사 말고, 더 필요한 분들을 위해 기사 좀 써주세요. 여러분들이 궁금한 건 또 다른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지한이 차 안으로 올라탔다.

골치 아프게 달려들던 기자들, 행사장에서 저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들. 지한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과 같았다.


‘젠장.’

솔직히 기부금은 사람을 시켜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시간을 이렇게 낭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짜증 나게 만들었다.

여진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식의 곤욕은 치르지 않았을 텐데.

애초에 혼전에 잠깐 한눈판 것으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는 여진이 이해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느닷없이 전해온 서린의 임신 소식까지.

울컥하고 밀려오는 짜증에 지한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회사까지 얼마나 걸리지?”

“삼십 분 후에 도착합니다.”

지한이 그대로 눈을 감자, 차 안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김 실장과 운전기사가 이따금 백미러를 통해 지한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 * *

회의가 끝나자 점심시간이었다.

회의 뒷정리를 하는 내게 자리를 맡아놓겠다고 영준 선배가 먼저 내려갔는데.

음식을 받아 주변을 둘러보자 멀지 않은 곳에서 그가 손을 흔들었다.

선배를 발견해 반가운 마음도 잠시, 옆쪽에 앉아 있는 반갑지 않은 후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저 무리 옆이야?’

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배식을 받고 걸어오는 서린과 눈이 마주쳤다.

서린 역시 함께 점심을 먹는 동기들 옆에 앉아 있는 선배를 발견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서린아, 여기!”

서린이 그녀를 부르는 후배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돌아섰다.

날 힐끔 바라보고는 테이블로 향하는 서린을 뒤따라 걸었다.

결국, 커다랗게 뻗은 테이블에 함께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여기 테이블은 편성국 전용인가? 다 아나운서팀이네.”

“어쩌다 보니 그러네요. 감독님도 앉으세요.”

지나가던 뉴스팀 촬영 감독님과 스태프들까지 더해져 테이블은 금세 만석이 됐다.

영준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던 와중에 옆쪽에서 후배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서린이 오늘 어디 다녀왔어?”

“응. 오전에 병원 다녀왔어.”

“너 식은 언제 올려? 배 나오기 전에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들려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임산부였지, 채서린.’

“아무래도 그렇지? 안 그래도 날짜를 당기려고 생각 중이야.”

“결혼하면 퇴사하려고?”

“으음. 그건 아직 모르겠어. 임신 초기가 위험하다고 하니까, 고민 중이야.”

서린은 말끝을 흐리면서 내 쪽으로 시선을 흘깃했다.

고개를 돌린 채 식사에 집중하는데도 적나라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당한 서린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반찬을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그 부분은 차차 남편이랑 상의해보려고 해.”

“풋.”

나도 모르게 터져버린 웃음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네 남편 될 사람이 그렇게 세심한 남자가 아닌데. 서린은 내 비웃음의 의미를 알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네. 식사하세요.”

날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웃자 다들 날 향하던 시선을 돌렸다.

서린은 그런 내 반응이 불쾌했는지 찌푸린 미간을 풀 줄 몰랐다.


“그래도 서린이를 많이 존중하나 봐. 자상한 남편이라 좋다.”

“그러니까. 난 다정한 사람이 그렇게 좋더라.”

주변 동기들의 부러움 섞인 말들이 들려오자 서린의 표정이 조금 너그러워졌다.

어느 정도 식사를 끝마쳤기에 자리에서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어? 서린이 왔네.”

“응. 나 병원 다녀왔어.”

잠시 자리를 비웠었는지 돌아온 김 아나운서가 서린을 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김 아나운서는 서린에게 싱긋 웃고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쩐지 안 보이더라. 맞다. 서린이, 너 잊어버린 거 없어?”

그러다가 그녀는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서린을 불렀다.


“응? 내가? 뭘 잊어버렸는데?”

“잘 기억해봐. 너한테 진짜 중요한 건데?”

김 아나운서는 서린의 것이라 확신하는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서린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너 어제 화장실 세면대에 반지 두고 갔잖아.”

“……반지라니, 무슨 소리야?”

“헐. 너 잃어버린 줄도 몰랐어?!”

제법 큰 목소리에 내 주변에 앉아 식사하던 사람들까지도 고개를 틀었다.

김 아나운서가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서린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이거 봐. 네 것 맞잖아?”

김 아나운서는 어제 화장실에서 주운 반지를 꺼내 서린에게 보였다.

반지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그리고 반지를 보고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서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 뭐야.”

뒤늦게 숨기려는 듯 손을 빼는 서린의 손을 김 아나운서가 잡았다.

김 아나운서는 서린의 왼손 약지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반지 안 잃어버렸네?”

“……어, 어. 그게.”

붙잡힌 서린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서린의 것으로 생각한 김 아나운서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 반지가 세상에서 단 한 쌍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러고는 김 아나는 서린의 손에 끼워진 반지와 손에 들린 반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거는 뭐지? 네 것과 완전히 판박인데.”

“…….”

“심지어 네 것에 있는 각인도 똑같이 있단 말이야.”

각인까지 있다는 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했다.

큰 목소리를 가진 김 아나운서 덕분에 모두가 들었는지 주변 테이블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꽤 오랜 침묵 끝에 서린이 입술을 떨어트린 순간이었다.

서린의 말보다도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로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일어선 내게로 주변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내 거야.”

서린이 앉아 있는 의자 뒤편으로 다가갔다.

안타깝네. 그렇게 자랑하던 그 반지가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겠지.

당했다는 생각에 분한지 서린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네? 선배 거라니요?”

김 아나운서는 여전히 내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반문했다.

두 눈을 끔뻑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내 결혼반지라고.”

누군가 들고 있던 식기가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전 약혼자와의 결혼반지야.”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는 김 아나운서에게서 가져온 반지를 내 약지에 꼈다.

맞춘 것처럼 꼭 들어맞는 반지를 보고 여기저기서 헉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점심시간답게 만석으로 시끌벅적하던 식당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서린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녀는 내게만 들릴 수 있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그만해.”

“뭘?”

“그만하라고……. 윤여진.”

이 이상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악에 찬 눈빛으로 날 쏘아보는 서린에게 웃었다.


“내가 왜?”

“…….”

“난 지금이 제일 흥미로운데.”

“윤여진!”

날 부르는 서린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앙칼지게 노려보고 있는 서린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이상하다. 네가 낀 반지가 모조품 같지는 않은데.”

“……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이렇게 세밀한 다이아 세공까지 똑같이 따라 할 수가 없거든.”

서린은 붙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손목을 비틀었다.

그런 서린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붙잡은 손을 내렸다.


“어떤 대담한 사람이, 세상에 하나뿐인 결혼반지를 똑같이 만들어 낄 생각을 했을까?”

“…….”

“네 남편 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한데.”

서린은 양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인정이라도 하는 듯 그녀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해갔다.


“네 입으로 말해 봐. 누구야, 네 남편?”

주변에선 침을 꼴깍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모두가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듯. 서린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의 눈빛이 무서울 만큼 그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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