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누명 벗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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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8.
복도 끝에 있는 ‘징계위원회’이라 적힌 안내문이 붙여진 회의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윤여진입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이 놓인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미 착석해 있던 서린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린은 내가 앉는 순간까지 집요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봤다.
“다 온 거 같은데, 시작하도록 하죠.”
국장님은 자리에 앉은 나를 바라보고는 배부된 서류를 들춰보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를 중심으로 일렬로 앉아 있는 임원진들이 보였다.
“두 사람 다 최근에 터진 불미스러운 스캔들 사건으로 당사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힌 건 알고 있을 겁니다.”
“……네.”
사실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징계는 피해 갈 수 없을 거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 국장님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지난밤 내게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 모두 들은 상태였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들의 계획까지도, 전부 다.
곁눈질로 흘겨본 서린은 단조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린은 징계위원회에 참석하기 전, 사무실 직원들과 안부를 주고받을 만큼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제출한 시말서를 통한 사건의 경위, 그리고 내부 회의를 통해 징계처분이 결정됐습니다. 앞에 서류 보시죠.”
국장님은 나와 서린의 테이블 앞에 뒤집어 놓인 낱장의 서류를 읽으라는 듯 가리켰다.
집어 든 서류에 적힌 수많은 글자 중 징계처분이라는 단어가 유독 한 눈에 들어왔다.
‘편성국 소속, 윤여진 아나운서는 1주일 자택 근신 및 3개월 감봉에 처한다.’
“윤 아나운서는 개인의 사생활로 인해 앵커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1주일 자택에서 근신과 동시에 감봉 3개월에 처합니다.”
편성국 소속 차장님이 징계 처분에 대해 읊기 시작하자, 서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채서린 캐스터는 불미스러운 스캔들 및 허황한 이야기를 꾸며내 내부에 분란을 만들어 당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기에…….”
차장님은 덤덤한 목소리로 서린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내렸다.
“계약해지 처분입니다.”
“무슨 소리예요?! 말도 안 돼……! 이상해요!”
서린은 어렵게 오른 메인 뉴스의 기상 캐스터 자리를 박탈당했다.
종이를 움켜쥔 그녀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리다가, 치켜뜬 눈으로 날 가리켰다.
“왜! 왜, 저만 해고인 거예요?”
쉰 목소리로 소리치던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게다가 허황된 이야기라뇨! 불미스러운 스캔들을 빚은 건 윤 앵커 측이잖아요!”
“…….”
“폭로 기사 못 보셨어요? 그걸 보고도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처분을 내려요?”
서린은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제는 국장님을 향해 돌아섰다.
“국장님, 제가 계약직이어서 차별하세요? 아니면 저 여자한테 뭐라도 받으셨어요?”
서린의 크게 뜬 눈에 드러난 흰자가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허, 참! 이 사람, 말이 지나치네.”
국장님은 서린의 도가 지나친 발언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정을 봐서 좋게 마무리하려고 했더니 말이야.”
“뭐라고요?”
“자네는 방송일 하는 사람이 아침 기사도 확인 안 하나?”
국장님은 앞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돌려 서린에게 내밀었다.
“채 캐스터, 자네가 직접 확인해.”
“이게 어떻게……!”
서린은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기사를 읽고는 푸르르 입술을 떨었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터진 기사 때문에 매스컴이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 [호진 그룹, 장남 서재하 대표. 더블유 그룹의 대표 이사 취임식에서 공식 입장 발표.]
본래 취임식 없이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던 재하가 공식 석상 앞에 섰다.
라이브로 방송되고 있는 취임식에 참석한 수많은 기자가 재하를 향해 폭로 기사에 대한 사실 여부를 물었다.
단상 앞에서 수많은 카메라를 응시하던 재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제가 대표직 취임식에 기자분들을 부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요즈음 항간에 떠도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해명하려고 합니다.]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러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이 영상이라면 소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이라니? 무슨 영상?]
[폭로 기사 반박 영상인가 본데.]
소문을 전면 부정하는 재하의 말에 웅성거리는 기자들의 말소리가 영상에서 들려왔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재하는 미리 준비한 영상을 앞의 스크린에 띄웠다.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찍은 인터뷰 영상입니다. 미공개 인터뷰이죠. 아마 지금 공식 석상에서 제 모습을 처음 보셨을 겁니다. 제가 평소 매스컴에 노출되기를 굉장히 꺼립니다. 그래서 이 인터뷰는 아직 미공개로 남겨 있습니다.]
재하는 입국 당시에 찍었던 인터뷰 영상의 일부분을 재생했다.
영상 속에 그는 몇 년 만에 귀국한 사실을 토로하며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이 영상을 보여주시는 건, 서 대표님을 둘러싼 추문을 전면 부인하시는 거 맞으십니까?]
재하는 저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기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복 동생의 약혼 전부터 그분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왔다는 기사가 불가능하단 걸 보여주는 것이죠. 영상을 보면 아시다시피, 전 한국에 발을 디딜 시간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재하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자,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서린은 입술을 질끈 짓이겼다.
이런 식으로 밝혀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는지 서린이 국장님을 향해 휙 하고 돌아섰다.
“이, 이게 뭐 어떻다는 거예요?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는 말이에요. 한국에 없어도 알고 지낼 수 있잖아요!”
서린이 말도 안 된다며 재하의 말을 부정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노트북 화면 속 영상이 재하의 인터뷰에서 넘어가 다른 영상이 재생됐다.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었어요. 반지를 세 개 주문하셔서요. 저희 스페셜 웨딩 라인은 세상에 단 한 쌍만 만드는 특별 주문 제작인데, 다른 치수의 여자 반지를 하나 더 추가하셨어요. 더군다나 그 주문을 브랜드는 별말 없이 받아들였고요. 그런 일은 근무하면서 처음 있었거든요.]
서린은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화면으로 시선을 틀었다.
영상을 바라보는 서린의 얼굴이 차츰 경악으로 물들었다.
화면 속에서 결혼반지의 주문을 맡았던 직원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이었지만 서린은 단번에 그 직원이 누군지 알아차린 눈치였다.
[퇴사한 지 수개월이 됐는데도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잘 알려진 기상 캐스터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맞추셨으니 더욱 인상 깊었죠. 작년 이맘때쯤 있었던 일이에요.]
해당 직원의 인터뷰가 끝나자, 다시 단상에 선 재하가 마이크를 입가를 향해 끌어당겼다.
그의 입가에는 서늘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탐탁지는 않은데, 정당치 않은 여론 조작은 참을 수가 없어서요.]
[여론 조작이요? 서지한 대표 측의 언플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재하의 적나라한 단어 언급에 기자들이 술렁댔다.
그러나 재하는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기자들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건네지 않았다.
[제 소중한 사람이 가십이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제부터 이유를 막론하고, 제 사람에 대한 의혹이 다시금 불거진다면 강경하게 대응할 생각입니다.]
그의 곧은 시선이 카메라를 넘어 내게 닿은 것만 같았다.
그 말을 끝으로 재하의 취임식 영상이 끝났다.
한참이나 재하의 발언에 멍하니 멈췄던 정신이 돌아왔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우리가 연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자연스러운 눈빛이었다.
‘뭐야? 사람 헷갈리게.’
고개를 틀자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서린의 얼굴이 보였다.
예쁘장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쓰디쓴 낭패감이 퍼져 있었다.
서린을 마주하니 재하에게서 놀랐던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저, 저 사람이 어떻게…….”
“놀랐어? 네 딴에는 많이 노력했더라. 저 퇴사한 직원을 찾아갔다면서?”
서린이 해당 직원을 수소문해 접촉했다는 걸 재하로부터 들었다.
애초에 프라이빗한 룸에서 주문이 이뤄지기에 해당 직원 한 명만 입막음하면 될 거로 생각했겠지.
그런데 그 직원을 나와 재하가 먼저 찾았었다는 건 몰랐을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니까. 그러니까 왜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려.”
바들거리며 몸을 떨고 있는 서린에게 다가가 웃었다.
징계위원회 사람들의 시선에도 서린은 독기로 가득한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내게만 들릴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언니가 이겼다고 생각해? 웃기지 마. 난 졌다고 생각 안 해.”
서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는 목에 잔뜩 핏대를 세우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야 다들 날 천하에 나쁜 년이라 욕하겠지.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이잖아?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 대해 부러움만 남을 거야.”
궤변에 가까운 말들을 늘어놓는 서린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와 오빠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작은 흠 정도는 남겠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어. 우리의 관계는 여전해. 그리고 우리가 결혼하게 될 거란 사실에도 변함이 없어.”
“…….”
“아니, 언니 덕분에 우리의 결혼이 앞당겨졌으니 고마워해야겠다.”
일전에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역시……. 언젠간 밝혀질 허무맹랑한 소문을 꾸며낸 건 다 그 때문이었던가.
서지한과의 결혼을 위해서. 그 집안의 일원이 되기 위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사람 옆이 천국은 아닐 텐데.’
오히려 지옥이라면 지옥이었지.
아주 짧은 사이에 그와 지냈던 5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죽는 날까지 외롭고, 불행하기만 했던 결혼 생활이었다.
회상에서 깨어나자 참 그녀답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졌다.
정적이 흐르는 회의실에 내 낮은 웃음소리가 퍼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아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네요.”
전보다 경직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서린에게 얄궂게 싱글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생각한 것만큼 그 집안이 그렇게 녹록지 않아. 슬슬 너도 느끼고 있을 텐데.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높다는 걸.”
서린은 꽤 잔머리를 굴릴 줄 아는 영악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도 금방 들킬 수 있는 소문을 꾸며냈다는 것은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서지한 때문이겠지.’
지한에게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고, 그걸 느낀 서린이 무리수를 던진 것이다.
서린은 내가 말하는 바를 이해했는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그, 그게 무슨 의미야? 난 잘 모르겠…….”
“서린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알고 있을 텐데.”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자 서린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그리고 국장님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찰나였다.
내 손에 쥐여 있던 핸드폰이 진동 벨을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수 년만에 다시 보는 익숙한 호칭이 보였기에.
‘이렇게 이 사람이 먼저 연락해올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이 시간에 내게 전화했다는 건 귀국했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들자 석연치 않은 얼굴빛을 띤 서린과 눈길이 맞았다.
‘궁금하나 보네.’
여전히 진동을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그녀에게 들어 보였다.
서린의 정처 없이 흔들리는 두 눈동자가 내 핸드폰 화면에 닿았다.
그리고 발신인이 누군지 아는지 그녀의 두 눈이 서서히 확장됐다.
“서린이 너도 알지? 이 사람이 누군지.”
“…….”
“이제는 그 사람의 약혼자도 아닌데, 귀국하자마자 나한테 연락을 하시네.”
화면에 쓰여 있는 '오 여사님'이라는 단어에서 서린의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울리던 전화가 끊겼다.
“설마.”
서린은 중얼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로 손을 뻗었다.
전화가 끊긴 후 곧이어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 맞아. 서지한 씨 어머니야.”
“……하.”
“그런데 메시지가 잘못 온 것 같네. 며느리가 바뀌었다는 걸 모르시지 않을 텐데.”
핸드폰을 돌려 서린에게 내밀었다.
[여진아, 나다. 시간 괜찮다면 오늘 저녁 함께하자꾸나. - 오 여사님]
그리고 오 여사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서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