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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도저히 못 참겠어서 (63/126)


63. 도저히 못 참겠어서
2022.11.06.



 
이달 말에 있을 예식을 준비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출장 준비를 하는 재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출장을 가요?”

“지금 안 가면 결혼식 시기에 애매하게 걸려 버려서요.”

그는 인텍에 대해 흘린 소문을 지한이 덥석 물었다고 했다.

공개 입찰에 더 확실하게 지한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지금이 인텍과 접촉해야 하는 최적의 시기라는 말도 덧붙였다.

호텔 식사 자리에서 등장한 서 회장님을 보고 불안정하던 모습을 보이던 지한이 생각났다.

처음엔 서린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식사 자리였겠지만 서 회장님의 등장으로 상견례와 같이 변모했다.

분한 듯 두 눈이 이글거리던 지한의 모습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지한을 떠올리며 생각이 깊어지는 내 귓가에 재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감겼다.


“무슨 생각해요?”

“……인텍에 대해 생각 중이었어요.”

“나중에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은 더 자도 되는데.”

그의 말처럼 아직은 일어나기엔 이른 새벽이었다.

재하는 시계를 들여다보곤, 꾸린 짐을 내려놓고 내게로 다가왔다.


“어차피 잠도 잘 안 와요. 마중하고 누우면 돼요.”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하는지 부피가 상당했다.


“얼마나 있다가 오는 거예요? 짐이 꽤 큰데요.”

“4박 5일 정도? 일정에 따라 더 길어질 수도 있고요.”

“꽤 기네요. 거리도 멀어서 피곤하겠다.”

아침도 거르고 곧장 출발해야 하는 재하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피로가 문제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피곤한 것보다는 오늘 드레스 보러 못 가는 게 너무 아쉬운데.”

“…….”

“나는 당신이 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싶었단 말이지.”

불현듯 오늘 드레스를 착장하기 위해 숍을 예약해뒀던 사실이 상기됐다.

사실 나도 내심 기대했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전생에도 드레스 피팅을 홀로 보러 다녔었다.

서린이 시간을 내 드레스를 함께 골라주었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에 사진 보내줄게요.”

 

* * *



“손님, 오늘 혼자 드레스 보시는 거예요? 플래너도 없으시던데.”

“네. 혼자 볼 거예요.”

“신랑분이 바쁘시구나. 저희가 대신 잘 봐 드릴게요.”

거울에 비친 허리 지퍼를 올리는 직원을 바라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한창 드레스 피팅에 열중하고 있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손님이 있어요?”


“네. 죄송해요, 두 분이 함께 예약하셨는데 오버 부킹이 돼버려서요.”


“아니, 어떻게 그래요? 제가 넉넉하게 2타임 예약해달라고 했잖아요! 다른 팀 취소하세요. 설마, 지금 안에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귓가를 찌르는 높은음의 목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아니겠지. 대한민국에 많고 많은 게 웨딩숍인데 이런 데서 마주칠 리가…….’

“신부님, 열까요?”

피팅룸 문 앞에 서 있는 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여자의 눈동자가 날 향해 얽혀 왔다.

서린의 잔뜩 찌푸린 얼굴을 보는 순간, 설마 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다.

호텔에서의 식사 자리를 파하고 나서 며칠 만에 보는 그녀였다.


“하, 뭐야? 언니. 이제는 웨딩숍까지 따라와요? 너무 하네.”

피팅룸 앞의 소파에 앉아 펼쳐진 카탈로그를 보고 있던 서린의 표정이 아니꼬웠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참 기가 막히네. 얘를 여기서 다시 볼 줄이야.’

나야말로, 이 드레스숍을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떡하실 거예요? 나 저 사람이랑 같은 드레스 입기 싫은데.”

“죄송해요. 두 분 다 이 시간에 예약이 되셨어요.”

오버 부킹했다던 웨딩숍 실장을 째려보며 따지듯 말하는 서린이 보였다.

같은 드레스라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싫었다.


‘내가 미쳤니? 너랑 같은 드레스를 입게.’

그녀를 바라보며 이마를 짚다가 밀려오는 허탈함에 실소를 흘렸다.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불편하시면 다른 날 예약해서 올까요?”

“안 돼요. 여기 숍으로 저희 어머님이 오신다고 했단 말이에요.”

플래너로 보이는 여자가 슬그머니 묻자, 서린은 절대 안 된다고 강경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서린의 입에서 나온 어머님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어머님이라면 오 여사를 말하는 것인데.


‘그 사람이 여길 온다고?’

순간, 먼 곳에서부터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 다가왔다.

서린은 멀리서 보이는 오 여사의 모습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어머님, 먼 곳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죠?”

사이좋은 고부지간처럼 서린은 오 여사에게 팔짱을 꼈다.

메인 피팅룸을 향해 걸어오던 오 여사의 시선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내게 닿았다.


“뭐니, 이 상황?”

두 예비 며느리가 한데 모여 있는 상황을 본 오 여사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
.
.

몇 벌의 드레스를 지나, 어느덧 마지막 드레스였다.

쇄골을 드러내는 마지막 드레스는 지한과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드레스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이게 제일 나은 것 같아.’

아무래도 이 드레스로 결정해야겠다 싶었다.

탈의를 위해 피팅룸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승맞게 혼자 드레스를 입으러 오는 신부가 어딨어?”

마주한 서린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비아냥거렸다.

잠깐 오 여사가 화장실을 가겠다고 자리를 비워 혼자 앉아 있는 서린이었다.


“그러는 너도 혼자 아니야?”

내가 보기엔 지한 없이 홀로 웨딩드레스를 보러 온 건 서린도 매한가지였다.

참, 애쓴다는 생각이 들자 서린이 안타까웠다.

서린은 내 표정에서 드러난 애잔함을 읽었는지 버럭 소리쳤다.


“혼자라니! 여기 어머님 와 계신 거 안 보여? 그리고 오빠는 오늘 바빠서 못 온 거야!”

“그래. 그렇다고 치자.”

서린의 행거에 드레스 몇 벌이 걸리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오 여사가 돌아왔다.

서린의 취향이 가득 담긴 드레스들을 뒤적거리던 오 여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님, 이런 드레스 어떨까요? 홀이 화려해서 드레스가 과감해도 괜찮을 것 같죠?”

오 여사는 서린이 행거에서 꺼낸 드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탈로그를 집어 들어 쓱 훑던 오 여사는 서린과 눈을 맞추지도 않고 답했다.


“난 됐다.”

“…….”

“오늘은 점심 한 끼 하고자 온 것이니. 네가 입고 싶은 거로 입으렴.”

서린은 오 여사가 먼저 식사를 제안한 게 감동이었는지,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게로 돌아서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눈빛이 ‘거봐, 언니한테는 이런 제안 안 하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L 호텔이라 하셨죠? 그쪽 홀에 어울릴만한 화려한 디자인으로 몇 벌 보여 드릴까요?”

“네, 좋아요. 그리고 저 이거 입어 볼래요.”

서린은 직원을 향해 손에 들린 드레스를 건넸다.

드레스를 입어보겠다고 서린이 피팅룸으로 사라지자 무심하게 앉아 있던 오 여사의 눈길이 내게 닿았다.


“재하는 함께 안 왔나 보구나?”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피팅룸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들려오는 오 여사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네.”

“아쉽구나. 네 신랑이 우리 지한이었다면 이 시간이 참 유의미했을 건데.”

오 여사는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깊숙이 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유의미한 시간이라…….

아직도 더블유 그룹에 대한 미련이 드러나는 말에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 여사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남자 구두 굽 소리가 멀리서부터 바닥을 울리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날 향하던 오 여사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옮겨갔다.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확대됐다.


“여사님, 방금 그 말은 좀 그렇습니다. 제 아내가 될 사람한테 자꾸 다른 남자 엮지 마세요.”

익숙하디 익숙한 저음에 놀라 돌아섰다.

오 여사는 예상치 못한 재하의 등장에 질색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재, 재하. 네가 여긴 어떻게……!”

“출장 가려던 길에 차 돌렸습니다. 이 사람이 드레스 입은 사진을 보니까 도저히 못 참겠어서.”

놀란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궁금하다고 묻는 재하에게 직원이 찍어준 드레스 사진 몇 장을 보냈던 참이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답장이 없길래 가는 길에 바쁜가 싶었는데.

드레스숍으로 돌아오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말도 없이 오면 어떡해?’

그렇지 않아도 서린과 오 여사와 한 공간에 있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그런데 딱 도망치고 싶은 타이밍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반칙이잖아.

재하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더 빠른 박자로 요동쳤다.

그는 드레스를 입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재하의 널찍한 품 안에 안기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자 부산으로 향하던 차를 돌렸다고?

왜 그렇게까지…….

생각할수록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재하의 손길에 다시금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여진 씨.”

설레는 감정에 취해 있다가 나지막이 부르는 재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부산에 가는 길이었잖아요.”

뒤늦게 느껴지는 오 여사의 따가운 시선에 그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미팅 시간 늦췄어요.”

마치 저녁 식사 약속을 미루듯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재하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자 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한 비서님은요? 같이 출발했잖아요.”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십 분 정도는 보고 갈 시간이 있어서.”

한 비서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올 뻔했다.

역시 재하는 무리해서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 덕분에 이렇게 실물로 볼 수 있으니까.”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닌데.

그도 내 질문의 의도를 읽었는지 재하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겨우 정신을 다잡았는데, 자꾸만 재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심장을 뒤흔들었다.

재하는 비어 있는 다른 손을 들어 올려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 예뻤지만, 드레스는 지금 입은 게 제일 잘 어울려요.”

연인에게나 보일 법한 재하의 다감한 눈빛이 내게 닿았다.

주변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 낯뜨거운 그의 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눈빛으로 보면 어떡해.’

그가 우리를 지켜보는 두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보다 더 과감해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말로 그에게 설레고 있었다.


“저, 채서린 신부님 나오셨는데요.”

서린의 드레스 착장을 도와준 직원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나왔을지 모를 서린이 드레스를 한 움큼 쥐어 잡고는 부들거리고 있었다.

재하의 등장에 한순간에 찬밥 신세가 돼버린 서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서린을 향해 던졌던 시선을 거둬들이고는 오 여사를 향해 말했다.


“여사님 생각은 어때요. 이 드레스가 제일 잘 어울리죠?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 같아.”

그렇게 말하며 재하는 내 어깨에 그의 얼굴을 묻었다.

그와의 스킨십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자 오 여사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재하는 누가 봐도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듯 사랑이 그득한 눈빛이었다.

멀찍이 서 있는 서린 역시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분한 것 같았다.

이쯤하고 그만 드레스를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떼어냈다.


“갈아입고 올게요. 급하면 먼저 가도 돼요.”

그리고 피팅룸으로 돌아가는 길에 황망하게 서 있는 서린을 향해 말했다.


“청승맞게 혼자 드레스를 보러 온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네.”

그녀를 향해 비틀린 조소를 지어 보이고는 피팅룸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나를 따라 들어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재하가 직원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나를 따라 룸 안으로 들어왔다.


“재하 씨! 한 비서님 기다린다면서요.”

거울 너머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덧 십 분을 훌쩍 넘긴 시각을 가리켰다. 이제는 정말 재하가 가야 할 시간이었다.


“십 분 한참 지났어요. 어서 가요.”

어서 가라는 내 말에 재하는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보다시피 두 사람 때문에 곤혹스러웠거든요.”

룸 밖에서 재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밑에서 기다리는 한 비서를 생각하면 지금 내려가야 할 텐데,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훤히 열려 있는 피팅룸 문을 닫고는 성큼성큼 걸어 내게로 다가왔다.

가라고 했더니, 재하가 문까지 닫고 들어오자 더 당혹스러웠다.


“……?”

“지금 가면 우리 한참 못 보는데 뭐 없어요?”

문은 왜 닫은 거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재하는 어딘가 모르게 서운해 보이는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꼭 장기 출장을 앞둔 남편이 아내에게 투정 부리는 것 같은 말이었다.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조심해서 잘 다녀와요, 다치지 말고요.”

“그게 끝은 아니겠지?”

재하는 특별한 인사라도 기대했는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반문했다.

그가 내게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재하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봐요. 한 비서님이 많이 급한가 본데요.”

재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잔뜩 미간을 좁히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아, 타이밍 참 얄궂네. 시간에 쫓기는 거 딱 질색인데.”

재하답지 않게 조급함이 묻어 나오는 표정이었다.


“여진 씨가 안 하니, 나라도 해야지.”

“뭘요?”

“인사요.”

‘인사?’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재하가 먼저 내 양 볼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그의 입술이 서서히 내게로 내려오더니 말캉한 촉감이 닿았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뭐가 닿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하는 내 입술을 깊게 빨아들였다가 멀어졌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어요, 사고 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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