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눈 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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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눈 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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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눈 감아요
2022.12.15.
불면증 약을 처방받기 위해 대진 병원을 찾았다.
점심시간이 끝나서 그런지 병원은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지현은 이곳의 가정의학과 교수로 있었다.
급하게 연락했는데도 편한 시간대에 찾아오라는 말이 퍽 다정했다.
‘이럴 때는 친구가 좋다니까.’
지현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병원을 방문하기 어려웠겠지.
진료실에 들어서자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녀가 내게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어서 와. 예약일도 아닌데, 연락이 와서 놀랐잖아. 컨디션은 괜찮아?”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것 빼고는 괜찮아.”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지현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오랜 기간 병원 치료를 받아왔기에 별말 없이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새신부가 왜 잠을 못 잘까? 신혼여행은 잘 다녀왔어?”
“응. 휴양지로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어. 결혼을 해도 잠이 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더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편하게 잠을 자는 건 아직 무리인 듯하지만.
지현은 그런 내 대답에 못 말린다는 듯 웃고는 차트를 작성해 내려갔다.
“남편이 들으면 서운하겠다. 증상은 어때? 전보다 심해졌어?”
지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전이랑 비슷해. 안 먹은 날이면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서 힘들더라고.”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수면 센터에서 치료를 받아보면 좋을 텐데.”
불면 증상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지현이 권해준 수면 클리닉도 치료 효과가 미미했다.
더불어 호진 그룹과의 합병을 앞두고 대외적인 시선을 생각해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거기엔 지한의 완고한 뜻도 있었다.
“합병을 앞두고 상속녀가 수면 센터에 다닌다는 말이 나와서 되겠어? 차라리 당신 친구한테 진료를 받지 그래?”
조부상을 당하고 생긴 극심한 불면증을 지한은 내가 문제인 것처럼 취급했었다.
나를 위하는 척 이야기했지만, 아내가 정신과 치료를 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라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옛 기억이 떠오르자 기분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니?”
“고민거리?”
지현의 나긋한 음색이 들려왔다.
어느덧 그녀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불면 증세가 심하진 않았잖아. 처음에 네가 날 찾아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회귀 이후 불면증이 더욱 심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 회귀했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진 상태였지만, 상대적일 뿐.
지현은 늘 내게 정식으로 치료를 받기를 권했다.
“네 가족의 사고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어. 이대로 네가 무너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
“그랬구나. 나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걱정 마.”
사고 소식이 알려진 이후, 지현은 심리 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안 좋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은 남편이 있어서 든든해.”
재하가 있다고 말하는데 가슴이 뭉글해졌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정서적인 안정감이 이렇게나 큰 줄은 몰랐다.
‘나한테 결혼 생활은 곧 악몽이었으니까…….’
5년이란 세월 동안 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어쩌면 치료에도 낫지 않았던 이유가 불행한 결혼 생활이었을 수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묵직하게 가라 앉았다.
재하와 결혼하고 난 후, 결혼에 대해 가졌던 편견이 바뀌었다.
홀로 집을 지키며 언제 돌아올지 모를 지한을 기다리던 과거와는 달랐다.
집에 돌아오면 환한 집안에서 날 반갑게 맞이하는 재하가 있었다.
그가 있는 집은 따뜻했고 그와 주고받는 대화가 끊일 줄 몰랐다.
불안정하던 내가 그의 곁에서 조금씩 안정된다는 게 몸소 느껴질 정도로.
“치료받는 거 고민해볼게. 오늘은 약 처방 좀 부탁해.”
“그래, 알았어. 부모님 병문안만 오지 말고, 나한테도 자주 얼굴 좀 비춰줘. 올 때마다 김 박사님만 뵙고 가더라, 너?”
그녀는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나 가볼게.”
진료 차트를 입력하는 지현에게 인사하고 병실을 나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문득, 서린도 이곳을 다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지현아, 너 서린이 주치의가 누군지 알아?”
느닷없는 내 질문에 타이핑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던 지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서린이? 채서린? 글쎄. 김 박사님께 따로 들은 건 없는데.”
대진 병원은 호진 그룹의 협력 병원이었다.
호진 가의 사람들은 대진 병원에 담당 주치의를 두고 정기적인 관리를 받았다.
‘이 병원을 다니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전생에 지한과 함께 이곳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나오는 서린을 마주쳤는데.
그때의 그녀는 초음파 사진을 보며 세상을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렇기에 이번 생에서도 당연히 이곳에서 진료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허영심이 강한 채서린이 다른 병원을 갔다고?’
의문으로 가득 찬 내 얼굴을 바라보는 지현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녀는 쓰고 있는 안경을 추켜 올리고는 내게 말을 이어갔다.
“궁금하면 내가 한 번 알아볼게. 담당 교수가 누군지는 알 수 있을 거야.”
“응. 부탁할게.”
진료실에서 나오고 나서도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 *
집에 도착하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사람 사는 느낌이 물씬 드는 정다운 집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 온 것인지 재하가 중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는 신발을 벗고 있는 나를 맞이했다.
“왔어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낮에 옛 기억을 떠올려서 그런지 날 반기는 재하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닿았다.
‘이제는 혼자가 더 낯설어.’
그가 주는 평온함과 따듯함이 나를 물 들 때마다 좋아하는 마음은 끝없이 자라났다.
더 이상 이 남자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 힘들 만큼.
어느덧 그는 내게 복수를 함께 하는 파트너 이상으로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재하는 신발을 벗고도 들어오지 않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오랜만에 출근해서 오늘 많이 힘들었나?”
이렇게 다정하게 내 하루를 물어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따듯한지.
오늘따라 재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저 그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내 시선이 달라질 수 있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그렇게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로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걱정스러운 눈짓을 짓는 그를 향해 별것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재하 씨, 나 씻고 올래요.”
.
.
.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재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책을 내려다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며 마음을 추스르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내가 다가가 앉자 그는 바짝 말린 내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늘은 머리를 다 말렸네요?”
“네. 누가 하도 뭐라고 해서요.”
내게 샤워 후 머리를 말리는 습관이 생긴 걸 모르는 그였다.
재하는 그런 내 말에 낮게 웃음을 흘렸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했던 말이라는 걸 알아줘야죠.”
“치, 알았어요. 그런데 누가 여름에 감기 걸린다고.”
“그렇게 방심하면 안 된다고 했죠? 차 마실래요?”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포트를 집어 들었다.
재하의 앞에는 막 끓인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보였다.
“이번에는 허브차인가요?”
그가 비어 있는 잔에 차를 내리자 은은한 허브향이 물씬 풍겨왔다.
“네. 라벤더 차예요.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니까, 마시면 금방 잠들 거예요.”
그는 옅은 황색의 빛깔이 맴도는 차가 담긴 잔을 내게로 내밀었다.
차를 한 모금 머금자 허브 특유의 싸한 개운함이 입안에 맴돌았다.
“고마워요.”
“피곤하면 누워도 돼요. 어차피 난 앉아서 책 읽을 거니까. 내 무릎을 베도 좋고.”
‘뭐?’
재하는 당황한 나를 향해 손에 들린 책을 흔들었다.
무릎을 베라니.
생각만으로도 민망해 재하 옆에 있는 쿠션을 집기 위해 팔을 뻗었다.
내 계획을 알아차린 것처럼 재하가 쿠션을 높이 집어 올렸다.
“안 줄 거니까 포기하고 여기 누워요.”
그는 내게 그의 무릎을 가리키며 웃었다.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단호하게 뜬 눈빛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의 무릎에 누워 재하를 올려다봤다.
재하의 얼굴이 반쯤 책에 가려져 눈만 보였다.
“재워줄까요?”
“네? 재하 씨가 날 재운다고요? 어떻게요?”
재하의 오묘한 표정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눈 감아 봐요.”
‘눈을 왜?’
말똥말똥 두 눈을 뜨고 있는 내게 재하가 눈을 감으라는 듯 시선을 맞췄다.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태풍이 몰고 온 빗소리에 일찍 잠에서 깬 새벽, 두꺼운 시집을 뒤져가며…….”
고요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재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읽고 있는 책의 구절을 소리 내 읽었다.
처음에는 그 구절이 좋아서 소리 내 읽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디오북 마냥 책을 읽어주는 재하의 모습에 킥킥 웃음이 터졌다.
잠을 재워주겠다더니 이런 방법일 줄은 몰랐다.
“누가 책을 그렇게 읽어요?”
“난 원래 이렇게 읽어요, 그리고 눈 뜨면 안 돼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재하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는 내게 느른한 미소를 짓고는 내 눈가로 손을 뻗었다.
“눈 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