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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피어나는 의문점 (98/126)


98. 피어나는 의문점
2023.03.09.


스튜디오에서 나온 순간, 누군가 끌어 잡는 힘에 의해 돌아섰다.

돌아선 곳에는 씩씩거리는 지한이 서 있었다.


“나 좀 봐.”

내게 연락해올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곧장 뒤쫓아 올 줄은 몰랐다.

그의 등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으면.”

번뜩이는 눈빛을 보니 일하는 곳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지한은 한다면 하는 성격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쫓아갔다.


‘주변이 CCTV로 가득하니, 괜찮겠지.’

- 쾅!

야외 테라스에 나온 지한이 분한지 난간을 내리쳤다.

방송이 시작할 때만 해도 차려입은 모습이 꽤 봐줄 만했는데 지금은 엉망이었다.

지한은 테라스에 따라 들어온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말해.”

다짜고짜 말하라는 지한의 말이 우스워 실소를 지었다.

뭘 묻는 건지 알았지만 곧이곧대로 이야기를 해줄 생각은 없었다.


“뭘요?”

태연하게 모르는 척 묻자 지한의 양미간이 깊게 팼다.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은 지한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후. 인텍, 지금 뜬 기술 절도 기사 말이야. 당신이 한 짓이지?”

지한이 내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잔뜩 열이 올랐는지,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걸 한낱 방송인일 뿐인 내가 어떻게 알고 해요? 너무 넘겨짚는 것 아닌가.”

그런 적 없다고 답하는 내 모습에 지한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테셀이면 더블유와 한창 인수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 더군다나 당신이 한 게 아니라면 내가 생방송 하는 스튜디오까지 찾아올 리가 없지 않나?”

지한답지 않게 오늘따라 말수가 많았다.

그만큼 지금 인텍의 기사로 당황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래도 내가 넘겨짚는 건가?”

지한의 조급함이 묻어나오는 눈동자와 떨리는 입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격양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지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바쁜 사람을 부른 게 고작 심증만으로 밀어붙이기 위해서예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지한을 바라보다가 팔짱을 풀었다.

더는 마주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아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나지막한 지한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야!”

지한이 있는 쪽으로 돌아서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허공을 응시하던 지한이 날 곧은 시선으로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 속엔 원통함이 절절했다.


“내가 당신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내가 하는 일에 다 훼방을 놓냐고!”

“…….”

“그래. 서린이와의 일은 내 잘못이야. 그런데 그게 이렇게까지 날 몰아가야 할 일이야?”

목에 벌겋게 핏줄이 설 만큼 지한은 내게 억울함을 토해냈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 건지. 울분을 토해내는 지한을 보자 되려 내 심장은 싸늘하게 식었다.


“게다가 서린이가 사주한 청탁 살인 건은 나도 정말 모르는 일이야!”

“몰랐다고요?”

“정말이야. 내가 당신을 죽여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왜 그런 하이 리스크를 감수하겠어?”

샐쭉하게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두 눈동자를 바라보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아무리 몰랐다고 한들, 당신이 그간 지어온 죄가 없어지진 않아.’

청탁 살인이 서린의 단독 계획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지한이 그렇게 급박하게 날 죽여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청부 살인에만 연관되지 않았을 뿐 지한이 내게 했던 악행들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난 여전히 전생의 악몽을 꾸며 살아가고, 법원 앞에서 죽었던 날 차에 치인 고통이 아직도 생생했다.

내게 지독한 트라우마를 남긴 당신을 용서할 순 없잖아.


“당신 이제 내 형이랑 결혼했잖아. 결국 원하는 대로 호진 그룹의 일원이 되었는데, 뭐가 문제야?”

“…….”

“어차피 나든, 형이든 당신은 그저 호진에 들어오면 그만인 거 아니었어?”

뻔뻔한 지한의 말에 기가 막혔다. 어떻게 되먹은 사람이면 저렇게 저급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건지.

그를 바라보는 내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지한의 얼굴이 굳었다.

이 상황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그를 자극이라도 한 듯, 버럭 소리 질렀다.


“지한 씨, 내가 그동안 모를 줄 알았어요?”

“……뭘?”

내게 묻는 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당신이 김영민 부회장과 내통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더블유 그룹과의 합병을 약속받은 대신에 모종의 거래가 오갔다는 것도.”

“…….”

“그래서 나한테 집요하게 굴었던 거잖아. 가증스럽게 남편인 척, 가족이 되어줄 것처럼 설탕 발린 말을 하면서.”

지한은 내가 김영민 부회장과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기야, 회귀하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사실이었다.

한 번 죽고 되살아난 후에야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우리가 그날 결혼했더라면, 향후 몇 년 안에 난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겠죠.”

“…….”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인텍 사건은 예견된 사고였어. 당신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다만, 재하가 그 사건의 시일을 조금 앞당겼을 뿐이었다.

원래는 이 년 뒤에나 찾아올 일이었지만 이 년씩이나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 인텍에 대규모 투자를 해 호진 건설을 파멸로 이끈 것은 지한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선 인텍을 합병했으니, 앞으로 호진 그룹이 파국으로 치닫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신의 무능력함이 불러일으킨 참사라고요. 내 탓이 아니라.”

지한은 쐐기를 박는 내 말에 얼굴이 꺼무죽죽하게 질렸다.

이제 와서 날 찾아와서 따져도 아무것도 변할 것은 없다.

모두 지한이 쌓아온 업보였으니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자 방송 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지나쳤다.

그렇게 돌아가려고 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지한을 향해 돌아섰다.


“참, 그리고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아.”

지한은 나지막한 내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이럴 게 아니라 당장 회장님께 빌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

 

 

* * *

방송국에서 나온 지한은 민국의 연락을 받고 곧장 평창동 본가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민국과 통화했던 내용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민국은 미국에 있는 지사로 장기 출장을 떠나 있었다.

창립 기념일 전에 급한 계약 건을 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도 미국에서 인텍의 기사를 접했는지 곧장 전화해왔다.


-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지? 무슨 정신머리로 일을 하면, 우리 호진이 타 기업의 기술을 훔치는 기업과 합병을 하냐는 말이야!

기사가 나간 직후, 전 세계적으로 인텍은 절도범이 되어 있었다.


- 하필이면 테셀의 기술력을 절도했다니.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은커녕, 최악의 기업 반열에 오르게 생겼어!

지한은 민국의 말을 떠올리며 가쁜 호흡을 가다듬었다.

파혼 기사에 이어 터진 서린의 청부 살인 건으로 이미 호진 그룹의 이미지는 바닥을 쳤다.


- 어쩔 셈이야! 너 하나 때문에 그간, 공들여 쌓아온 호진 그룹이 휘청이고 있다!

민국은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는 지한에게 끝까지 냉랭했다.


- 본가에 찾아가서 회장님께 빌든, 애원하든 네가 알아서 해!

전화를 끊을 때까지 민국의 호통은 끝날 줄 몰랐다.


‘젠장!’

지한은 전화를 끊고서도 민국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라,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김 실장은 기사가 터짐과 동시에 사라진 해당 연구원의 소재를 파악 중이라고 했다.

인텍의 기술력을 높이 샀건만.

그 기술력이 타 기업의 기술을 절도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명백히 이번 합병 건은 지한의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사고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앉아 있던 무진이 고개를 틀었다.


“서재로 따라와.”

지독하게 낮은 저음으로,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무진은 서재 안으로 사라졌다.

서재 문을 노크하는 지한의 손이 떨렸다.

서재로 들어서자 책상을 짚고 서 있는 무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침착하고 냉정하던 무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혈압약을 먹은 건지 그의 책상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약봉지가 보였다.

무진은 지한을 보고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회장님…….”

지한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무진을 불렀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무진의 날카로운 눈빛이 지한에게 박혔다.


“긴말 안 하마. 후계자 자리는 내려놓을 준비해라.”

“회장님!”

지한은 무진의 바로 앞까지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너 같은 녀석에게 내 평생을 바쳐온 그룹을 맡길 생각 없다.”

“회장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기회?”

무진은 기회라는 지한의 말에 조소를 흘렸다.

약봉지를 끌어 잡은 무진은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만회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제가 그룹에 끼친 손해는…….”

절박하게 말을 이어가던 지한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진이 들고 있던 물병을 그대로 지한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기 때문에.

지한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카펫을 적셨다.

더는 네게 줄 기회는 없다는 듯 무진은 들고 있던 물병을 지한의 옆으로 내던졌다.

- 탁!

데구루루 굴러온 물병이 지한이 꿇은 무릎에 부딪혔다.

지한은 텅 빈 채로 바닥에 널브러진 물병에 제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신 같아서.

지한이 천천히 눈을 감자 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네가 내 집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무수히 많은 기회를 줬다.”

“…….”

“네 형을 제치고 네가 호진 그룹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지.”

들려오는 무진의 불호령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내 선택을 후회했다. 너 같이 무능력한 놈에게 호진을 물려줄 바에야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더구나.”

“회장님……!”

무진에게서 전문 경영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지한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저를 두고 타인에게 그룹을 맡기겠다는 무진의 말은 너무나도 굴욕적이었다.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지한의 두 눈에 벌겋게 선 핏줄이 드러났다.


“왜? 후계자 자리에 오르더니, 호진이 네 손안에 있다고 생각했나 보구나.”

그를 조롱하는 무진의 말투가 지한을 더욱 자극했다.


“평생을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회장님도 아실 텐데요! 전 이대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

“뭘 믿고 호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말입니까! 제가 있는데!”

지한의 이어진 말을 들은 무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터진 그를 응시하는 지한의 얼굴이 굳었다.


“재밌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호진을 맡길 수 없다니.”

“…….”

“그래, 네가 민국의 아이로 우리 집안에 들어온 지가 벌써 이십여 년이 되었구나. 세월이 참 빠르게 흘렀지.”

“……?”

의미 모를 무진의 말들이 이어지자 지한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무진이 천천히 무릎을 꿇어 지한과 시선을 맞췄다.


“너와 네 아비는 닮은 듯하면서 닮지 않았지.”

“그게 무슨…….”

무진의 곧은 시선을 마주한 지한이 손끝을 떨었다.

지한은 의미심장한 무진의 표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번도 이상하다고 여긴 적이 없더냐? 아무리 내연 관계였다 한들, 아들을 낳은 네 어미가 내 허락 없이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 말이다.”

“…….”

“또, 집안 모두가 가진 약물 알레르기 반응이 네게만 없었지.”

꾸욱, 무진의 큼직한 손이 지한의 어깨를 짚어 눌렀다.

어깨를 짓누르는 강인한 힘에 지한은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되삼켰다.


“왜 그랬을 것 같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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