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용의자 서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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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용의자 서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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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용의자 서재하
2023.04.02.
재하의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무슨 정신으로 생방송을 끝마쳤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방송을 끝마치고 나옴과 동시에 현익 아저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여진아, 서 회장님께서 위독하시다!
회장님이 위독하단 소식에 곧장 대진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으로 오는 길 내내 재하는 내 연락에 묵묵부답이었다.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는 신호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나보다 먼저 회장님을 찾았던 그였는데.
재하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후, 쭉 연락되지 않았다.
불현듯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병실에서 나와 있는 현익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다급한 내 발걸음 소리를 듣고 아저씨는 내게로 달려왔다.

“여진아!”

“아저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위독하시다니요……!”
아저씨의 주름진 두 손을 마주 잡기를 잠시,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병실이 보였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정리되지 않은 의료장비가 놓여 있었다.

“재하 씨가 평창동을 찾았었…….”
아저씨에게 말하면서도 회장님께 눈을 뗄 수 없었다.
척 봐도 상태가 좋지 않은 회장님의 모습을 보고 홀린 듯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낯선 자들과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누구시죠?”
병실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고개를 돌리니,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지한과 오 여사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눈길이 마주한 오 여사의 입매에 의미 모를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알 수 없는 미소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던 때였다.

“형사입니다. 윤여진 씨 되시죠?”
생소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 제가 윤여진입니다. 형사분들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죠?”
이어진 내 통성명에 두 형사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처음부터 내게 볼 일이 있던 것처럼 보여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겼다.

“남편분 되시는 서재하 대표님 때문입니다. 지금 서재하 씨 어디 계십니까?”

“재하 씨를 왜 찾으시는데요?”
다소 경직된 표정을 보니, 좋은 일로 재하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형사가 사경을 헤매는 회장님의 병실을 직접 찾아올 리가 없으니까.

‘그만큼 급한 일이라는 건데.’
두 형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날 짓눌렀다.
그 순간, 재하가 내게 했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 내가 함정에 빠진 것 같아.
두 형사, 그리고 뒤에서 날 응시하고 있는 지한의 눈빛에 차츰 심장이 조였다.

‘설마…….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가 떠오르자 심장이 불안정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형사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서무진 회장님에 대한 약물 투여 혐의의 가장 유력한 용의 선상에 올라 있어서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인지…….”
용의 선상이라니. 약물 투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형사들의 이야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서재하 씨가 용의자라는 말입니다.”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형사 한 명이 내게 재하가 찍힌 사진 몇 장을 건넸다.

“CCTV에 찍힌 서재하 대표 모습입니다. 분명, 저택을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죠. 서 대표가 들어간 후에 서 회장님의 비상 모니터링 시스템이 울렸습니다. 갑작스레 바이털 사인에 이상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원인은 약물로 인한 쇼크 증상입니다.”

“…….”

“그리고 저희가 현장을 찾아갔을 땐, 서재하 대표는 도주한 후였습니다. 현장에는 이렇게 약물을 투여했던 약병과 주사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서재하 대표의 지문이 검출되었고요.”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는 주사기와 약병 증거품 사진을 내게 내밀었다.
사진을 집은 손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솔직히 이 정도 증거면…….”
이어질 말을 듣지 않아도 증거들이 재하를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성이 흩어지던 순간, 오 여사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어떻게 서 대표가 이런 짓을……! 지금, 서재하 어딨어!”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소리치는 오 여사를 지한이 막았다.
카랑카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개도 제 주인을 물지는 않아! 하물며 동물도 은혜를 갚는데, 평생을 길러준 회장님을 이렇게 만들어? 그러고도 사람이야!”
천장을 뚫을 것처럼 오 여사의 언성이 높아지려던 찰나였다.
- 콰앙!
거칠게 병실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들이닥쳤다.
막 미국에서 귀국한 서 부회장님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재하가 용의자라니!”
부회장님의 호통과 함께 소란스럽던 병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 부회장님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 * *
언제 날이 밝은 건지, 커다란 창을 통해 눈부신 햇살이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다가 누군가가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떴다.

“저런, 깼구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날 바라보는 아저씨의 얼굴이 어둡게 그늘졌다.
그런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잠깐 눈을 감고 있었던 거였어요.”
재하는 나와 한 통화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꺼놓은 핸드폰 때문에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였다.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혹여나 재하에게서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두 눈을 뜬 채로 회장님 곁을 지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아…….’
함정에 빠진 것 같다고 말하던 재하의 낮은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형사는 서 회장님에게 항생제를 투여해 과민성 쇼크를 일으킨 혐의로 재하를 내사 중이라 했다.

‘이상해. 재하 씨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
재하는 회장님의 긴급 호출 신호를 받고 평창동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형사들의 말로는 호출 신호는 한 번밖에 울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출동한 신 박사와 병원의 신속 대응팀 역시 비상 호출은 한 번만 울렸다고 진술했다.

‘분명히 그 두 사람이 꾸민 일인데.’
재하를 생각하자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경찰을 피해 숨었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내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자 아저씨가 어깨를 다독였다.
토닥이는 손길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 대표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고?”

“네……. 전혀 연락이 안 돼요. 한 비서님도 전혀 모르는 눈치이고요. 어떻게 된 걸까요?”
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물을 보곤 토닥거리던 아저씨의 손길이 멎었다.
날 바라보는 아저씨의 눈빛이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걱정돼요. 어디서 밖을 헤매는 것은 아닐까. 위험에 처한 건 아닐까……. 자꾸 불안해서…….”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타나 날 안아줄 것만 같았는데……. 재하는 순식간에 내 곁에서 증발해버렸다.

“괜찮다.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 대표니까.”
아저씨의 너른 품에 안겼다.
등을 쓸어내리는 따듯한 손길에 들썩이는 어깨가 차츰 멎어 들었다.
재하는 괜찮을 거라고, 아저씨는 내게 주문을 외우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서 대표를 믿자꾸나.”
따듯한 아저씨의 위로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날 위로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내가 병실에 도착하기까지 회장님의 곁을 지킨 아저씨였다.
그렇기에 들어가서 쉬셔도 좋다고 말했던 거였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돌아오실 줄이야.

“집에 들어가신 것 아니셨어요? 혹시 무슨 일 생겼나요?”
그런 내 질문에 아저씨는 선뜻 말을 이어가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역시 무슨 일이 있구나.’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혹여나 재하와 관련된 일일까 싶어 손이 떨렸다.

“그게 말이다…….”
아저씨는 내게 어렵사리 입을 뗐다.
겨우 잠잠해진 심장이 다시금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곧 서무진 회장님의 유언장을 공개하겠다고 하는구나.”

“뭐라고요?”
기가 막혀 떡 벌어진 입술을 다물 수 없었다.
회장님이 이렇게 숨 쉬고 계시는데 유언장이라니.
순간적으로 어제 병실에서 기고만장했던 오 여사와 지한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 유언장 공개를 염두에 두고 했던 말들이었을까.
재하가 누명을 쓰자 기다렸다는 듯 밀어붙이는 두 사람의 추진력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회장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자신이 챙길 실리를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에 질릴 정도였으니까.

“언제요? 어디서요!”

“평창동에서 이제 곧 공개한다고 한다.”

“아직 회장님이 이렇게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짓을……!”
기어코 회장님을 밀어내려고 하는구나.
아저씨의 말에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회장님이 버젓이 숨 쉬고 계시는데 유언장 공개라니……!
더군다나 재하도 부재한 상황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하와 회장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재하 씨를 용의자로 만들고는, 어떻게든 후계자 자리를 지켜볼 심산이겠지.’
너무 속이 보이는 행동에 기가 막혔다.
그리고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내 눈동자 속에 비친 결연한 의지를 읽었는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가보거라. 내가 병실은 지키고 있으마.”
믿고 맡겨도 좋다는 아저씨의 곧은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평창동 저택.
이미 유언장 공개를 시작한 것인지, 거실에서 조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익 아저씨에게 유언장 공개가 있다고 들었을 땐, 설마 했는데.
차츰 거실에 가까워질수록 변호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거실에 모여 앉아 있는 지한, 오 여사, 부회장님 그리고 조 변호사가 보였다.

‘어떻게 이런 짓을…….’
자리 잡은 세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화가 울컥 들끓었다.
회장님이 부재한 상황에 어떻게 해서든 제 몫을 챙기려는 자들뿐이었다.

“회장님께서 회장직 수행 불능의 상황에 놓이셨을 때, 유언장을 먼저 공개하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

“유언장은 지난주 주말에 새로 작성되었습니다. 근래에 회장님 병환이 악화해서 새로이 쓰신 것입니다.”

“정말로 유언장을 새로 썼단 말이에요? 후우, 돌아가실 걸 아신 건가.”
오 여사는 태연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조 변호사를 향해 묻고 있었다.
네 사람은 내 성난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여기 찾아올 줄은 몰랐나 보지.’
내게는 비밀에 부친 상황이라고 덧붙이던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놀란 것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그들의 시선이 내게 얽혀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

“설명을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거실로 단번에 들어가 들고 있던 핸드백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제가 이 집안 며느리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