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길었던 악몽 끝에
(114/126)
113. 길었던 악몽 끝에
(114/126)
113. 길었던 악몽 끝에
2023.04.30.
“으음……. 눈부셔.”
벌써 아침이 밝았는지 눈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
언제 잠든 걸까. 지난밤을 떠올리기 시작하니 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재하를 만난 후, 정신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미쳤어…….’
자연스레 그와 만들어낸 어젯밤의 잔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이불을 끌어당겼다가 살며시 눈을 떴다.
재하가 있어야 할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쩐지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그가 반응이 없어 이상하다 싶었다.
“벌써 일어났나? 부지런해, 정말.”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시계가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간의 긴장감이 풀려서 그럴까. 오늘따라 몸이 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무거웠다.
‘열이 있나.’
전신에 퍼져 있는 미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감기약을 먹을까 하다가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지만 이상할 만큼 평온해 보였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빛줄기마저도 나른하게 느껴지던 그때, 핸드폰이 반짝하고 빛났다.
[서지한 대표가 공식적으로 해임되었다고 발표됐구나. - 현익 아저씨]
현익 아저씨에게서 들어온 메시지였다.
어제 재하가 돌아온 것을 보아 해임안이 가결되었다고는 생각하던 참이었다.
아침부터 들려온 지한의 소식에 잠이 확 달아났다.
벌써 포털사이트에 지한의 대표직 박탈에 관련된 기사들이 쏟아져 내렸다.
긴급 체포되어 가는 지한의 모습이 찍힌 기사를 보니 복잡미묘한 마음이 들었다.
후련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한때는 부부의 연을 맺었던 남자의 최후를 보아서 씁쓸한 건지.
아니면 날 버티게 하던 목표가 사라져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일어나야겠다.”
이대로는 무기력해질 것 같아 천천히 거실로 걸어 나왔다.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지만 이런 분위기가 내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회귀한 후로 매 순간이 전쟁과도 같았다.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그들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었고.
이 평온함은 길었던 전쟁 끝에 쟁취한 전리품과도 같았다.
서린은 형을 구형받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빠른 검찰 측의 수사 덕분에 지한과 오 여사는 곧 재판에 넘겨질 예정이었다.
그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파국뿐이었다.
끝내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무할까.”
복수가 끝난 다음 일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난 뭘 해야 할까.’
뚜렷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아 갑갑한 마음으로 주방에 들어갔다.
시원한 냉수라도 마셔야겠단 생각에 물잔에 얼음을 가득 채워 넣던 찰나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운동 다녀오는 거예요?”
어쩐지 거실에 나왔는데도 재하가 보이지 않아 어딜 간 건가 싶었는데.
그는 조깅이라도 다녀온 건지 운동복 차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모처럼 주말이라 조깅하고 왔죠. 일찍 일어났네요?”
“…….”
“내가 일어났는데도 꿈쩍 않길래, 더 늦게까지 잘 줄 알았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가 잡은 물잔을 힐끗거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음물 마시지 말라니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재하의 손이 더 빨랐다.
정신이 들었을 땐 그가 이미 내 잔을 가져간 후였다.
그 말을 끝으로 잔을 비워내는 재하의 목울대가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그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물잔을 내려놓았다.
“아침부터 잔소리예요?”
“잔소리라니. 당신이랑 오래 함께하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지.”
카운터에 비스듬하게 기댄 재하는 나를 향해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능청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아침부터 핸드폰이 울려서 깼어요. 서지한 씨 해임됐다면서요.”
“맞아요. 오늘 호진에서 공식 발표했죠. 서지한이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고요.”
그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의 목숨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죄를 재하에게 덮어씌우려고까지 했다.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지한을 떠올리니 재하를 마주하기 전까지 이어오던 생각들이 자꾸만 비집고 나왔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내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재하가 내게 가까이 밀착해왔다.
그러고는 내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부담스러울 만큼 재하의 곧은 시선이 내게 얽혀들었기에.
내 깊은 속마음까지도 들여다볼 것 같은 눈빛이었다.
“고민이 있는 것 같길래. 말해 봐요.”
이미 그는 내가 가진 고민이 있다고 단정 지은 것 같았다.
재하는 날 들어 올려 테이블 위에 앉혔다.
그 덕분에 그와 눈높이가 맞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재하는 테이블을 짚어 두 팔 안에 날 가뒀다.
말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집요한 얼굴이었다.
“고민 없는데…….”
“아니야, 분명 뭔가 있는 얼굴이야.”
‘예리해, 정말.’
적당히 둘러대는 말로는 그를 속일 수 없을 것이었다.
결국, 끈질긴 재하의 눈빛에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었다.
그를 향해 머뭇거리던 입술을 뗐다.
“다른 건 아니고……. 재하 씨는 복수가 끝난 다음의 일을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복수가 끝난 다음이요?”
내 고민이 이런 이야기일 줄은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재하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난 갑자기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어서요.”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재하를 보니 괜히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나 혼자 고민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았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를 재하에게 묻는 거부터가 이상했어.
말하고 나니까 조금 바보 같기도 했다.
재하가 날 가로막던 팔을 거둬들인 덕분에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아니에요. 그냥 해본 이야기예요. 아침 먹을래요?”
분위기를 환기 시켜 보고자 다른 화제를 던졌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죠, 지금?”
한동안 답이 없던 재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처음 한 질문에 대해 답을 하려는 것 같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이긴 한데.’
저 웃음의 의미는 뭘까.
날 바라보는 재하의 입매에 걸려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보였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
“좋아요. 앞으로 내가 여진 씨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요.”
그게 뭐냐는 듯 그를 바라봤지만, 재하는 입술을 늘여 웃을 뿐이었다.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온 그가 날 꽈악 안았다. 고민 같은 건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도록.
그는 나직하게 내 귓가에 속살거렸다.
“꽤 바빠질 거야. 우리가 해야 할 게 많거든.”
* * *
무진은 구치소 내 접견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지한을 기다리며,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퉁퉁 튕겨냈다.
창립 기념일에서 지한과 오 여사가 긴급 체포되었다.
도주의 우려가 있어 구속 수사가 불가피했다.
그렇게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창동 저택도, 회사도. 무진은 마음 한편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아버지가 재하를 미국에 보냈을 때부터 눈치챘습니다. 후계자는 재하라는 걸요.”
“…….”
“그런데 왜 굳이 여진이를 지한이와 맺어주려고 했을까 싶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죠.”
민국은 모든 것을 끝내고 평창동으로 돌아온 무진에게 물었었다.
“테스트셨죠? 지한이 녀석에 대한.”
‘테스트라……. 그래, 그랬던 거일지도 모르겠군.’
무진은 재하를 떠올렸다.
재하 녀석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명석해 일찌감치 후계자 수업을 가르쳤다.
그런 무진의 기대에 부응하듯,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다방면으로 두각을 내보인 덕분에 호진의 후계자는 당연히 재하라 여겨왔다.
단 한 순간도, 지한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어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진은 3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형제간의 왕좌 싸움에서 두각을 내보였고, 그 덕분에 호진을 물려받게 되었다.
피를 나눈 형제끼리 서로를 물어뜯는, 그야말로 칼만 뽑지 않았을 뿐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렸으나 무진은 깊은 회의감에 휩싸였다.
이 자리가 그토록 의미가 있는 것인가? 형제를 밀어낼 만큼.
긴 싸움 끝에 총수 자리에 올랐다 한들, 피로 얼룩진 자리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무진은 한 가지 신조가 생겼다. 바로, 후계자리는 반드시 장남에게 물려준다는 것.
그게 재하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제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온 재하가 돌연 여진과의 결혼을 물렀다.
재하는 여진이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후계 자리도 없을 거란 말에 그렇게 해도 좋다고 했다.
‘괘씸해서 그랬지……!’
처음에 무진은 그런 재하가 괘씸했다.
괘씸죄를 물어 후계자리를 두고 협박하면 금방이라도 고개를 숙이고 들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녀석은 굽히기는커녕 미국지사 파견에 좋다며 스스로 앞장섰다.
무진은 옛 기억이 떠오르자 한숨을 내뱉었다.
“고얀 놈들.”
지한도, 재하도 무진의 뜻대로 움직이는 녀석은 한 놈도 없었다.
재하가 쫓기듯 미국으로 떠나가고, 대표이사 자리에 지한이 오르자 모두가 수군거렸다.
재하가 무진의 눈 밖에 나서 후계자가 바뀌었다고.
명목상 유배였지만 실상은 재하를 다시 호진의 후계자로 부르기 위한 초석이었다.
때가 되면 재하를 호진의 후계자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기까지 지한이 무진의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즉, 후계자로서 자질을 보인다면 무진은 지한을 더블유로 보낼 생각이었다.
일찍이 이 부분은 윤 회장과 이야기가 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일을 이렇게 만들어…….”
어려서부터 지한이 겉보기와 다르게 속내가 시커멓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재하는 제 고집대로 일을 밀고 나가는 성향이었다면, 지한은 순종적이었다.
민국과 무진이 하는 말이 법이라도 되는 양 따랐다.
하지만 늘 그 아이의 그늘진 얼굴과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혼외자식이라 그런 것으로 생각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후계 자리를 위해 자신의 목을 조이려 들 줄은 몰랐다.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제 어미와는 다르다고 생각해 품어왔던 것인데.
사실 구치소에 접견을 오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아서 지한을 내쳤다.
그런데, 정이 무어라고…….
구속된 후로 내내 마음이 쓰인 무진이었다.
“후우.”
그렇게 그가 짙은 한숨을 내뱉는 순간, 접견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