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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뜻밖의 선물 (118/126)


117. 뜻밖의 선물
2023.05.14.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늦게라도 별장에 가자고 말할 줄 알았던 재하는 서울로 올라가자고 했다.

금세 마음이 바뀐 걸까. 아니면 별장에서의 계획이 수정된 걸까.

어찌 되었건 어제보다는 좋아진 그의 얼굴을 보니 이대로 서울을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까.’

재하를 바라보다가 운전석으로 향했다.

대신 운전하려는 내 모습에 재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진 씨가 운전하려고요?”

“네. 올라가는 길은 내가 할게요. 들를 곳이 있어서요.”

재하는 그런 내 말에 군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어디 가는지는 비밀이에요?”

그는 목적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 날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네. 비밀이에요. 도착하면 알 거예요.”

재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마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재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놀랄 것이었다.


‘어머니 산소를 가고 있다고는 생각 못 할 거니까.’

늘 언젠간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마침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있어 다행이기도 했다.

병실에 입원해 계시던 내 부모님을 뵈러 가자며 날 이끌었던 재하.

그때 부모님께 건네던 그의 말 하나하나가 내 가슴을 울렸다.

재하 덕분에 부모님을 생각하면 늘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행복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으니까.

그때의 일이 너무 고마워서, 나도 그에게 따듯한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재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할 풍경을 둘러본 재하가 내게 물었다.


“들를 곳이 여기였어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그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호진 가의 선영에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재하의 손을 이끌었다.

그렇게 언덕을 오르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찾고 있던 봉분을 발견했다.

묘지의 화단 양옆에는 계절에 맞는 조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주기적으로 관리되는 터라 묘석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재하는 한쪽 무릎을 굽혀 묘비에 적힌 어머니의 이름을 쓸어내렸다.

어머니를 생각했는지, 그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맴돌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추모 화단의 비어 있는 꽃병에 꽃을 꽂았다.


“아침부터 왜 꽃집에 들르자고 했는지 궁금했는데…….”

재하는 곱게 피어 있는 솔체꽃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꽃은 이곳에 오기 전에 사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웬 꽃을 사냐고 묻던 그에게 가보면 안다고 모호한 답을 한 이유를 이제야 이해한 눈치였다.


“우리 어머니가 솔체꽃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난 든든한 아군 한 명이 떠올라 스리슬쩍 미소 지었다.


“한 비서님이요. 이것저것 잘 알려주시던 걸요. 일등 공신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

어느 정도 예상했었는지 재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머님의 기일이 바로 며칠 전이었다는 사실은 한 비서에게 들었다.

하필 그 시기에 용의선상에 오르는 바람에 재하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이었다.

기일에 맞춰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타이밍이 참 얄궂었다.

잠시 무릎을 굽혔던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나란히 섰다.

오늘 그의 어머니를 처음 뵙는 건 아니었다.

오래된 기억이라 희미하지만, 호진그룹이 주최하는 파티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를 보며 살갑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었다.


“네가 여진이구나? 반가워. 아줌마 누군지 아니?”

 
그때는 너무 부끄러워 엄마의 등 뒤로 숨었었는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


“여진이가 부끄러움이 많구나? 아줌마는 재하의 엄마야. 재하와는 서로 본 적 있지?”

 
그녀 옆에는 어린 재하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형제가 없었던 나는 또래의 재하가 어색했다.

그리고 내게 살갑게 말을 건네던 그의 어머니 또한 낯설었다.


‘그런데, 그런 재하 씨와 결혼하게 될 줄이야.’

그때는 어려서 혼담이 오갔다는 사실도 모르던 때였다.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말을 건네 볼걸.

아쉬운 마음을 담아 묘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너무 늦게 인사드리러 왔죠? 윤여진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

“그때는 너무 어려서 어머님이 제게 건넸던 손을 잡지 못했어요. 그게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요…….”

재하는 말을 이어가고 있는 날 힐끗 바라봤다. 어느새 내 말에 숙연해진 얼굴이었다.


“사실 가장 바라시는 건 재하 씨의 행복이셨을 텐데. 재하 씨가 복수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힘드셨을 것 같아요.”

아마 눈을 감으시고도 편히 떠나지 못하셨을 것 같았다.

이건 어머님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에 계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머님께 드리는 말이었지만 실은 우리 부모님께 드리는 말이기도 해 가슴이 먹먹했다.

어쩌면 복수 말고 더 쉬운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한을 끌어 내리는 것 말고는 가슴에 사무친 한을 풀 방법이 없었다.

복수가 내 전부라고 생각하며 달려왔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가는 나약해질 것 같아 멈출 수도 없었다.

처절했던 복수 끝에 무너진 지한을 바라보며 느낀 행복은 짧았다.

속이 뻥 뚫릴 만큼 해방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를 옭아매던 족쇄가 사라졌을 뿐.

뒤늦게야 잘못된 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복수는 그들의 파국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빙빙 돌아왔지만, 이제는 재하 씨와 행복한 모습 보여드릴게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이제는 걱정 말고 편하게 쉬세요.’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내 옆으로 다가온 재하가 내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전 이 사람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더 그럴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는 어머니를 향해 말하면서도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꼭 어머님이 알겠노라 답하는 것만 같았다.

.
.
.

재하가 묘역의 관리인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차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산소를 찾아와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차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계속 하품이 쏟아져 입가를 가렸다.


“하음……. 왜 이렇게 졸리지.”

아침에 운전했다고 벌써 지친 걸까. 몸이 물을 머금은 솜처럼 축 처졌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꽤 길어지는 것 같아 차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날 조심스럽게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익숙한 아파트 단지가 보이자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어? 설마 나 계속 자고 있던 거예요?”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다고?

주차를 끝마친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이 잔 나 때문인지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깨지도 않던데요?”

“아아아……. 장시간 운전이었을 텐데. 깨우지 그랬어요.”

제법 거리가 있어서 홀로 운전하기 고됐을 텐데.

차 시트가 편하게 젖혀 있는 걸 보아 재하가 손을 써준 것 같았다.

원래의 계획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레스토랑에 들러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보기 좋게 물 건너갔다.


“우리 식사하기로 했는데…….”

“괜찮아요, 식사는 집에서 해도 되니까. 병든 병아리처럼 졸고 있길래. 그냥 편하게 자라고 둔 거예요.”

‘내가 진짜 피곤했나 봐.’

이런 적이 없었는데 새삼 재하 옆에서 마음이 놓였나 보다.

재하는 안전벨트를 풀다가 내게 몸을 밀착해왔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미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재하의 말을 듣고 이마를 짚으니 미세한 열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며칠 전부터 미열이 있더라고요.”

일전에 감기약을 먹으려다가 말았던 기억이 났다. 집에 상비약이 없어서 미뤘던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약을 먹어야 할까 봐……, 어?”

불현듯 머릿속에 잊고 있던 사실이 스쳐 갔다.

평소보다 높은 체온과 쏟아지는 졸음, 자연스레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 했던가? 설마…….’

핸드폰을 열어보자 이번 달 생리 주기를 훌쩍 넘어선 것이 보였다.

성급한 생각일 수 있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 * *

돌아온 월요일, 회의하는 내내 집중이 되지 않았다.

등을 기대고 앉기만 하면,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왔다.

길었던 회의 끝에 정신을 차리자, 사람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벌써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영준 선배는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건넸다.


“윤 후배, 요즘 잠을 잘 못 자지? 힘들면 휴게실 가서 눈 좀 붙이고 와.”

“죄송해요. 이런 적이 없는데 이상하네요.”

선배는 지한 때문에 내가 잠도 못 잘 만큼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은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쏟아져서 문제였다.


“그럴 수도 있지. 좀 쉬다가 와.”

선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 가능성을 생각하고 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편의점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약국에 가서 테스트기를 사 왔었다.

그렇게 해본 임신 테스트기는 임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분명 한 줄이었는데…….’

테스트기를 버리며 느꼈던 허탈한 마음이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이어졌다.

아이를 기다렸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더군다나 한 번 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나니 모든 것들이 임신의 초기 증상과 비슷해 보였다.

결국,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혹시 하는 생각에 산부인과 진료 예약을 잡아둔 참이었다.


‘병원을 가보면 알겠지.’

점심시간에 맞춰 병원을 와서 그런지 대기자가 많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릴까.

테스트기가 한 줄이었으니 임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도 진료를 기다리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윤여진 님, 진료실 1로 들어가세요.”

임신이 아닐 거니까 큰 기대를 하지 말자고 다짐했었는데.

초음파 촬영 영상을 보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6주 차 정도 되신 것 같네요. 이게 아기집이고, 아이는 여기 있네요.”

의사 선생님이 가리키는 곳에 점처럼 작은 아이가 보였다.

아직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을 만큼 작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테스트기를 사용했을 땐 임신이 아니었는데……. 이런 경우가 있나요?”

선생님은 내 말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그럼요. 테스트기는 하나만 해보셨나요? 드물게 테스트기가 불량일 때가 있어요.”

맙소사, 내 배 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임신 소식에 절로 손이 떨렸다.


‘약을 먹지 않아서 다행이야.’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약을 먹었다면 아마 내내 마음을 졸였을 것이었다.


“아이 심장 소리 들어보시겠어요?”

“……네. 듣고 싶어요.”

콩콩콩 하고 들려오는 심장 소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렁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자신이 여기 있다고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아서.

사실 초음파 영상을 볼 때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기에.


“아이 심장 소리가 우렁차네요. 임신 축하드려요.”

선생님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꾸만 손이 떨렸다.

내게 또 다른 삶의 목표가 생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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