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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좌를 찾아보자 (14/70)


새 성좌를 찾아보자
2023.04.16.


“용학 씨. 슬슬 고블린 말고 다른 몬스터들도 한번 상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플레이어 생활 내내 고블린만 잡으실 건 아니잖아요.”

이지은에게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준 뒤로 이 주가 지났다.

다음 날 자율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따라와 전날의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쉽사리 가르쳐 줄 내가 아니었다.
조금 매정하긴 해도 지금은 계속 모르는 척을 해야, 그녀의 관심을 최대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법이었다.

그래야 이후 사제 관계가 되더라도 이쪽이 완전히 주도권을 틀어잡을 수 있었다.

나는 단순히 누굴 가르치려 들려는 게 아니라, 제자들을 이용해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불구덩이에 빠지라고 했을 때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질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유를 물어볼 정도는 돼야 했다.

요즘 세상은 저 옛날 이야기책 속에서나 나오는, 스승을 제 하늘로 여기고 부모처럼 믿고 따르던 시대가 아니었다.

아무리 억만금을 주고 배워도 모자랄 가르침을 베풀었다 한들, 틈만 나면 언제든 단물만 쏙 빨아먹고 모르쇠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이지은이 그런 사람이라는 건 아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죠. 아직은 고블린이나 잡을 실력인 거 같아서요.”

난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그녀의 관심을 끊으며, 마저 투영기를 조작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면 상대방도 자존심이란 게 있으니 더럽고 치사해서 그냥 포기하려들 수도 있었지만, 이지은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제 권능에 대해 가르침을 내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속 이리 달라붙어 올 수밖에.

“그래도 가능하면 시설을 이용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강한 몬스터들을 겪어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던전에 보면 처음일지라도 목숨을 걸어야 하잖아요.”

“저기, 죄송한데. 이제 저 훈련 좀 하게 비켜 주실래요? 수강생이 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한테도 신경 좀 써 주시죠.”

칫-

“……네, 그러시겠죠.”

나는 끝내 오늘도 별 소득 없이 혀를 차며 돌아서는 이지은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제 속셈을 모를 줄 알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조금씩 난이도를 높여 가며 실력을 보여 봐야, 길드로 영입해 갈 빌미를 줄 뿐이었다.

남이 들으면 해 봐야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잡을 거라고, 그런 요상한 걱정을 하고 앉아 있나 싶겠지만, 아주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혈연, 학연, 지연.

위 셋을 통한 낙하산은 대한민국의 유구한 전통과도 같았다.

막말로 이지은이 길드에 제 조건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억지로 나를 들이려 하면 어쩔 건가.

물론 불사조가 무슨 호구도 아니고 무작정 받아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나를 챙기려는 건지 조사 정도는 해 볼 터였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급해진 지은이 내 훈수를 들었더니 권능이 올랐다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라도 한다면, 내 은퇴 라이프는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끝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처음부터 영입할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중요했다.

매일같이 늦게 남아 훈련하는데도 몇 주가 지나도록 발전이 없는 무능한 플레이어.

아무리 이지은이 팀장이라도, 그런 걸 어거지로 추천하진 못할 터였다.

조금이라도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아예 그조차도 없는 사람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팀장님도 참, 사람이 너무 좋다니까. 아무리 수강생이래도 저렇게까지 챙겨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열심히 하긴 하던데요? 영 진전이 없어서 그렇지.”

“열심히만 하면 뭐 하냐, 열심히만 하면. 저래 봐야 더 비참해지기만 하지.”

그동안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이지은의 무한한 관심에도 다른 길드원들의 반응은 냉랭할 뿐이었다.

이대로만 유지하면 된다, 이대로만.

저런 분위기 속에서 나를 영입하려 들 수는 없을 테니까.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언제나처럼 더 훈련하실 분은 남아서 마무리하시고, 아닌 분들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르르-

곧 하루 일정이 끝나고, 건물 한 층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강생들이 썰물처럼 훅 빠져나갔다.

몇몇은 자리에 남아 계속해서 투영기를 돌리고 있었지만, 그래 봐야 두셋이었다.

그래도 저번 주까진 열 명 정도는 자리를 지켰건만.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수강생들이 불사조 길드의 프로그램에 지원한 이유는 어떻게든 길드의 눈에 띄어 가입하기 위해서지, 끝까지 남아서 모의 사냥을 돌리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말은 안 해도 주변 길드원들의 쑥덕임과 시선으로 대충 누가 길드의 관심을 샀는지, 다들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떨어진 사람들은 미련을 버리고 돌아갈 수밖에.

부스럭-

“어? 용학 씨, 벌써 가시게요?”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하던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옆에 자리를 잡으려다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이지은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네? 그럼 안 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늘은 웬일로 안 남으시나 해서요.”

말은 그렇게 해도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 많이 불안한 모양새였다.

일이 잘 안 풀리기는 해도 아직 이 주 정도 기회가 남았으니 희망을 걸어 보고 있었을 텐데, 혹시 이대로 그만 나와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운 거겠지.

“아, 뭐…… 이제 좀 그만하려고요. 괜히 힘들기만 하고, 영 진전이 없는 거 같아서.”

“네, 네? 안 돼요! 지금 그만두면 저는…… 흡!”

청천벽력 같은 내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를 치던 이지은은, 이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스리슬쩍 주변을 살폈다.

“팀장님, 거기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니에요. 아무 일도. 하하…….”

다행히 다들 제 일에 한창 집중이었는지, 그녀가 무슨 얘길 했는지까지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지은은, 곧 그게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봤다.

“장난이에요, 장난. 많이 아쉬우셨나 보네. 그냥 오늘내일 할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는 거뿐이에요.”

“아, 아쉽긴 누가 아쉽다고 그래요!”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내가 건물을 나설 때까지 흘끔흘끔 이쪽을 살폈다.

의외네.

따라올 줄 알았는데.

하긴 그러기엔 주변의 시선이 영 부담스럽겠지.

그렇지 않아도 수강생 하나한테 너무 관심을 쏟는 게 아니냐며, 군데군데 우리 사이를 오해하는 사람도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삑-

길드 건물을 나와 홍천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 나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던전으로 향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딱히 벌어 놓은 돈이 떨어진 건 아니었고, 곧 내 첫 번째 제자가 될 이지은을 위해서였다.

모든 가르침이 으레 그렇듯, 백 번 듣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더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마침 딱 좋은 녀석이 있지.”

권능도 썩 괜찮고, 살아생전 인간의 몸으로 신화급의 격에 달했던 동양 역사상 최고의 무인.

그 성좌 정도라면 굳이 이지은을 가르치기 위함뿐만이 아니더라도, 당장 누구도 무시 못 할 강함을 얻는 것부터 시작해 여러모로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당장 수르트 하나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다가오기도 전에 다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겠지만, 더 강해진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삑-

잠깐 눈 좀 붙였다 일어나니 종점이었다.

곧장 버스에서 내려 관리소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내부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띵동-

나는 번호표를 뽑자마자 울리는 알림에, 텅 빈 창구로 향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곳엔 퍽 익숙한 얼굴의 접수원이 앉아 있었다.

“지금 입장하려고요. 근데 원래 이 시간에도 일하세요?”

“네? 아! 그때 그 혼자 들어가셨던…….”

전과 달리 피곤한 인상으로 끔뻑끔뻑 감기는 눈을 애써 붙든 그녀는, 나를 알아본 듯 말을 하다 말고, 잠시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고선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아흐, 죄송해요. 벌써 일주일이나 됐는데 영 적응이 안 돼서. 실은 최근에 민원이 많이 들어와서 근무 시간이 바뀌었거든요.”

접수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내민 등록증을 받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저런, 대체 누가 그랬대. 그렇지 않아도 다들 사는 게 고생인데, 참 할 일 없는 사람인가 보네요. 너무 괘념치 마시고, 힘내세요.”

그 할 일 없는 사람, 바로 나였다.

역시 공무원한테는 민원만 한 게 없다니까.

밤마다 열심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보람이 있었다.

“하하…… 아니에요. 소장님한테 얘기 들어 보니까, 딱히 틀린 말은 없더라고요. 처음엔 조금 짜증 나긴 했지만, 결국 일에 익숙해졌다고 요령 피운 건 제 잘못이 맞으니까요. 이번 달에 감봉당한 건 확실히 마음이 아프지만…….”

어우, 감봉까지 당했나.

플레이어 정보 누설로 신고하기에는 이지은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어서, 대충 근무 태도를 가지고 신고했었는데.

생각보다 화끈한 징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이런 부분에선 플레이어 딱지가 참 힘이 세단 말이야.

“여기, 등록 다 되셨어요. 그리고 전에 멋대로 사망 처리해 드렸던 거,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럼 안전한 사냥 하세요, 플레이어님.”

“아, 네. 고생하세요.”

그녀는 저번의 그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를 건네 왔다.

이거야 원, 저쪽에서 너무 깔끔하게 나오니 괜히 찝찝한 기분이었다.

……내가 조금 심했나?

“아니, 정신 차려 이용학. 심하긴 무슨.”

플레이어 정보 누설은 엄연한 범죄였다.

물론 나쁜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었을 테지만, 이쪽은 그 때문에 은퇴 계획이 시작부터 꼬일 뻔했다.

“그래도 이만 이걸로 용서해 줄까.”

감봉까지 당했는데 굳이 더 뭐라 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여러모로 반성하고 있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또 괜한 꼬투리를 잡아다가 민원을 작성해 넣는 게 귀찮았다.

이놈의 나라는 무슨 민원 하나 넣는데도 그리 인증하라는 게 많은지.

크그그긍-

“자, 그럼 그동안 얼마나 X끼를 쳤는지 좀 볼까?”

-키에에엑!

-캬아악!

금방 일전에 다녀갔던 통로를 열어 비밀 방 안으로 들어선 나는, 입구에서부터 격하게 반겨 주는 집주인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전에 왔을 때 이 히든피스를 클리어하지 않고 나간 이유였다.

고블린들의 번식력은, 두 마리서 일주일이면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그러니까 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 방에 적당히 남겨 놓고 몇 주 뒤에 다시 들르기만 하면, 굳이 몬스터들을 찾아 던전을 돌아다닐 것도 없이 편하게 돈 덩어리를 주울 수 있다는 얘기였다.

“참 아깝네. 원래대로라면 몇 달은 해먹을 생각이었는데. 벌써 거위의 배를 갈라야 한다니.”

화륵-

-캬아아아아악!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고블린 무리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며, 바닥에 떨어진 마석을 줍고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비밀 방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 내가 원하는 물건이 있었다.

관우 이전, 군신이자 무신으로 추앙받았던 사내.

많은 이들이 한낱 낚시꾼으로 오해하나,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손에 거머쥔 걸물.

태공망, 강상.

강태공(姜太公).

그가 남긴 무공비급이 바로 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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