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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날 도와줘, 라크라한 (6/11)


6화. 날 도와줘, 라크라한
2023.06.06.


라크라한은 한쪽 눈썹을 당겨 올렸다.

제프리는 다시 병을 들어 술을 따르며 말했다.

“전장에서 말입니다. 내 목숨도 지키기 힘든데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다닌 건 대공뿐이셨습니다.”

술병을 내려놓는 그의 손에는 손가락 세 개가 없었다.

그는 그 손을 들어 올려 라크라한에게 보여주었다.

“목숨과 바꾼 놈들입니다.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라크라한이 아니었다면 제프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목을 내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언제 적 이야기를 또 하는 거야.”

라크라한도 제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북부의 왕이었지만 다른 이들처럼 격식이나 권위를 찾지 않았다.

아직도 이곳이 전장인 것처럼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훈련을 했다.

마을에 일이 생기면 팔을 걷어붙이고 가서 도왔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이 뭐냐면요.”

제프리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가까이 댔다.

“그 여자분이랑 대공이랑 똑같다는 겁니다.”

“……뭐?”

“아무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서서 구하는 누군가. 그게 대공과 그 여자입니다. 제겐 두 사람이 닮은 걸로 보입니다.”

제프리는 그것도 몰랐냐는 얼굴로 인중을 늘이더니 다시 술을 휙,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베르체리아는 홀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번 쥐었다가 펴자 그 위로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힘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어.”

처음에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음에는 조금이나마 물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가 회복 능력이 돌아왔다.

“하…….”

도대체 왜.

어떤 연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라크라한.

그 남자와 엮일 때마다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자가 뭐길래.

“혹시 얼음 속성을 가진 자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댔다.

“북부의 영주들은 얼음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착각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지금 베르체리아는 이전의 각성자들이 보고 들은 모든 정보들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날씨의 여신이 가진 힘에 각성자들의 삶의 기록이 새겨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탑에 갇혀 사는 동안 능력뿐만 아니라 기억들도 잊었다.

가위로 자르듯 싹둑싹둑 잘려진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정보가 좀 더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에게 이 모든 것들을 빼앗아간 건, 어머니였다.

베르체리아에게 어머니는 세상의 전부이자, 접촉이 가능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망가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당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도망칠 기회가 생겼을 때, 그녀는 그 어떤 것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제게 가장 소중한 곳이 탑 안에 있었는데도 가지고 나갈 용기조차 내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 일도, 여신이 되는 것도, 심지어 탑에 있는 중요한 물건조차도 의미없게 느껴졌다.

더 이상 탑에 갇혀서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제대로 된 공기를 맡으며 푸릇한 잔디를 밟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제 것을 놓고 올 의미는 충분했다.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르게 혼자 살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화염 속에 갇힌 아이들을 보게 된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태어났으며, 그 본능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을.

결국에는 다시 탑으로 돌아가 제 것을 찾아와야만 함을.

다시 어머니에게 붙잡혀 갇히게 되더라도 되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베르체리아는 타티아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언니 어른이에요? 무슨 어른이 나무에 숨어 있어요?’

‘언니도 우리처럼 엄마가 죽었어요?’

응.

“나는 어머니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베르체리아는 무릎을 세우고 그곳에 고개를 묻었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 날 도와줘, 라크라한.”

마른 살갗 위로 닿은 이마가 뜨거웠다.

똑똑.

“헉!”

불현듯 들려온 노크 소리에 베르체리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자신을 찾으러 왔을까 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라크라한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아.”

새하얗게 질려 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가느다란 숨이 새어 나왔다.

*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라크라한의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후.”

라크라한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노크를 하기 전까지 그는 이 앞에서 꽤 긴 시간을 허비했다.

‘베르체리아라니.’

몇 번을 되새김질해서 생각해봐도 납득도, 이해도 되질 않았다.

반세기 전 실종된 날씨의 여신이 제 발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한때, 북부에 사는 모두가 간절히 베르체리아를 그리워했던 시기가 있었다.

라크라한 역시 그녀가 돌아와 이 혼돈의 시기를 정상으로 만들어주길 기대했었다.

가뭄으로 백성들이 죽어 나갈 때도, 전쟁이 터져 칼을 들 힘만 있다면 누구든 지옥으로 끌려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앞에서 제 기사단들의 찬란한 삶들이 잘려 나가는 것을 목격하며.

간절히, 기도했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녀 혼자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페리아트 제국에 신이라는 존재가 발을 대고만 있어도 수호의 능력이 발휘되리라는 건 이 땅에 사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

문득 라크라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지금은 왜 수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베르체리아가 이 땅에 있다면 모든 인간들에게 그녀의 기운이 닿았어야 정상이었다.

“이상한데.”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떠나지 않았었다면?

그렇다면 혹시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말인가?”

끼익.

그의 앞에서 문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크라한은 이마에 가느다란 주름을 잡은 채 벌어지는 문 사이로 시선을 내려놓았다.

‘능력을 잃어버린 여신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듬성듬성했던 이야기들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다.

어떤 이유로 인해 수호의 힘을 잃었고, 그걸 되찾기 위해 애쓰는 중이라면?

라크라한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문틈 사이로 작은 얼굴이 빼꼼히 튀어나왔다.

베르체리아는 딱 한 뼘만 문을 열어 놓고 그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피고 있었다.

빼곡한 정수리가 보이는 작은 머리에서 금발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

처음부터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더러운 차림새부터 사람을 두려워하는 눈빛까지.

누가 봐도 길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추측일 뿐이다.

그녀의 도움을 받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려면 이 가설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인간을 배신하고 떠난 신이었다.

방심했다간 더 큰 불행이 들이닥칠 수도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문틀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댔다.

“혹시 그 틈으로 나를 들어오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죠.”

“……!”

깜짝 놀라며 올려다보는 얼굴이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라크라한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이 여자는 그보다도 더 자주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후에 도서관에서 날 협박하던 여신이 하나 있어서 찾으러 왔는데, 그렇게 경계하는 걸 보니……. 음.”

싱긋, 입꼬리를 올려 웃은 라크라한은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제가 방을 착각했나 봅니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그의 보폭이 평소보다 넓었다.

등 뒤에서 베르체리아가 멈칫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난 당신과 거래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지금 당신을 협박하는 거예요. 라크라한.’

도서관에서는 미처 그녀에게 말해주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서 그에게 협박을 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라크라한은 그렇게 단순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여인이 정말 베르체리아가 맞다면 그녀는 철저히 그를 설득시켜야 할 것이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그에게 주눅 들지 않으며, 자신이 내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여신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

“잠시만.”

라크라한은 등 뒤에서 들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무시했다.

다시는 뒤돌아서지 않을 사람처럼 움직였다.

베르체리아가 알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그가 페리아트에서 유명한 협상의 귀재라는 것.

삼대륙 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배경에는 단지 라크라한의 뛰어난 전투력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재능 하나로 거대한 제국 하나와 왕국을 무릎 꿇린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

라크라한은 본능적으로 사람의 심연을 들여다볼 줄 알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도 알았다.

제라드 황제가 유독 라크라한을 견제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이봐요!”

빠르게 걸어가는 그의 뒤에서 미약한 힘이 달려와 그의 팔을 낚아챘다.

시야가 반 바퀴를 돌고, 그의 눈앞에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가 가득 찼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라크라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뭡니까.”

하얀 얼굴 속에서 얇게 벌어진 입술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달싹이고 있었다.

라크라한은 눈썹을 들었다가 한숨과 함께 내려놓았다.

“할 말 없으면 가겠습니다.”

그가 다시 반대로 돌아서려 몸에 힘을 주자,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뭐라고 하셨죠?”

베르체리아는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가지 마시죠. 방, 잘못 찾은 거 아니니까.”

“확실합니까?”

방금 전까지 초식동물 같았던 금안이 제법 짜증을 싣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이 정도만 할까.

“이제부터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꼭 기억해 둬요. 난 재물보다 시간이 더 귀한 사람입니다.”

베르체리아의 고개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기울었다.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싶어 갸우뚱대는 어린 강아지 같은 움직임이었다.

“만약 또 이렇게 내 시간을 낭비한다면, 다음 대화는 없을 겁니다.”

라크라한은 명심하라는 듯 매끈한 눈썹을 또 한 번 까딱, 들었다가 내려놓고, 한발 앞서 그녀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

베르체리아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저 남자는 참.

“……볼수록 별로인 인간이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라크라한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

베르체리아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그는 친절한 북부의 주군이었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하. 좋은 사람?”

베르체리아는 반사적으로 목 위에 손을 얹었다.

칼이 닿았던 느낌과 조금 전 남자가 내뱉었던 말의 온도가 놀랍도록 정확히 일치했다.

“아니면서.”

이 성의 사람들은 모두 철저히 속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남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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