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노력형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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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노력형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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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노력형 남자
2023.06.03.
“여기 여권이요.”
거실로 들어온 시윤이 가장 먼저 내민 것은 차용증도 아니고 혼인계약서도 아닌 미주의 여권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여권과 시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미주의 눈빛은 감동으로 변하고 있다.
“고마워요. 그런데 혹시 그 벌금 다 냈어요?”
시윤은 사건의 정황을 언제 말해 줄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너무도 진지하게 말하는 미주의 모습에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 넘긴다.
“왜요? 누가 벌금도 깎아 준답니까?”
“아니…… 어제 제가 200달러 먼저 냈거든요.”
왜 하필 200달러인지.
자꾸 200달러라는 단어가 시윤의 가슴에 날카롭게 박혀온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200달러도 털렸어요, 어제?”
“털리다뇨. 전 재산이 그거라 그것 밖에 못 준 건데.”
시윤이 미주에게 시선을 떼지 않자 미주는 고개를 숙이고 제 손만 만지작거린다.
“이제 당장은 2천 원도 없어요.”
하지만 이내 미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 그렇게 무서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저렇게 혼자 강한 척하며 살아왔구나.’
시윤이 속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말을 애써 참아 넘기며 태블릿을 꺼내 놓았다.
“자 이제 빚쟁이가 되든가, 10만 달러를 통장에 넣어두거나 둘 중 하나 골라 봅시다.”
그 말에 미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에 따라 시윤도 진지해진 모습이다.
“빚쟁이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반은 넘어온 셈인가. 시윤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살풋이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시윤 씨가 그랬죠.”
“뭐라고요?”
“계약금 뒤에 0을 넣던가 앞에 1을 더 써넣던가.”
시윤의 한쪽 눈썹이 잠시 찡긋했다. 하지만 별 미동 없이 미주를 주시한 채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앞을 고칠까요, 아님 뒤를 고칠까요?”
“뒤요.”
“뒤.”
“뒤에서 0 하나 빼주세요.”
“빼라구요?”
“네.”
“아니, 0 빼면 만 달러, 천만 원인데. 일 년 등록금 간신히 되는 금액으로 뭘 합니까? 또 알바하려고요?”
시윤은 돈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돈의 위력도 모르는 순 날탕 같은 여자가 왜 이리 소중한지 모르겠다.
얼른 도장을 찍게 해야 하는데 그냥 0 하나 빼고 도장부터 찍게 해야 하나.
순간 손이 떨릴 정도로 갈등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급한 마음에 금액을 줄인 채 계약서를 들이밀며 모양 빠진 꼴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후, 골고루 애태우는 여자네.’
“이제 한 학기 남았고 장학금 나오니 학비는 걱정 없어요. 그 돈이면 생활비하고 남은 건 한국 가서 충분히…….”
미주는 그저 배시시 웃어 보일 뿐 말끝을 흐렸다.
‘충분히…….’
그 남은 돈으로는 한국에 가서 월세라도 얻을 보증금조차 되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남의 돈을 덥석 받을 수는 없었다.
시윤이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태블릿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최미주 씨가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요, 이 계약 쉬운 거 아닙니다.”
말을 하고도 잘못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제 말을 듣고 미주가 계약을 다시 생각하는 사태가 생길까 걱정이 됐다.
시윤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미주가 딴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십만 달러를 걸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거 알고 있죠. 그러니 최미주 씨도 진중하게 계약 수행해주길 바랍니다. 중요한 일인 만큼 나는 대가를 낮게 책정할 순 없습니다.”
“그래도 돈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마음의 가책이 클 것 같아서요.”
“무슨 가책?”
“뭐, 양심의 가책 같은 거.”
“아, 정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면 되죠. 최미주 씨는 책임감을 갖고 난 정당한 내 권리를 주장 할거고. 계약금과 사례비를 주는 만큼요.”
“계약금 말고 사례비도 있어요?”
미주가 놀란 눈을 뜨고 시윤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뺏어서 이리저리 손을 옮기며 터치를 하다가 입을 벌린다.
“이 돈을 준다고요?”
시윤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큰 숨을 내쉬던 미주가 굳은 표정을 보였다.
“좋아요!”
뭔가 결심한 듯해 시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미주를 바라봤다.
“사례금은 빼고 계약금만 받고 사인하겠습니다.”
시윤도 더 이상 돈을 받으라 마라 할 여유가 없다. 얼른 사인을 받아 내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예의상 한마디를 더 물어봤다.
“변호사 부를까요?”
“변호사는 왜요?”
미주는 조금은 떨린다는 식으로 몸을 움츠렸다.
“모르는 조항이 있으면 설명도 받고 미주 씨한테 불리한 조항이 있는지도 체크 해야죠.”
“아니요. 그런 거라면 변호사까지 부르실 필요 없어요.”
미주는 태블릿에 시선을 꽂고 한참 동안 계약서를 살폈다.
입술을 옹알대며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던 미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느 한 부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설마, 결혼식도 해요?”
“정식 라이센스 있는 주례를 모시고 결혼해야 혼인계약서가 나온다는 거 모르고 있었습니까?”
“아니, 그건 아는데…….”
“그리고 결혼사진도 찍어서 집에 보내야 하고요.”
더럭 미주에게 계약이 현실로 다가왔다.
“계약금이 많은 게 아니죠? 맘 바꿨으면 사례비도 다시 받지.”
“아, 아니요. 여기다 사인하면 되나요?”
미주는 제 이름이 적힌 부분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시윤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사람이 계약서를 앞에 두고 변호사를 불러준다는데도 거절하고, 준다는 돈도 마다하는지, 시윤은 앞으로 미주를 가둬두듯 옆에 두고 지켜야 할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네, 적어요.”
미주는 손을 잠시 쥐었다 폈다 하더니 펜을 잡고 태블릿에 사인했고 시윤도 태블릿에 사인을 한 후 미주 앞으로 돌려놓았다.
“악수를 할까요, 포옹을 할까요?”
벌써부터 적극성을 띠며 평범한 부부생활을 연습하려는 것일까. 미주는 노력형 남자 시윤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오늘은 악수만 하죠.”
미주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시윤이 미주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가볍게 포옹했다.
“1년입니다. 1년 동안 자신 있죠?”
“네? 네.”
시윤도 자신 있다. 1년 동안 미주가 완전히 제게 빠져들도록 할 자신이.
* * *
나머지 서류는 시윤이 데니와 함께 빠르게 처리 중이었다. 그리고 미주는 계약일지라도 결혼식을 앞두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뭐야, 왜 나만 설레는 건데!’
하지만 미주의 눈에 시윤은 그저 행정적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보일 뿐이었다.
“결혼식은 어디서 하는 게 좋을까요?”
미주는 그것까진 생각지 못했다.
“공증서류를 하루라도 더 빨리 받을 수 있는 곳은 시청인데, 교회보다 시청이 낫겠죠.”
“네? 네.”
미주는 약간의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결혼식인데……. 그래 진짜 내 결혼식은 가장 아름답고 로맨틱한 곳에서 할 거야.’
미주는 혼자만의 다짐을 했다.
시윤은 이 모든 행정 절차가 빠르게 끝나기만을 바랬다. 재단 일로 할아버지의 귀국 독촉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행정 절차가 마무리돼야 미주에게 정당하게 집중할 수 있기에.
드디어 결혼식 당일 미주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시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걱정이 됐다.
‘아무리 형식적인 결혼일지라도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갈 수는 없잖아.’
결혼주례를 보는 시청 직원이 과연 이런 차림의 신부를 진짜 신부로 보고 결혼 선포를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더 큰 고민은 드레스를 고르는 것이었다.
시윤의 집으로 온 미주는 드레스 룸에 걸린 3벌의 드레스를 놓고 놀라움과 고민에 빠져 들었다.
굳이 레이블을 보지 않아도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
미주는 한참을 망설이다 세 벌의 옷을 모두 차례로 입어보고 마지막으로 입은 튜브탑 드레스를 입고 거실로 나섰다.
“뭐야? 나 혼자 수선 떤 거야?”
시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문밖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괜한 기대를 했나 싶어 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체크했다.
맞춰 입은 듯 딱 떨어지는 보디 라인.
‘나한테도 이런 우아한 모습이 있었나.’
미주 스스로 놀라는 중이었다.
그때 거울 옆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윤의 모습이 비춰들었다. 미주는 거울 속 시윤을 향해 돌아섰다.
“언제 왔어요?”
시윤은 네이비 컬러의 슈트를 입고 있다. 그리고 대사관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보 타이를 매고 있었다.
‘이미 대사관에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만, 다시 보니 왜 가슴이 뛰는 거지.’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놓고 있는 미주에게 시윤이 다가왔다.
“다른 것도 입어봤어요?”
“네.”
“다른 것도 보고 싶은데.”
“왜 이상해요?”
“남은 두 벌도 지금처럼 예쁜지 궁금해서.”
그 말에 미주는 얼굴이 붉어졌다.
“디자이너가 잘 골라 줬나 봐요. 다 괜찮았어요.”
“내가 골랐어요.”
언제 시간이 있어서 세 벌씩이나 골랐을까. 그리고 치수는 어찌 알고 맞춘 듯 딱 맞게 골랐을까.
그의 손길과 눈길이 담긴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시윤은 손끝으로 미주의 가슴과 목 사이로 연결된 드레스 라인을 살짝 쓸었다.
그 손길에 미주가 살짝 움츠러들자 시윤은 얼른 미주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왔다.
“나와요. 스태프들 왔어요.
“무슨 스태프요?”
“메이크업이랑 헤어.”
그러고 보니 시윤은 이미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듯 모든 모습이 완벽했다.
미주는 시윤이 예쁘다고 말해줬지만 그와 비교하면 자신은 아직 촌티를 벗지 못한 여자로 느껴졌다.
거실에는 6명의 사람이 미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뭔 사람이 이리 많아.’
놀라긴 했지만 시윤의 입장을 고려해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헤어 디자이너는 연신 미주에게 칭찬을 하며 헤어스타일을 정리해줬다.
그리고 두 명의 헤어 어시스턴트는 미주에게 필요한 게 없냐. 음료라도 마시겠냐. 물으며 미주의 기분을 최고조로 올려놓으려 노력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해야 하는 순간이기에 스태프들은 신부를 위해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헤어가 마무리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메이크업 스태프들이 미주에게 모여들어 곱게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저희가 한국 영화팀이나 배우들이 해외촬영을 올 때 메이크업 지원을 하는데 배우들보다 더 이쁘네요.>
도에 넘는 칭찬이라 생각했지만 미주의 귀에도 즐겁게 들렸다.
하지만 말하는 스태프는 진심을 다한 칭찬이었고 옆에서 바라보는 시윤의 눈에도 그리 보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미주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그리고 거울 너머로 감탄의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시윤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