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원래 천재 작가였다-104화 (104/190)

104. 오랜만에 재미있겠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찾아올 손님 때문에 윤호는 일찍이 작업실을 쓸고 닦았다. 예전만큼 청소를 금방 끝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두 세배로 불어난 살림살이와 책 때문이었다.

‘청소를 해도 이젠 작업실이 탁 트인 느낌이 없군.’

지난 2년간 책값으로만 쓴 돈이 꽤 된다.

'정말 닥치는대로 읽었으니까.'

이전에 선물받은 찻잔 세트를 한쪽에 들인 작은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왔다갔다하며 다과를 차려놓고 멀찍히 떨어져 안 치운 물건은 없는지 작업실을 점검했다. 타이밍 좋게, 똑똑. 인기척과 함께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밝은 얼굴로 문을 열자 은세이와 윤민수가 무언가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둘이 바로, 무호의 작업실로 오는 오늘의 손님이었다.

***

밖은 추웠지만, 셋은 무호의 따뜻한 작업실 안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작가님.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한 일년만인가요.”

“네. <머러미쿠>의 나머지는 거의 은세이 매니저님과 함께 작업했으니까요. 그래도 항상 연락주셔서 작가님 의견도 잘 반영했으니, 대 만족입니다.”

“아··· 그나저나,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축하요?”

“네. 명예직급 수여받으시고 나서 1년 채우고 이사급으로 승진하셨다면서요.”

“여기서 축하받으니 쑥스럽지만 전부 작가님 덕이죠.”

앞에 놓인 차를 한모금 한 윤민수가 커다란 종이가방을 꺼냈다.

“맞다. 이거... 작가님 겁니다.”

“제거라고요?”

“네. 열어보세요.”

열어보니 엄청난 양의 펜레터가 빼곡히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무호 작가 앞으로 온 전 세계의 팬레터입니다. 그 나라 담당 출판사에 보낸 사람들도 많아서 이게 전부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하.”

“이런걸 보면... 팬미팅은 꼭 구석구석 다녀야겠네요.”

무호가 한쪽에 그것들을 소중하게 보관했다. 심심할때 하나씩 뜯어 읽어봐야겠군.

“그나저나, 작가님. 이젠 조금 여유가 생기신 건가요? 복귀 선언하신거 들었거든요.”

“네. 이번 6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도 하고... 매니지먼트도 시작해보려고요.”

서울예술종합학교를 3학년 2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이 가능했던 건, 지난 2년 간의 노력 덕분이었다. 학기당 20학점이 훌쩍 넘게 들었을 뿐더러 모두 A+를 받았으니 가능한 것이었다. 담소는 이쯤 나누고, 본격적인 대화로 들어가야 했다. 무호가 윤민수를 향해 말했다.

“그··· 이전에 말씀주셨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 해요.”

“아, 네! 제가 안 그래도 정리를 싹 해왔죠.”

윤민수가 이곳에 오겠다고 한 건 오로지 무호와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에서 쌓은 정이 가장 이유가 컸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이젠 임원급인 윤민수가 굳이 소속 작가의 작업실까지 찾아갈 이유가 없으니까.

“여기, 보시면···”

무호는 윤민수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작가님이 시간이 될때 보시고 연락달라며 다들 난리가 났어요.”

지난 공백기, <머러미쿠> 건으로 무호와 컨택하기 위해 <북앤컬쳐스>에 연락을 취한 국내/해외의 제작사나 출판사들이었다.

‘영화화 제안이 제일 많구나.’

<머러미쿠>가 시리즈물인 만큼, 영화화를 원하는 제작사는 물론이고 굿즈 생산이나 콜라보를 원하는 의류회사들도 있었다. 옆에서 함께 서류를 읽던 은세이가 중얼거렸다.

“...이런 게 바로 세계적인 인기라는 거겠죠?”

“제가 미국에 초대받았을 때 보다 러브콜이 더 한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때보다 더합니다. 작품 완결이 나서 그런걸거에요.”

어찌되었건, 거의 영화화나 콜라보 투성이였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유니버티 스튜디오>에서 온 테마파크 관련 제안이었다.

‘이건 좀 끌리는데?’

상의 후 몇군데를 골라낸 무호와 은세이가 윤민수를 향해 말했다.

“제가 동그라미 친 곳들과는 한번 컨택해보고 싶어요. 물론 당장은 아니고요.”

“걱정 마세요. 여기있는 모든 회사들이 다 작가님을 지금까지 기다린 곳이니까요. 제가 하나하나 담당자와 마지막 확인전화까지 했다구요.”

다시 종이를 넘겨받은 윤민수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유니버티 스튜디오> 제안이 파격적이죠? 크... 저도 거기 연락이 온 후는 작가님을 기다리느라 발을 동동 굴렀답니다.”

***

이후 윤민수가 먼저 떠나고, 작업실엔 은세이와 무호가 남은 상태. 은세이가 돌변해 무호를 재촉했다.

“작가님.”

“네?”

“저 현기증 날 것 같아요.”

“현기증이요?”

무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안 그래도 은세이와 어제 작품 이야기를 하다 밤이 늦어 이야기를 내일로 넘긴 참이었다.

'작품을 보여달란 말이겠지?'

잠시 후, 숨쉬는 소리도 죽인 고요한 방 안. 안경까지 쓴 은세이는 턱을 괸 채 무호의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

“···”

앞에서 책을 읽던 무호가 힐끔 은세이를 바라보았다. 어제 분명 읽었을텐데 한번 더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더 확인할 부분이 있는 건가?’

한동안 집중하던 은세이가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제야 알겠네요. 작가님 원고를 읽다 무언가의 감정을 느꼈거든요. 그걸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어서 빠르게 한번 더 임팩트 있는 장면들을 훑어봤어요.”

“···표현이라 하시면?”

“그러니까··· 작가님도 그렇지만, 저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진달까요?”

“네?”

“이걸 읽은 제 자신이 대단해보여요.”

은세이가 팔을 파닥거렸다.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 권장도서를 읽었을 때의 만족감이랄까. 아니, 이게 아니라··· 누군가가 내 인생책이 무엇이냐! 이런 식으로 묻는다면, 단 한치의 고민도 없이 이 책을 꼽을거란 그런 느낌이에요.”

무호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라도 그랬었지.’

뭔가 뿌듯하다고. 주제가 심오해서 읽을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어느새 다 읽었다고.

“제 친구도 그랬어요.”

“뭐, 뭐죠? 이 원고를 본 게 제가 처음이 아니라니···”

섭섭한 표정의 그녀를 향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는 반밖에 못 봤어요. 완성본은 매니저님이 처음이죠.”

“그렇다면 좋습니다.”

은세이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쨌든, 너무나 잘 짜여진 소설이에요. 문장도 그렇고 각 장에서 주는 메세지도 그렇고요. 명불허전이네요.”

“...독자들이 느끼는 이 소설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은세이가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제가 생각하기엔··· 너도 나도 읽었다고 자랑할 법한 책이랄까요. 내가 이 심오하고도 어려운 책을 읽어낸 고급 독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확 준달까요. 그런 식의 마케팅으로도 충분히 다른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겠어요.”

“예를 들면요?”

“작가님이 문학적 능력이 딸린다며 꼬집은 평론가들이요.”

텔레파시가 통했다. 마주본 둘이 피식 웃었다.

“그런 사람들이 나타날까봐 신춘문예에 일부러 시간을 쪼개서 응모한 건데,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죠.”

“이참에 입 다물게 만드는 것도 좋겠네요.”

벌써 이 책을 출판할 생각에 행복하다는 듯, 은세이는 눈을 감고 상상했다.

“<붉은 손>이랑 <소년실격>, <거짓>까지 포함해서 출판 다시 시작하고, 이 원고까지 어서 책으로 뽑아내자구요.”

“너무 바쁘시지 않겠어요?”

“무호 작가의 재림인데 제가 가장 힘써야죠. 지금 여기저기서 아주 매의 눈빛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다구요.”

“새 원고 출판이랑, 앞의 책들이랑 함께 출판이라니 너무 무리하실까봐 그래요.”

“무리일까요?”

“네?”

“사실 말씀 안드린 게 있어요. 저희 출판 1팀 대다수 인원이 이쪽으로 이직하기로 했거든요.”

“!”

그녀가 케이스에 넣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늦게 말씀드려 죄송해요. ...허락해주실건가요?”

“허락하고 말고 할게 아니죠. 매니저님이랑 가장 손발이 잘 맞는 분들일텐데,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겠어요.”

은세이의 표정이 살짝 쳐졌다.

“사실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닌게, 제가 떠난 후에도 출판사 사정이 그리 좋아지지는 않았나봐요. 새 편집장도 대표이사가 소개로 온 사람이라 트러블이 잦았다고 하고, 팀원들도 스트레스는 받는대로 받고 봉급은 그대로고요.”

“정신을 못 차렸네요.”

도저히 갱생불가능한 사람도 있는 법이지.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 더 그런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가 작가님께 말씀드리기로 했고요.”

“환영입니다. 이거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네요.”

“무호라는 이름 두 글자가 붙어서 그래요.”

미소지은 은세이가 고개를 들어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책장 맨 끝을 향해 있었다. 책들이 가득 책장을 채워, 거의 쓰러질 듯 보이는 광경이었다. 수납공간이 갈수록 부족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무호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하하... 손님들 온다고 제가 잡다한 책을 다 위로 올려버렸네요.”

“매니저로서 이야기하자면, 작가님에게는 하루 빨리 이것보다 더 넓은 창작공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도 독립 겸 이사 계획은 있지만, 지금은 제 사정보다 우리 소속 작가들 사정이 조금 더 중요할 것 같은 시기라요.”

“소속작가들이라면...”

은세이의 말에, 생각하는 이들이 맞다는 듯 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형-!”

“응, 강윤아.”

매니지먼트 계약서를 쓰고 회사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게 저번주의 일이었다. 그래서 강윤의 수학학원도 보낼 수 있었고.

“나 오늘 학원에서 테스트 보고 왔어!”

후다닥 달려온 강윤은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나이였다. 막내동생의 한껏 올라간 입꼬리에, 강준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래? 잘 봤어?”

“나 상급 반 배정받았다?”

“···!”

평소엔 날카로운 강준의 눈이 순간 동그래졌다. 앉은뱅이 상에서 퇴고를 하고 있던 강준이 일어나 강윤을 향해 다가왔다.

“그게 진짜야?”

“응! 진짜지. 학원 원장쌤이 중학교 땐 경시대회 준비해보래.”

강윤이 수학을 잘 하고, 공부에 욕심이 있는 것은 강준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이야. 미리 지원해주지 못한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

“형, 나 잘했지?”

가만히 있는 강준에게 칭찬을 원하는 강윤이 싱글벙글 물었다. 그러나 강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글로 벌이를 할 수 있다면, 이런 건 걱정거리도 되지 않았을 텐데.

‘그러려면 신춘문예부터 열심히 준비해야겠지.’

당선되면 받는 고료가 무려 3천만원이다.

“잘했어, 잘했어. 가서 얼른 더 공부해.”

“지금은 쉴래.”

“그럼 가서 쉬어. 엄마 오시면 다 같이 저녁 먹자.”

끄덕인 강윤이 사라지고 강준이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무려 6년을 쓰던 저가의 노트북이지만, 가끔 툭 꺼지는 일도 없이 멀쩡했다.

‘이 녀석이라도 멀쩡해서 다행이네···’

지원받은 금액은 500만원. 남아있는 지원금이 많기야 했지만, 섣불리 무언가를 살 수는 없었다. 그야 살면서 자신을 위해 그리 큰 돈을 써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이런 식의 소비도 어려웠으니까.

‘노트북 정도는 사야 하나.’

이러다 갑자기 꺼지기라도 하면 낭패였으니까. 강준은 잠시 고민하다 휴대폰을 꺼내 글을 찍었다.

‘이러면 걱정은 없겠지.’

노트북이 꺼진다 하더라도 큰일은 아닐테다.

‘옮겨 적는 게 조금 무리지만···설마 꺼지겠어.’

언제까지나 보험일뿐이다. 이내 열심히 글을 고치는 강준의 눈동자가 깜빡였다. 그렇게 몇 시간을 딱딱한 바닥에 앉아 글을 썼을까. 허리를 콩콩 친 강준이 뿌드득 어깨를 풀었다.

‘그래도 알바를 안 가니까 좋네.’

글에만 집중하라는 윤호의 말이 생각나 알바는 바로 그만두었다. 그야 본인이 그토록 원했던 것이기도 하니까.

지이이잉-!

그때, 바닥에 둔 휴대폰이 진동하며 움직였다.

[수신전화]

정윤호

‘정윤호?’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해? 글 쓰는 중?”

“그래. 덕분에 알바 때려치고 편하게 글 쓰는 중이다.”

“너··· 서문일보 신춘문예 지원한다고 했었나?”

“어.”

“다음주가 마감이네. 그치?”

“그렇지. 근데 그건 왜?”

평소 자신의 스케줄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윤호였기에 강준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생겼다.

“나와.”

“뭐?”

“저번에 만났던 너희 동네 카페야. 얼른 나와.”

“뭐 이렇게 갑자기 불러? 나 시간 없...”

아니지. 내 고용주가 되었으니, 가라면 가야 하나? 힐끔 시계를 본 강준이 옆에 두었던 가방에 슬그머니 노트북을 챙기며 물었다.

“근데··· 글 쓰는데 집중하라며 왜 부르는거야? 봐주기라도 하게?”

“일단 와봐.”

윤호가 반대편에 앉은 세린과, 옆에 앉은 승오를 한번씩 확인했다.

“참고로 승오랑 세린이도 와 있어.”

“뭐?! 애들을 다 우리 동네로 불렀다고?”

신발을 구겨신고 집 밖을 나서려던 강준이 당황해 삐끗했다.

“뭐 어때. 어차피 여기까지 그리 멀지도 않아.”

“에이 씨, 금방 갈게, 기다려.”

급하게 나가는 듯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우당탕 소리에 윤호가 잊지 말라는 듯 말했다.

“올때 문구점이나 인쇄소 들렀다 와.”

“왜?”

“왜긴 왜야. 네 소설 4부 인쇄해와야지.”

소설 4부 인쇄?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강준이 드디어 윤호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합평하자는 말이구나.’

강준이 씩 웃었다.

“...알았다. 들렀다 갈게.”

윤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보니 이 인원, 그때 한빛 캠프에서의 그 합평 인원이 아닌가.

‘오랜만에 재미있겠는데.’

다들 어떤 식으로 글을 써왔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았다. 윤호도 기대되는 표정으로 강준이 오기를 기다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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